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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특이점이 온다 (289/326)

  < 288. 특이점이 온다 >

  288.

  길었던 준비 시간을 마치고 드디어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성과를 부딪치는 날이 다가왔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생필품 가격에나 관심이 있지 이런 학술대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르쿠스가 이와 연계되는 대대적인 축제를 열었기 때문에 세간의 이목도 충분히 집중되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개최되는 학술대회인 만큼 진행방식은 전부 마르쿠스가 정했다.

  우선 처음에는 이 분야에서 중대한 업적을 이룬 각 지역의 대표격 학자들이 나와 자신들의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마르쿠스는 세간에 퍼진 소문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발표를 하지는 않고 뒤에서 학자들의 발표를 지켜보았다.

  그래도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이런 자리에 참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학자들은 한층 더 기합이 들어갔다.

  여기에서 마르쿠스의 관심을 끌면 앞으로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위대하신 샤한샤께서 이리 왕림해주시니 참으로 크나큰 영광이옵니다."

  "나는 그냥 구경하러 온 거니 마음에 두지 말고 편안하게 발표하게."

  마르쿠스는 연단과 청중석이 한꺼번에 보이는 특별석에 앉아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장의 분위기는 더없이 진지하고 긴장감이 넘쳤다.

  마르쿠스의 등장에 술렁였던 분위기도 잠시, 학자들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발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목을 끈 건 역시나 알렉산드리아와 로도스에서 온 학자들이 내놓은 최신 연구결과였다.

  히파르코스의 연구 결과를 다듬은 에우소스의 이론은 모든 천문학자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종래의 동심원 모형만으로는 태양과 행성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대표적인 게 불규칙한 행성의 공전 속도가 있죠."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으로는 행성의 역행을 절대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히파르코스는 주전원과 이심원이라는 모델을 만든 것이다.

  이 이론은 행성들이 단순히 지구 중심을 원형으로 공전하는 게 아니라 궤도의 중심이 지구의 주변을 감싼 원을 따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우소스는 이걸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커다란 종이에 엄청나게 복잡한 여러 개의 원형 궤도를 그려냈다.

  학자들은 처음에는 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으나 계산해 보니 지금까지 관측된 천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모순이 없었다.

  에우소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열정적으로 자신이 정리한 이론의 발표를 끝마쳤다.

  "···이상이 제가 구체화시켜서 정립한 히파르코스 님의 이론입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검토를 했지만 이 이상의 정확하게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학자들은 살짝 눈을 찌푸리긴 했어도 반박을 하진 않았다.

  "분하지만 위대한 업적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오히려 대다수는 저 이론이 상당히 그럴듯하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게 당연했다.

  주전원과 이심원 모델은 뉴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완벽히 폐기되지 않은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에우소스의 뒤를 이어 연단에 오른 이는 동방 속주 출신의 학자였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이가 지긋한 학자가 아닌 젊은 청년이 발표를 맡았다.

  마르쿠스 대담집의 출간을 맡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히기누스가 바로 이번 학술대회의 주인공이 될 예정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무슨 대단한 발표를 할 거라고 예상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연 그의 첫 마디에 모두의 관심이 단숨에 집중됐다.

  "저는 위대하신 샤한샤 마르쿠스 님에게서 이 우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는 불확실한 추론이 아닌 명확한 이론과 계산에 기반한 사실임을 확실히 밝히는 바입니다."

  "···샤한샤께서?"

  "조금 전 에우소스 님의 연구결과의 발표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희는 이 이론이 놀랍지 않았습니다.

  이미 포세이도니오스 님은 히파르코스 님의 연구결과를 알고 계셨고 저희들 역시 어느 정도는 그 연구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역시 그 사실이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이 세계의 근원을 엿보았다는 확실한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과는 달랐습니다. 여러분.

  "

  히기누스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마르쿠스 쪽을 힐끔 돌아본 뒤.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확실하게 선언했다.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습니다.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의 행성들이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말은 여기저기서 터진 야유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망령된 소리를 이런 자리에서까지 들어야 합니까?"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는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요? 움직이는 속도가 참으로 느린가 봅니다? 하하하!"

  "쯧쯧쯧, 요새 젊은이들은 금방 저렇게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니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조롱 섞인 반응에도 히기누스는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 나오리란 건 익히 예상했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들도 마르쿠스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딱 저런 식의 마음을 품지 않았던가.

  "에우소스 님은 주심원과 이심원의 개념으로 천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관측 기술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안으로만 밤하늘을 보고 있으니 당연히 한정된 모습밖에 볼 수 없죠."

  "그러면 눈으로 천체를 관측하지 뭘로 봅니까? 혹시 마음의 눈으로 보면 행성의 모습이 더 잘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요?"

  "와하하하!"

  청중석이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그래도 몇몇 학자들은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마르쿠스라는 사실을 깨닫고 솟구쳐 오른 조롱을 다시 억누르기도 했다.

  그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던 마르쿠스가 슬쩍 신호를 보내자 진행요원들이 커다란 원통형 물체를 가지고 왔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 물건에 집중되자 히기누스가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건 샤한샤께서 제작하신 물건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사물을 확대해서 먼 곳까지도 쉽게 볼 수 있게 만들어주지요. 저희들끼리는 유피테르의 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사물을 확대해서 보여준다고?"

  "예. 안타깝지만 이 물건은 군사기밀로 지정된 품목이기도 해서 제조법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여기서 체험해 보실 수는 있습니다."

  히기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자들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만약 저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건 정말 엄청난 발명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볼 수만 있다면 단순히 천문학에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군사, 항해, 의술 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분야는 차고 넘쳤다.

  히기누스는 지역별로 학자들을 두세 명씩 연단 위로 불러 망원경을 체험시켜 주었다.

  "허억!"

  "지, 진짜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하다니 이럴 수가······."

  망원경으로 저 멀리 쓰여있는 글씨를 본 학자들의 탄성 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망원경의 효능을 입증한 히기누스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종이를 펼쳐 쐐기를 박았다.

  "이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해 보면 금성의 위상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보름달이나 초승달의 형상을 띠게 됩니다. 초승달처럼 보일 때는 엄청나게 크게 보이며, 반면 보름달의 형상일 때는 굉장히 작게 관측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건 금성의 관측 모습을 그림으로 옮긴 것입니다."

  각도상 금성이 초승달처럼 보이려면 당연히 태양보다 가까이 있어야 하며, 보름달처럼 보이려면 태양보다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천동설의 주장처럼 금성이 태양의 안쪽으로 공전한다면 반달 이상의 위상을 가질 수는 없다.

  이건 각도상 명백하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면 다른 행성에는 위성이 없어야겠지요? 하지만 목성의 경우는 주변을 돌고 있는 다른 위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면 어떤 천체를 바라볼 때 시차가 생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르쿠스 님은 저 멀리 있는 행성을 주기적으로 관찰해 정확한 연주 시차 측정에 성공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마르쿠스가 한 게 아니라 역사에서 프리드리히 베셀이 관측한 결과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는 지구가 공전하고 있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였기 때문에 즉각 반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런데 지구가 정말로 공전하고 있다면 어째서 우리가 그걸 느낄 수 없는 겁니까? 그리고 여기서 물건을 떨어트리면 왜 물체가 뒤에 떨어지지 않고 수직으로 낙하하는 겁니까 지구가 정말로 돌고 있다면 제가 여기서 위로 뛰면 다른 곳에 착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천동설학자들이 지동설을 공격할 때 드는 대표적인 주장이었으나 이 역시 간단하게 논파되었다.

  "에우소스 님께서는 그리스에서 아시아로 건너오실 때 배를 타셨겠지요. 고속으로 움직이는 배 안에서 위로 뛰면 다른 곳으로 착지하던가요?"

  "아니, 그건······."

  "그리고 행성의 움직임은 완벽한 원형을 띠진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일그러진, 타원의 궤도로 움직이지요."

  히기누스는 초기 지동설이 공격받았던 한계점까지 보완해 상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르쿠스가 기를 쓰며 최대한 쉽게 정리하긴 했지만, 여러 이론들을 납득이 가게 설명하는 데에는 몇 시간 이상이 소모됐다.

  처음에는 온갖 반론이 쏟아져 나왔으나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점점 실내는 조용해졌다.

  이윽고 히기누스의 설명 외에는 어떤 잡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나고 난 뒤 모든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진리로 알고 있던 게 완전히 부정당한 천문학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특히 자신들의 수준에 자부심이 높던 로도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들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조금 전 들었던 이론의 허점을 조금이라도 파고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몇몇 사람들은 너무 고차원적으로 전개되는 이론들의 향연에 사고가 다 따라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묘한 허탈감도 있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평생을 걸쳐 이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 현실과 동떨어졌던 이야기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특별석에 앉아있는 마르쿠스에게로 향했다.

  히기누스라는 젊은이는 그저 마르쿠스에게 배운 지식을 여기서 설명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유피테르의 눈을 만들고, 이 모든 정교한 이론과 계산법을 만든 사람은 마르쿠스라는 뜻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들은 불현듯 연금술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살아있는 신, 아문-라이자 세라피스이자 현세에 다시 강림한 오시리스일세. 의심하지 말고 따르게. 그러면 세상의 진리를 알 수 있을 테니.'

  처음에는 그들이 뭔가에 단단히 씐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원래 학자들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마르쿠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미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었어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이제는 자연스레 납득하게 됐다.

  저런 새파랗게 젊은 젊은이조차 마르쿠스의 손길을 거치자 명망 있는 학자들의 입을 뻥끗도 못 하게 만들 정도가 되지 않았던가.

  '살아있는 신이라······.'

  단순히 대중들에게만 인정을 받는 게 아니라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공식적으로 선언을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무게감을 지닌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마르쿠스의 진정한 의도는 이로써 완벽하게 꽃을 피웠다.

  < 288. 특이점이 온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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