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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황가의 신들 (294/326)

  < 293. 황가의 신들 >

  293.

  마르쿠스는 가마에 탄 채로 대로를 따라 나아갔다.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가마를 타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했지만, 이동할 때도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이동하면서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긴 쉽지 않았으니 가마에 탔을 때 읽는 건 주로 사적인 편지들과 가벼운 주제들이 대다수였다.

  "로마에서 온 것들은 이제 한번씩 다 본 것 같군."

  "원로원에서 온 공문도 끼워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꽤 중요한 내용 같이 보였는데요."

  "별거 아니야. 저번에 원로원 직할 속주로 돌려줬던 지역의 총독들을 다시 나보고 감시하라는 내용이었어. 그리고 부정을 저지를만한 요인이 많은 지역은 명문가 출신이 아닌 평민 귀족들을 우선해서 보낸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고."

  가마의 옆을 걷고 있던 스파르타쿠스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엄청나게 중요한 안건 아닙니까?"

  "이미 옛날부터 이렇게 하려고 말을 맞춰놨었어. 권력의 집중화란 측면에서 보자면 좋은 일이지만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단 말이지."

  마르쿠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활기가 넘친다는 표현이 딱 적절한 풍경이었다.

  마르쿠스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지나갈 때마다 시민들이 선물을 바치려서 해서 그러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어떻게 해서든 감사를 전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이들이 꽃으로 만들어온 면류관을 한 번 받아줬더니 다음에는 수백개나 되는 화관이 날아든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백성들에게 호감을 받고 있다는 의미였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마르코폴리스는 이제 확실히 도시다운 도시로 완성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식량의 수급량도 문제 없었고, 온갖 군데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이 도시를 거쳐가며 돈을 뿌렸다.

  도시를 순회할 때마다 빈 구역이 채워지고, 사람들이 불어나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뿌듯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다양한 인종들이 눈에 띄는군.'

  마르코 폴리스에는 사방에서 이주해온 사람이들이 많았던만큼, 구성도 각양각색이었다.

  근처에서 살던 현지인들이 제일 많긴 했어도 그 비율은 일정 수준을 넘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직접 만든 동방 속주의 중심 도시인만큼 이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로마인들은 차고 넘쳤다.

  당장 안티오키아에 있던 현지 귀족들도 이제는 대부분 이주를 끝마쳤다.

  북쪽에서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인들은 물론이고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상인들까지 이곳에 와서 정착하려고 했다.

  남쪽에서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고 이집트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원주민들까지 눈에 띄었다.

  부여에서 왔었던 해대성이 이 도시의 구성원들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워 했던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앞으로 이런 국제도시로서의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면 뚜렷해지지 약해지진 않을 것이다.

  먼 미래에는 동아시아의 사람들도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민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도시라···나쁘진 않지.'

  사방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끌어모을 수만 있다면 발전을 위한 최고의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어쩌면 로마가 원 역사에서의 미국 같은 케이스로 발전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가 되는 토대를 잘 올려둘 필요가 있다.

  어떻게 봐도 새로운 로마의 틀을 만들어 가고 있는 마르쿠스가 짊어져야 할 책무였다.

  "스파르타쿠스, 이 도시를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지? 솔직한 감상을 들어보고 싶은데."

  "어떤 생각이 드냐는 질문은 너무 추상적이군요."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마. 이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처음 봤을 때  세상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신기하다.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수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세상의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다고 자부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스파르타쿠스의 눈은 저 먼 남아프리카에서 올라왔다는 피부가 새까만 꼬마 아이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아이들이 신기한가?"

  "피부가 밤처럼 새까만 사람들이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쿠시 왕국과 전쟁할 때 참가했었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었고요. 기억을 잘 되짚어 보면 몇 번 스쳐지나갔던 적도 있긴 한 것 같은데 이렇게 가까이서 많은 사람들을 보면 느낌이 또 색다를 수밖에요."

  "쿠시 왕국은 흑인 파라오들도 있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아마 그쪽 지역에서 쭉 살던 사람들에겐 우리 용모가 신기하게 보일 거야."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긴 처음에 한나라 사람들을 봤을 때 그들도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사는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모습이 이토록 다른 걸까요? 브리타니아쪽 사람들은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지닌 이들이 있는 반면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와 반대로 새까만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니······."

  스파르타쿠스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로마인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신기하다는 마음만 있다면 좋겠지만 자칫하면 이게 차별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빠질 수도 있다.

  자신들과는 아예 다른 존재라고 구분을 지어 버리니 양심의 가책 없이 노예로 부리며 학대하기도 좋은 것이다.

  사실 수많은 문화권의 사람들이 몰려 있으면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마르쿠스에게도 사소한 문제로 충돌이 제법 자주 일어난다는 보고도 올라와 있었다.

  "스파르타쿠스, 너는 어떻지? 너와는 완전히 다른 인종의 사람이 부하나 상사, 동료가 된다면 잘 지낼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우인데 그깟 외양의 차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렇군. 군인들의 사고방식이 이런 점에서는 더 열려 있는 건가."

  원 역사에서의 다인종 국가인 미국도 사실 20세기까지도 극심한 인종차별이 판을 쳤다.

  하지만 군에서 공을 세운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나 흑인은 그나마 조금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현재 로마는 오히려 저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직 차별적인 제도와 문화가 완전히 고착화되기도 전의 시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인종간의 화합을 이루는 게 국가의 경쟁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겠지. 인종 간의 갈등이 심해진다면 결국 분열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이 문명끼리 접촉하며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중세 이후가 아닌 고대 시기인 게 오히려 다행이다.

  여기서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에 따라 로마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가 국가의 방침을 확실히 정해둔다면 이후의 지배자들도 쉽사리 그걸 어길 수 없을 것이다.

  "스파르타쿠스, 당연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내가 다스리는 시민들이 가장 소중하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제 부하들이 가장 우선이지요."

  "그래. 그러니 내 지배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아낌없는 자비와 번영을 선물해 주는 게 맞지 않겠느냐. 그들도 이제 로마에 속한 이들이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피부의 색이 어떻든 출신지가 어디이든 그런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최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건 로마의 시민권이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트라키아의 검투 노예 출신인 제가 이런 자리까지 올라올 수도 없었겠지요."

  로마의 현 요직에는 속주 출신의 능력있는 인물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특히 수도 로마가 아닌 동방속주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당장 마르쿠스의 양날개라 불리는 스파르타쿠스와 수레나스만 하더라도 모두 로마 토박이가 아니었다.

  한쪽은 트라키아에서 잡혀온 노예 출신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멸망한 파르티아의 귀족이다.

  마르코폴리스에 수많은 인종들이 몰려드는 건 바로 저 둘의 존재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들도 능력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의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 이전의 삶이 더 나았다는 생각 따위는 절대 할 수 없도록. 영원히 로마인으로 불리고 싶은 그런 세계를 선물해 주는 게 이 나라의 지배자인 내게 부여된 의무가 아닐까?"

  "참으로 고결한 생각입니다."

  "갈리아든 게르마니아든 브리타니아든 아라비아든 상관없다. 로마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며 모두가 통합 되어야지."

  "마르쿠스님이라면 충분히 그런 나라를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제 존재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역사에 이렇게 실릴 것이다.

  마르쿠스와 로마야말로 세상의 다양한 인종이 평화롭게 묶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좋은 예시라고.

  '그렇게 되면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비극들도 상당수는 줄어들겠지.'

  물론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로마가 주변국들을 수탈하는 행위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기나긴 역사의 흐름에서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에 가깝다.

  마르쿠스가 진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그런 걸 막을 수도 없고 막을 마음도 없었다.

  그저 로마의 내부에서 스스로 국력을 깎아먹는 아둔한 행위가 벌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로마의 힘은 세계의 그 어떤 나라들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당분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천지차이로 벌어지기만 할 게 뻔하다.

  앞으로 수십년 정도만 지나도 얼마나 차이가 벌어질지 마르쿠스조차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만약 이런 로마가 망한다면 그 이유는 내분 외에는 없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원 역사에서도 로마는 수많은 내전으로 국력을 스스로 탕진한 바 있었다.

  지금의 로마와 그때의 로마는 완전히 다른 국가로 변모하고 있었으나 그게 내전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보장해주진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문화권이 섞여들고 있는 만큼 내분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가정하고 대비를 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당분간은 황가의 위신을 확실히 세워둘 필요가 있겠지.'

  절대적인 존재가 세운 방침이라면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래도 군말없이 따라주는 경향이 강하다.

  그게 일반적인 행동원리로 자리잡을 때까지만 지속되면 된다.

  '하지마 역시 인식을 바꾸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단 말이야.'

  마르쿠스의 머릿속을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 불현 듯 스쳐지나갔다.

  누가 율리우스-리키니우스 가문의 여인과 맺어질지 궁금해하는 분위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데려간다고 인식하는 건 곤란했다.

  여인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었다.

  황가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반려를 선택하는 것이고, 이는 엄청난 영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소한 부문 하나하나도 소홀히 지나칠 수는 없다.

  다행히도 옥타비아누스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지 자신이 생각해둔 바를 서신 말미에 적어 보냈다.

  그쪽 일은 그쪽에 맡겨두었다고 판단한 마르쿠스는 조금 더 다른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다.

  바로 호칭의 문제다.

  지금 동방의 사람들은 그를 왕중왕으로 여기며 샤한샤라 칭했지만, 로마의 지배자를 뜻하는 명칭으로 이건 충분치 않았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를 칭하는 말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그 국가의 자존심과 사상, 그리고 영향력을 한 번에 보여줄 수 있는 중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시킬 일이 한 가지 늘었군.'

  가마 위에서 종이를 펼치고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마르쿠스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이집트의 파라오나 페르시아의 샤한샤, 중국의 천자를 상회하는 로마만의 칭호를 공표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 293. 황가의 신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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