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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특이점이 온다 (287/326)

  < 286. 특이점이 온다 >

  286.

  아무런 문제 없이 축제 분위기였어야 할 진수식은 마르쿠스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하나 더 가져다주면서 끝나게 됐다.

  물론 진수식 자체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

  새롭게 선보인 대형 범선은 아무런 문제 없이 운행이 가능했고, 추첨으로 군중들을 태워 짧게 항해도 즐겼다.

  아직 대량 생산은 꿈도 꿀 수 없는 단계이긴 했으나, 화포가 상용화될 때쯤이면 로마의 주력배들은 거의 다 범선으로 교체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 전까지 전반적인 천문학을 뜯어 고쳐놓을 필요가 있단 거지.'

  처음에는 나침반과 망원경 정도만 구비해 놓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나침반은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만들 수 있는 물건이고 망원경의 제작도 문제없었다.

  '그런 건 다 고려했으면서 어째서 천문학과 항법을 생각하지 못한 거냐 바보같이.'

  지금까지 너무 물건의 개발과 기술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눈에 딱 보이거나 사람들에게 체감이 되는 분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선순위를 뒤로 미뤄버린 걸지도 모른다.

  이유가 뭐가 됐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늦지는 않았다.

  마르쿠스는 이미 천동설이 굳어진 시대에 어떻게 지동설을 설파해야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이번에도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었다.

  마르쿠스의 발언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으니까 그가 지구가 돈다고 하면 도는 게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알아보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시대에 천동설은 정교한 학문이었으며 이미 몇 차례의 검증이 끝난 객관적인 과학이었기 때문이다.

  "권위로 찍어누른다면 겉에서만 납득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여전히 천동설을 설파하겠지."

  이건 관습으로 굳어졌던 농사법을 개혁하는 거나 미래에 있을 일을 예언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농사법이나 위생 개혁은 몇년만 지나도 눈으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니 밀어붙이는 게 가능했다.

  안 되면 자신이 책임진다고 하고 강행하면 결과로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대지진을 예언한 것도 마찬가지다.

  만약 예언한 때가 되지 않아도 지진이 일어나지 않으면 후계자들이 꽤나 고생하겠지만, 지진이 일어난다면?

  그날 이후로 율리우스-리키니우스 가문은 문자 그대로 진정한 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이 얽혀 있는 분야는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천동설은 엄밀히 말해서 연금술처럼 턱도 없는 분야가 아니었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천동설은 허무맹랑한 무지성의 산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미 현대인들에겐 그게 상식이었으니 '어떻게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돌아 쯧쯧, 멍청한 고대인들.'이라고 비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어떤 사람들은 종교의 강압으로 굳어진 천동설이라는 비과학을 지동설이라는 과학이 타파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역시 잘못된 관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천동설은 아주 좋은 과학이었던 까닭이다.

  확실한 관측 모델이 있고, 초기 모형이 있으며 예측과 관측을 통해 모형을 수정한다.

  그리고 반증을 통해 모형을 계속 수정하다가 이윽고 과학의 지속된 발전으로 지동설로 대체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지금 수준의 과학으로는 천동설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개념이란 거지."

  당장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나 수레나스를 상대로 지동설을 설명해 보려고 시험해 보았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처참했다.

  "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냥 지금 하늘을 보기만 해도 태양이 움직이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마르쿠스 님 말씀대로라면 태양은 가만히 있고 이 땅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씀이신데······."

  "그래. 엄밀히 말하면 태양도 은하의 중심부를 축으로 공전하기는 하는데 이건 알 필요 없으니까 넘어가자. 핵심은 태양계에서는 태양은 고정되어 있고 주변의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도 마찬가지고."

  스파르타쿠스는 아예 이해를 포기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수레나스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며 마르쿠스의 말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마르쿠스 님,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습니다. 진수식에서 보았던 천문학자들도 지동설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결함덩어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넌 걔네들하고 내 말 중 뭐가 진리라고 생각하지?"

  "당연히 마르쿠스 님의 말씀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 내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이해를 해보려고 해봐. 딱히 그냥 신앙심으로 믿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우선 너희를 이해시켜 보려는 거니까."

  마르쿠스의 말이라면 뭐든지 경청하고 받아들일 자세가 된 이 두 사람도 이해시키지 못하면 어떻게 천문학자들을 납득시키겠는가.

  역사적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방식은 별 참고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도 지동설을 증명할 확고한 방법을 제시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그저 천동설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물론 고전 물리학이 완벽히 정립되지 않은 시대를 기준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자면 천동설은 고대 시대에서는 지동설보다도 훨씬 더 이치에 맞게 보일 수 있는 학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정확한 논거를 뽑아낼 필요가 있었다.

  마르쿠스는 몇 시간에 걸친 치열한 설명을 통해 스파르타쿠스와 수레나스에게서 계속된 질문을 유도했다.

  그렇게 진짜로 지구가 돈다면 이런 현상은 어째서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몇 개 받고 나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이걸 전부 설명하려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외계어로밖에 들리지 않는 법칙들을 전부 설명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타르코스가 왜 천문학자들에게 조롱만 당했는지 이제야 알겠네.'

  원래 과학이란 뭐든지 단편적으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판금갑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철의 제련 기술부터 끌어올려야 했던 것처럼, 지동설도 관련된 수많은 이론들을 정립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수많은 이론을 마르쿠스가 하나하나 다 설명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정규 교육 과정에 지동설을 끼워 넣는 것부터 시작하자.'

  마르쿠스가 구상하고 있는 고등, 대학 교육기관의 설립은 이제 막바지 단계에 와 있었다.

  사관학교는 이미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들과 학자들을 육성할 기관도 곧 선보일 예정이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항해사들이나 천문학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일단 교수가 될 사람들부터 물색해봐야겠군. 그리고 앞으로의 논쟁은 그냥 그 사람들에게 일임하면 되겠지.'

  계획을 세웠다면 단숨에 실행하는 게 마르쿠스의 방식이다.

  그는 즉각 이집트와 그리스의 이름난 천문학자들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초대했다.

  훗날 천문학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기록될 크테시폰 천문학 세미나의 개막이었다.

  ※※※

  마르쿠스의 초대를 받은 천문학자들은 기꺼이 세미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와 그리스에서 크테시폰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학자들의 편의를 고려해 기간을 넉넉히 잡고 여비도 모자람 없이 챙겨주었다.

  그렇게 확정된 개최일은 반년 후.

  <태양은 지구 주변을 돌고 있는가>로 정해졌다.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은 플라톤부터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집대성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기회라 여겼다.

  그리고 의외로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도 소수나마 있었다.

  물론 극소수에 가까웠지만, 이들은 천동설이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밝히겠노라 공개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마르쿠스는 학자들이 크테시폰까지 오는 동안 먼저 자신의 입이 되어줄 교수진들을 섭외했다.

  마침 범선의 건조 때문에 수많은 학자와 기술자들이 크테시폰에 머물고 있어 사람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들도 처음에는 당연히 마르쿠스의 설명에 기겁을 하며 반대를 해댔다.

  "위대한 샤한샤이시여. 샤한샤께서 만드실 교육기관의 교수가 되는 건 더없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하는 건 정말로 놀라운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기관의 교수들은 연구와 논문으로 실적을 내는 이상 자금의 걱정 없이 계속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네. 학생들도 선별된 우수한 이들인 만큼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는 데만 신경 쓸 수 있게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샤한샤께서 이토록 학자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니 앞으로 로마의 학문은 번성을 거듭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학문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과목의 선정 역시 중요하온데 지동설을 넣는 것은······."

  마르쿠스가 데리고 있는 학자들은 당연히 그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가 직접 손을 댄 화학이나 철강은 이미 몇 세기 이상을 훌쩍 앞서가 있는 수준이라 해도 좋았다.

  학자들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르쿠스에게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했다.

  권력자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깐깐한 학자들의 특징이었으나, 마르쿠스는 일반적인 권력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그 유명한 포세이도니오스의 제자였지?"

  "예. 그분의 천문학 강의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아 저 역시 천문학의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포세이도니우스는 위대한 학자였지."

  약 10년 전쯤 세상을 떠난 포세이도니우스는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천문학부터 지리, 정치, 철학, 역사 등 모르는 분야가 없었으며 로마에서 대사를 맡은 적도 있었다.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마저 그의 강의를 들었을 정도로 명망 있는 학자였다.

  마르쿠스는 그런 포세이도니우스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샤한샤께서는 설마 반년 뒤에 열릴 토론회에서 천동설을 폐기하고 지동설을 주류로 인정하실 계획이십니까?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겁니다."

  "지금 자네들의 반응처럼?"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학자들은 다혈질인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마르쿠스 님에게 무례한 말을 내뱉을 이들이 나올지도······."

  "내가 거짓된 이론으로 사람들을 세뇌하려고 한다면 욕을 먹어도 싸지. 하지만 자네들은 분명 앞으로 내 이론을 세계 곳곳에 퍼트리고 다닐 지식의 전도사가 될 걸세. 히기누스, 기록을 부탁하지."

  "예, 예!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록으로 옮기겠습니다."

  마르쿠스의 명령을 받은 젊은 청년 한 명이 재빠르게 수첩을 펼쳤다.

  히기누스라고 불린 청년은 옥타비우스의 자유민으로 원 역사에서도 이름이 남은 유명한 작가였다.

  그가 남긴 책들 중 시적 천문학과 이야기 모음집은 현대에까지 전해져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취급을 받았다.

  이 재능 있는 젊은이는 천문학에도 소양이 있었는데 마르쿠스는 이 점을 주목해 그에게 책을 펴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마르쿠스와 포세이도니우스 학파의 대담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될 이 책은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될 예정이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어째서 천동설이 말이 되지 않는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없는지를 자네들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겠네. 혹시라도 반론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주게."

  천문학자들은 자신들의 전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샤한샤에게 가르침을 내릴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천문학자들의 얼굴은 점점 더 경악으로 얼룩졌다.

  마르쿠스의 식견이 그들의 예상을 훌쩍 넘어설 정도로 훌륭하고 빈틈이 없었던 까닭이다.

  특히 이 시대는 아직 프톨레마이오스가 태어나기 전이라 천동설의 약점이 보완되기 전이었다.

  이 덕분에 마르쿠스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천동설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원 모델에 의하면 금성의 움직임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지 않나. 그렇지?"

  "부, 분명히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구가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그보다 훨씬 더 큰 모순이 곳곳에서 발견되지 않습니까?"

  "그래? 난 딱히 그런 점을 모르겠는데 예를 좀 들어줄 수 있겠나."

  약점을 공격당한 것에 잔뜩 흥분한 학자들은 머릿속으로 외우고 있던 지동설의 문제점들을 줄줄 끄집어냈다.

  여유롭게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마르쿠스는 학자들의 말이 끝나자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끝인가?"

  < 286. 특이점이 온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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