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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황가의 신들 (293/326)

  < 292. 황가의 신들 >

  292.

  어색하기 그지없는 공기 속에서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브루투스였다.

  그가 필리푸스의 옆으로 다가가 어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이 사람이 술이 좀 많이 들어갔나 보군. 일단 물 좀 마시고 이성을 찾게."

  "아니, 나는 별로······."

  필리푸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꼭 말을 해야 그 사람의 의도가 전해지는 건 아니다.

  눈빛과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그 사람의 현재 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필리푸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봐도 자넨 취했네. 일단 실례되는 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하게."

  "아니, 내가 무슨 실례되는 말을 했다는 말인가. 그 정도도 못 물어보나?"

  "아니, 이 사람이······."

  "솔직히 자네들도 다 궁금하지 않나? 대체 소피아 님을 데려갈 남자가 누구일지.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자격은 무엇인지."

  물론 필리푸스도 현재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 최상위 귀족층에서 정략결혼을 위한 이혼과 재혼은 제법 흔한 편이었다.

  만약 소피아와 결혼할 수 있다면 원로원 의원의 상당수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현재 아내와 이혼을 택할 것이다.

  그게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말을 대놓고 한다는 것 자체가 필리푸스가 술기운이 거하게 올라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브루투스가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두 사람이 화를 낼 거라고 여겼다.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더라도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기엔 충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필리푸스와 절친한 정도까지는 아닌 다른 귀빈들은 그저 지금 상황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키케로 역시 다른 의미로 옥타비아누스의 대처를 관찰하려는 의도에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포도주만 홀짝이는 중이었다.

  결국 애가 타는 사람은 브루투스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합법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존재였고, 소피아는 카이사르의 손녀이자 마르쿠스의 딸이다.

  그녀가 이걸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면 멀리 있는 마르쿠스가 나서지 않더라도 손녀 사랑이 각별한 카이사르가 어떻게 하겠는가.

  굳이 카이사르가 하지 않더라도 소피아는 이미 자신 소유로 막대한 재산과 사업권을 가진 이였다.

  그는 솔직히 필리푸스가 이런 걸 다 이해하고 들이대고 있는 건지부터 의문이었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 설마 결혼하면 자신이 가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로마에는 이미 상속권과 재산권을 인정받은 소수의 여인들이 존재했다.

  가장 좋은 예가 은퇴한 베스타 신녀들이었다.

  그들과 결혼하는 건 로마 귀족의 최고 영예 중 하나라 많은 이들이 구애를 하기도 했으나, 생각만큼 모든 게 잘 풀리는 건 아니었다.

  콧대 높은 최고 귀족 가문들의 여식을 남편이 통제하기 힘들어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베스타 신녀들은 워낙 사회적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고 권한도 확실히 가지고 있었기에 남편에게 많은 제약이 걸렸다.

  은퇴했다고는 해도 베스타 신녀였던 이를 제대로 예우하지 못한다면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거기에 아내가 가장에게 종속되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남편의 마음대로 대소사를 처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대로 모든 걸 하기 원하는 이는 이런 결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베스타 수녀 중에도 남편에게 간섭받는 것 자체를 싫어해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 많았다.

  베스타 신녀들이 이럴진대 살아있는 여신의 화신으로 대우받는 이는 어떻겠는가.

  브루투스는 필리푸스의 모자란 판단력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몇 마디 더 하려는 필리푸스를 억지로 앉히고 자신이 대신 사과를 올렸다.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 사람도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술을 조금 많이 마셔서 그랬을 뿐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마음에 둘 말씀 따위는 전혀 하지 않으셨답니다. 저 정도야 술자리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수위의 말이죠."

  소피아가 잔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티끌만큼의 언짢음도 보이지 않았다.

  브루투스가 시선을 돌려 옥타비우스 쪽을 바라보았다.

  얇은 미소를 얼굴에 두른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입니다. 경사스러운 자리를 이런 일로 망쳐서는 안 되니까요."

  "그럼 이제 칙칙한 주제는 던져버리고 다른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브루투스의 필사적인 수습 덕분에 연회는 다시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왔다.

  귀빈들은 외국의 정세나 로마에 새롭게 올라가고 있는 시설들, 그리고 새로 시작될 공공사업 등에 관한 주제로 의견을 나누었다.

  필리푸스가 중간에 술기운으로 잠이 들자 옥타비아누스는 하인들에게 명령해 그를 정중히 집까지 데려다주라 일렀다.

  필리푸스가 자리에서 사라지자 키케로는 그를 나무라지 않은 옥타비아누스의 어른스러운 태도를 칭찬했다.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분에게 뭐라고 할 만한 이유도 없었지요."

  옥타비아누스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귀빈들은 안심하고 마지막까지 연회를 즐겼다.

  성황리에 모든 절차가 끝나고 손님들이 전부 돌아가자 귀빈석에는 옥타비아누스와 소피아만이 남았다.

  소피아는 손님들이 나가자마자 급격하게 차가워진 옥타비아누스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화났네, 화났어."

  "화가 난 건 아닙니다. 아주 조금 불쾌했을 뿐이죠."

  "왜,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경쟁자가 짜증 나서?"

  "경쟁조차 되지 않는 걸 아니 그런 마음이 들진 않는군요. 그냥 저렇게 멍청한 귀족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올 뿐입니다. 저렇게 지성이 부족한 사람도 원로원 의원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면 로마의 품격에도 해가 될 테니까요."

  소피아의 입가에 걸린 웃음기가 한층 깊어졌다.

  "빙빙 돌려 말하긴 해도 결국 짜증났다는 말이잖아."

  "솔직히 말해보세요. 소피아 님도 불쾌하지 않으셨습니까. 필리푸스 그자가 아주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것 같았는데요."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보다는 가소롭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웃음이 나오던데? 그리고 네 반응을 살피는 것도 꽤 재미있었고."

  "저는 완벽하게 표정관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니까 오히려 네 속마음을 대강 짐작할 수 있지. 우리가 몇 년이나 같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완벽히 차단했단 것 자체가 역으로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는 증거다.그런 괴이한 논리를 듣는 옥타비아누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헛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걸렸다.

  "그럼 이제 제가 뭘 할지도 잘 아시겠군요."

  "불쌍한 필리푸스. 로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을 자극했으니 동정을 금할 길이 없네. 본보기로 처리할 거야?"

  "아니요. 제가 직접 나서는 건 역시 원로원에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겠죠. 감찰 권한을 무기로 휘두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자마자 명문 귀족 한 명을 골로 보내버리면 말과 행동이 다른 놈이라는 인상을 풍기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리고 덤으로 쪼잔해 보이기도 해. 네가 조금이라도 연관되었다는 느낌을 풍기면 부정적인 효과만 날 거야."

  옥타비아누스는 잠시 눈을 감고 뜻 모를 표정으로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다시 눈을 뜬 그가 더없이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전부터 처리하려고 했던 문제를 이참에 전부 엮어보기로 하죠. 고맙게도 필리푸스가 좋은 실험대상이 되어주겠네요."

  ※※※

  옥타비아누스가 감찰권을 틀어쥔 지 수 개월이 지나도록 원로원에는 아무런 위기도 닥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의원들이 비리 행위로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 없음이라는 결과만 나왔을 뿐이다.

  귀족들은 옥타비아누스가 틀림없는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차에 한 가지 문제가 터졌다.

  늘 그렇듯이 로마에 터진 사회 문제는 유명 가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주인공은 필리푸스였다.

  야심만만한 젊은 명문가의 수장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갈리아인들을 학대했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옥타비아누스는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갈리아의 대표격인 베르킨게토릭스가 원로원에서 대놓고 필리푸스를 성토한 까닭이다.

  필리푸스는 당연히 원로원이 로마의 유력가인 자신을 지지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의 오른팔 격인 베르킨게토릭스를 일방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재는 권력의 실권자인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지금 어마어마한 속도로 개발되고 있는 갈리아 지역에 자신의 인상을 좋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갈리아는 토지가 개간되면 개간될수록 로마인들이 군침을 흘릴 정도로 비옥한 토양을 지니고 있다는 게 확인됐다.

  마르쿠스가 라티푼디움을 제한했기 때문에 노예를 이용한 광작은 할 수 없었지만, 굳이 라티푼디움에 집착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로마의 상인들과 귀족들에게 갈리아는 앞으로 몇 년만 있으면 황금알을 낳아줄 거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필리푸스를 희생양 삼아서 자신의 주가를 올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는 판단이 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필리푸스에만 국한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문제는 이상하게 점점 규모가 커졌다.

  필리푸스의 누이는 아이밀리우스 섹스티우스의 남편이었는데 뜬금없이 그가 저지른 문제까지 도마위에 올랐다.

  그는 마르쿠스가 원로원에게 허용한 일부 속주의 총독직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 자신의 조각상을 세운 것이다.

  딴에는 동방에서 마르쿠스의 조각상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자신도 따라한 것인데 이는 로마에서는 심각한 범죄로 여겨졌다.

  로마인의 조각상은 실제 사람 크기를 넘어서면 안 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예외는 오직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에게만 적용되었다.

  아이밀리우스는 즉각 재판에 회부되었고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불명예스러운 판결을 받았다.

  필리푸스 역시 같은 처벌을 받고 원로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아무래도 원로원이 총독들을 임명할 때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듯 합니다."

  담담하게 조사 보고서를 읊는 옥타비아누스의 말에 그 누구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로마의 속주에 조사원들을 파견해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지금에서야 결과가 돌아왔는데 예상보다 꽤나 심각하군요. 특히 집정관들이 부임한 속주에서 불만사항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는 이들은 전직 법무관과 전직 집정관들이었는데 전직 집정관은 그 이상 더 오를 자리가 없다.

  반면 법무관들은 이후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커다란 흠결을 남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집정관과 법무관이 맡는 속주를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속주의 총독들은 정기적으로 감사를 받는 법안을 만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참고로 카이사르 님과 마르쿠스 님의 담당 속주에서는 이런 류의 불만이 극히 적었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거의 열 배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 상황입니다."

  옥타비아누스의 말은 단호했으며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실히 풍겨 나왔다.

  평소에는 온건하기 그지없었던 이가 이토록 단호하게 나갈 때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느낌을 풍기기 마련이다.

  카이사르는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더니 이내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을 수락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원로원 속주의 총독은 임기가 중간쯤 지났을 때와 마무리했을 때 원로원의 이름으로 감사를 받는 것으로 결정됐다.

  물론 명목상 원로원의 이름일 뿐이지 사실상 감사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옥타비아누스였기 때문에 그들의 통제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통계가 눈앞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반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원 역사에서 그랬듯, 명문 귀족들이 알짜배기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할 수 없도록 규제한 법안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안을 카이사르의 지지자들을 이용해 통과시켜 버렸다.

  원로원에 일정 부분 돌려주었던 권력을 다시 자신들 쪽으로 가져온 것이다.

  결국 로마의 전 속주는 다시금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통제를 받는 쪽으로 재편됐다.

  이번에는 흉노전쟁이 끝났을 무렵처럼 임시적인 조치가 아닌, 영구적인 권력의 이동이었다.

  < 292. 황가의 신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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