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특이점이 온다 >
287.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로마와 그리스, 알렉산드리아에서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동방 속주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 축제를 앞두고 대대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 시대의 학자들은 보통 한 분야에만 특화된 이들이 아니었다.
아직 학문의 세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러 방면에서 중구난방으로 얽혀 있었기 떄문이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르키메데스도, 포세이도니오스도, 전부 한 방면이 아닌 여러 방면에서 이름을 떨친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천문학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을 불러모은 것은 곧 이 시대의 최고의 지식인들을 소집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거리 여행이 부담스러운 나이대의 학자들도 기대감을 안고 각자 걸음을 옮겼다.
이런 시대에서 각 지역의 최고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자리는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이런 흐름에 편승해 세미나의 주제를 여러 개로 확장했다.
행사 기간을 한달 정도로 늘리고, 천문학만이 아니라 수학, 지리학, 철학 쪽의 주제도 마련해 놓았다.
사실 각 지역의 학자들은 이번 자리를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낼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
고대 시대의 학문이란 과학적 영역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통일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스에서는 정설로 여겨지는 무언가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동설의 경우만 하더라도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는 데에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궤도의 계산이나 각도, 행성의 둘레에 관해서 모두의 의견이 중구난방이었다.
같은 지역에서는 토론이 활발했으니 어느 정도나마 합의점이 이뤄진 상태였으나 타지역과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었다.
그러니 각 지역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구한 내용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마르쿠스에게는 이런 과열된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다.
학계에서 관심이 쏠리면 쏠릴수록 그가 추진하고 있는 사안들이 자연스레 홍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공을 들이던 교육기관의 출범도 이제 막바지에 달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학이다.
이 기념비적인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소개하기에 이것보다 더 적합한 주제는 없으리라.
마르쿠스는 이번 행사를 통해 로마의 각 지역에 지식의 보급을 확산시킬 생각이었다.
이미 로마에는 내년에 대학이 들어설 예정이었고, 3년 안에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에도 비슷한 교육기관을 만들 예정이었다.
아직 외부에 대대적으로 정보를 공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소문은 이미 퍼진 상태였다.
당연히 이번 세미나에 참가하는 학자들도 여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다수의 학자들은 세미나가 개최되기 한참 전부터 마르코폴리스에 자리를 잡고 연구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테네에서 온 테오스토스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에우소스, 그게 이번에 자네가 가져온 자료들인가? 대부분 천문학에 관련된 자료로 보이는데?"
"그렇다네. 이번 토론회가 여러 가지 주제로 확장되긴 했어도 처음 발의된 주제는 결국 이쪽이 아닌가. 난 기본에 집중할 생각일세."
"하긴 자네는 로도스에서 줄곧 히파르코스 님의 자료를 연구하고 있었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들도 자네만큼 천문학에 정통하진 못할 거야."
"당연하지. 알렉산드리아는 자신들이 천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하던데 그게 얼마나 허황된 자신감이었는지 뼈저리게 알게 될 걸세."
히파르코스는 주전원과 이심원 이론을 가장 처음으로 주장했던 학자다.
완벽한 이론을 세운 건 아니었으나 고대 시대에서 이보다 더 천동설을 합리적으로 주장한 이는 없었다.
"그런데 소문으로는 이곳의 학자들은 갑자기 지동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더군. 이번 토론회에서도 지동설이 맞다고 우길 예정이라던데?"
"아리스타르코스의 그 폐기된 이론? 그런 허접한 이론을 주장한다고? 허허···마르쿠스 님이 계신 곳에서 어찌 그런 사이비 학문이······."
"소문으로는 그 마르쿠스 님이 지동설이 맞다고 학자들을 가르치셨다는군. 그래서 이곳의 천문학자들이 노선을 바꿔서 이번 토론회에서 지동설이 옳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설치는 것이고."
두 천문학자들이 조소를 흘리며 혀를 찼다.
"설마, 헛소문이겠지. 마르쿠스 님이라면 지혜가 올림포스에 닿은 살아있는 신의 화신이 아닌가. 그런 분께서 그런 바보 같은 주장을 하실 리가 없지. 내 생각엔 아마 이곳의 학자들이 주목을 받으려고 그분의 이름을 파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간 큰 짓을 하면 바로 목이 달아날 텐데?"
"자신이 떠벌리지만 않으면 그만 아닌가. 증거가 없으면 처벌을 받지 않을 테니까."
테오스토스는 친구의 추론이 꽤나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리스권에서 마르쿠스에 대한 인식은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지도자의 상이었다.
과거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지도자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그런 사람이 지구가 움직인다는 해괴한 주장을 할 거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이들은 위대한 포세이도니오스의 학풍을 이어받았다고 들었는데 어째 기대 이하로군. 그러면 이번 토론회는 아테네, 로도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대결이 되겠군."
"로마는 어떤가?"
"로마? 그자들이야 우리와 알렉산드리아가 연구한 걸 가져다 쓰기만 하는 이들 아닌가. 학문을 응용하는 건 잘해도 뭔가를 만들어내는 건 끔찍이도 못하는 자들일세. 주목할만한 가치가 없어."
"하긴 로마의 고관들은 대부분 알렉산드리아나 로도스로 유학을 가니까. 그쪽에서 무슨 대단한 성과를 들고 올 가능성은 없겠군. 그럼 역시 알렉산드리아쪽만 확실히 찍어누르면 되겠어."
세계 각지의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곳에서 자신의 이론을 설파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분되는 일이다.
아테네와 로도스의 학자들은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다시 한번 증명할 작정이었다.
최근 들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알렉산드리아에 학문의 요람 자리를 내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이 신경쓰는 지역은 알렉산드리아 밖에 없단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자신들보다 더 우월한 이론을 내놓는 자들이 있다면 그건 아테네나 로도스에서 온 이들일 것이다.
지동설 같은 해괴한 이론을 주장한다는 동방 속주의 학자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로마나 동방 속주의 학자들은 이를테면 자신들을 더 빛내주기 위한 조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서도 짐작하지 못했다.
마르쿠스의 일대 강의를 들은 동방 속주의 학자들 역시 정확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사실을.
※※※
"회장의 준비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지내는데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은 없었나?"
"학자들 중에 좀 깐깐한 이들이 많아 요구사항이 많긴 했지만 딱히 심한 불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곳의 선진적인 연구 환경을 구경하고 그냥 눌러앉으면 안되겠냐고 묻는 이들도 꽤 있더군요."
"안 되지. 그들은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교수를 맡아줘야 하는데."
연구에 일생을 건 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연구환경이다.
마르쿠스가 만들어 놓은 우월한 연구실을 견학한 학자들은 자신들이 있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경에 단숨에 매료됐다.
특히 연금술사들의 충격이 가장 컸다.
이미 연금술이 아니라 제대로 된 화학의 길을 걷고 있는 연구원들의 모습을 본 타지역의 연금술사들의 경악은 상상이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이곳에서 연구를 할 수 없겠냐고 간곡히 부탁을 하며 매달려올 정도였다.
그런 걸 결정할 권한이 없는 푸블리우스나 수레나스로서는 그저 곤란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마르쿠스 님, 그토록 공을 들이신 행사인데 직접 연단에 오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물론. 나는 자리를 빛내주는 역할로 참가만 하는 게 더 나아. 최고 권력자인 내가 직접 학자들을 계몽하는 것보다는 내 가르침을 받은 학자들이 그 역할을 맡는 게 그림상 좋아 보이잖아?"
"하긴 마르쿠스 님이 굳이 그들과 같은 자리에 올라가 주실 필요는 없겠죠. 지식을 전하는 건 마르쿠스 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정도로도 충분하다···확실히 그런 인상을 주는 게 더 나아 보입니다."
마르쿠스는 수레나스의 질문을 받아주면서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고 있던 수레나스의 시선이 서류에 찍혀 있는 인장에 고정됐다.
"로마에서 온 문서로군요. 혹시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별 문제는 아니야."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신중하게 검토하시는 듯 합니다만."
"어쩔 수 없지. 딸의 결혼에 관한 문제니까."
"겨, 결혼? 소피아 님이 혼례를 올릴 예정이십니까?"
방금까지 신경쓰고 있던 학자들에 관한 문제가 일순간 머릿속에서 싹 사라져버렸다.
기겁하는 수레나스의 반응에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시키긴 할거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그냥 소피아의 위치가 위치다 보니까 이 아이를 노리는 가문들이 제법 있을 것 같아서 조사를 부탁했던 참이거든."
"아···충분히 그럴 수 있죠. 따지고 보면 카이사르 님의 손녀이자 마르쿠스 님의 장녀인 거니까요. 게다가 지금 로마에서는 거의 살아있는 여신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니 비슷한 나이대의 아들을 둔 귀족가문들은 탐이 날 수밖에 없겠어요."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더군."
마르쿠스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을 수레나스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럴 가능성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소피아에게 들이대는 귀족은 아예 없는 수준이라고 하더군. 율리아의 말도 그렇고, 내가 따로 조사를 부탁한 조사원들도 모두 같은 보고를 올렸어."
"옥타비우스···아, 실례. 이제 옥타비아누스 님이시죠. 그분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요? 두 분께서는 꽤 가까우시니까요."
"옥타비아누스가 최근에 원로원에 들어오면서 귀족으로 승격되긴 했지만 걔 때문만은 아닐 거야. 오히려 쟤도 되는데 나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자들도 나올 수 있으니까."
카이사르의 유일한 상속자라는 배경이 확고했던 원 역사와는 다르다.
지금의 옥타비아누스는 어디까지나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친척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그 정도 배경만 하더라도 현 로마에서는 어지간한 명문 귀족 이상으로 고귀한 신분이라 여겨졌지만 말이다.
"그러면 이유가 뭘까요?"
"부담되는 거지. 나나 장인어른의 의중을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티를 내는 게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확신이 안 서니까."
"감히 넘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거로군요. 어떤 느낌인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서신을 도로 넘겨받은 마르쿠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까딱였다.
이번에 올라온 보고대로라면 결국 모든 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때가 무르익고 있으니 이제 슬슬 로마도 움직이기 시작해야겠지."
"한번쯤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내년에 대학이 들어설 예정이니 그걸 기념하기 위해 한번은 돌아가줘야지.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도 볼겸."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아, 잠깐. 아직 한 가지 더 남았어."
수레나스가 등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나서려 하자 마르쿠스가 그를 도로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작성하고 있던 문서를 보기 좋게 펼쳐서 수레나스에게 넘겨주었다.
"가는 길에 이걸 내 자문위원회에게 가져다줘. 새롭게 출범할 원로원 감사조직이니 한 번 검토해 보라고."
이전에 벌어졌던 무궁화 투기 파동이나 미수로 끝났던 주식 발행 사건은 아직도 그 사후처리가 다 끝나지 않았다.
피해는 복구가 됐지만 중요한 재발방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입법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단계였다.
비리를 저지른 기사계급을 제어할 법률은 다 완성 됐지만, 사실 뇌물을 챙긴 건 원로원 의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감시할 기구가 필요했다.
명분도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그때 처벌없이 그냥 넘어가라고 했던 건 이 조직을 만들기 위한 사전작업이었을 뿐이다.
대충 조직도를 훑어본 수레나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종래의 감찰관을 대체하는 조직이로군요."
"그래. 이전의 감찰관은 권한들을 세세하게 쪼개서 분산시킨 거야. 인구조사, 국유재산 관리, 징수, 원로원 의원들의 품행 관찰을 각각 조직의 다른 부서에서 처리하게 되는 거지."
"너무 밀접하게 몰려 있는 권한을 분산한다는 취지는 더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조직의 수장을 누가 맡느냐가 관건인데···아주 훌륭한 분을 내정하셨군요."
얼핏 보기에는 종래 감찰관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분산시켜 권력을 약화시킨 듯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부서 개별로 보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으나 조직을 총괄하는 감사원의 수장은 상당한 힘을 지니게 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의 수장을 맡게 될 젊은이의 이름은 누가봐도 의심할 여지 없는 마르쿠스의 사람, 옥타비아누스였다.
< 287. 특이점이 온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