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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황가의 신들 (295/326)

  < 294. 황가의 신들 >

  294.

  로마는 예전에 비유적으로 표현했듯 대리석부터 벽돌까지 완전히 갈아엎는 대변혁을 마주했다.

  그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한층 더 커다란 발걸음을 떼기 위해 한창 준비 중이었다.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온 마르쿠스의 눈에 비친 로마는 이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고대의 도시가 해가 다르게 이렇게 발전하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마르코폴리스처럼 막 생겨난 신도시가 아니라 이미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도시라면 더욱 그러하다.

  '장인어른이 있어 줘서 다행이야. 아니었다면 내가 계속 로마에 눌러앉아 있었어야 할 테니.'

  만약 마르쿠스가 로마에 계속 머물렀다면 동방 속주는 지금처럼 번영을 누리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독재 군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훨씬 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터.

  신뢰할 만한 능력을 지닌 동업자의 존재는 이런 점에서 축복이라 할 수 있었다.

  마르쿠스는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원로원에 출석해 새로운 사업으로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는 국고를 다시 채워 넣겠다고 선언했다.

  아직 돈을 끌어올 만한 구석은 많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보물창고에 잠들어 있던 막대한 황금의 일부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마르쿠스와 자신들의 핏줄이 이집트에서 쭉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황금반출을 수락했다.

  먼 미래에 이집트가 로마의 일부로 편입된다고 해도 프톨레마이오스의 핏줄들은 총독으로나마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르쿠스의 정식 후계자가 그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되겠지만.

  어쨌든 엄청난 액수의 황금이 로마로 들어오자 도시의 대개조에는 다시 속도가 붙었다.

  신전들은 한층 더 호화롭게 재건축됐으며 공공 시설들과 경기장, 시장들도 전부 새단장을 마쳤다.

  그리고 학문의 요람인 대학이 드디어 학생들을 받아 역사에 남을 첫 학기를 시작하게 됐다.

  원로원은 마르쿠스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끼리 투표를 해서 온갖 칭호를 내어주었다.

  여기에는 키케로까지 적극적으로 찬성했는데 마르쿠스는 그중 절반에 가까운 훈장을 받지 않았다.

  특히 원로원에서 집요할 정도로 요구하는 지도자를 뜻하는 '둑스'라는 호칭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미 누가 봐도 로마의 최고 지배자는 그였으나 자신이 그걸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직까지는 때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이미 원로원이 뭐라고 하든 마르쿠스는 자신의 마음대로 통치를 계속할 수 있었다.

  자신은 군사와 국고에 대한 통제권이 있었으며 집정관으로서의 권한과 호민관의 신성불가침권까지 지녔다.

  게다가 이것들을 세습해줄 수도 있으니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지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나이가 지긋한 의원들은 몰라도 일반 시민들과 젊은 귀족들은 확실히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굳이 서두르지 않는 이유도 이런 요인 때문이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에 목매는 의원들은 이미 오늘내일하는 지긋한 노인들밖엔 남지 않았다.

  가장 젊은 축이라고 해봐야 카토 정도인데 그는 이미 아무런 인망도, 실권도 없는 상태였다.

  브루투스는 먼 미래에 진정한 공화정으로 권력이 이양되기 위한 토대를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으니 카토에게 찬동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이 흐름에 완벽히 쐐기를 박아넣는 것뿐이다.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논하기 위한 자리를 가졌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마이케나스가 넓은 상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앉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로군."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카이사르가 과일을 입에 가져가며 운을 뗐다.

  최근 들어 더욱 머리가 벗겨진 그는 이제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가발의 힘을 빌리는 중이었다.

  같은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라도 탈모는 어쩔 수 없다며 소소한 위로를 받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장인어른께서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꼭 그렇지도 않네. 요새는 확실히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걸 느끼는 중이라. 저번 달의 나와 이번 달의 내가 확 달라진 느낌이라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지."

  "그래도 연세에 비해 굉장히 건강하신 겁니다. 누가 장인어른을 육십이 다 되어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겠습니까."

  "···머리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자조 섞인 카이사르의 농담에 아직까지는 머리가 풍성한 마르쿠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옥타비아누스, 마이케나스. 두 사람은 잘 지내고 있나? 아무래도 내가 소개시켜 준 사이이니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마르쿠스가 어색하게 화제를 돌리자 옥타비아누스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마이케나스는 아주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술가들을 이용할 일이 있을 때는 그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가 없지요."

  마이케나스가 황송하다는 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옥타비아누스 님의 깊은 심계에 언제나 감탄을 하며 보람 있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주군을 모실 수 있게 소개해주신 마르쿠스 님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둘이 마음이 맞는다니 다행일세.

  이번에 자네들이 한 일도 아주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어. 덕분에 앞으로의 작업이 한층 더 수월해졌네. 훌륭했네, 옥타비아누스.

  "

  "저를 위한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죠."

  옥타비아누스의 대답에 마르쿠스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마르쿠스에게 필요했던 건 자신의 자식들이 훗날 자신에 준할 정도의 위신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인 트라야누스는 별다른 야망도, 자질도 없다는 문제가 있었고, 소피아는 자질이 있어도 여자라는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중이었고 다행히도 조금씩 성과가 나오는 중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계획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인물이었으며 지금까지 실수 없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이번 일은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으니 모든 능력을 다 끌어 쓰는 게 당연한 일이긴 했다.

  "자네들은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지금처럼 꾸준히 정진해주게. 그럼 서론은 이쯤 하기로 하고."

  마르쿠스는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천천히 이 자리를 연 본래의 목적을 꺼내 놓았다.

  "장인어른, 저와 장인어른껜 슬슬 다른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되도록 겹치지 않는 이름이 좋겠지요."

  "그래. 자네가 왕이자 지도자라는 호칭을 썩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네."

  "장인어른께서도 원로원에서 렉스라고 부르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거야 득보다는 실이 훨씬 많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듯한 이름을 새로 만들면 저런 무의미한 논쟁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도 있겠군."

  카이사르의 시선이 웅장한 유피테르 조각상에 잠깐 머물렀다.

  "어떤 이름을 쓰는 게 좋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계속 쓰였으면 좋겠네."

  "그건 저도 동감합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이미 지도자를 상징하는 고유명사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둑스라는 말을 쓰는 것보다는 그냥 카이사르라고 퉁 쳐버리는 게 훨씬 더 위엄도 살고 거부감도 들지 않겠죠."

  "그러면 뭐가 좋을까··· 자네는 생각해둔 바가 있나?"

  "예. 저는 이미 어떤 이름을 쓸지 결정해뒀습니다."

  "어차피 내가 물러나게 되면 자네가 내 이름을 다 물려받게 될 테니······."

  카이사르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사이 옥타비아누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이사르 로물루스라는 이름은 어떻습니까?"

  "그건 안 돼. 로물루스는 이름에서 너무 대놓고 왕을 연상시키니까."

  마르쿠스의 즉답에 옥타비아누스도 납득하고 의견을 철회했다.

  "왕을 연상시키는 이름은 안 된다면 기존에 존재하는 이름을 가져와 쓰는 게 나을 겁니다. 왕이란 칭호를 쓰는 게 아니라 그 칭호가 왕을 의미하는 걸로 바뀌게 하면 되는 거죠. 언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의미가 바뀌는 법이니까요."

  "그게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러면 그냥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지위를 뒤에 따라붙이는 걸로 하죠. 카이사르 님은 로마의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전쟁영웅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군을 통솔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이 호칭은 지금도 종종 쓰이고 있는 말인데."

  카이사르가 눈을 깜박였다.

  "지금도 쓰이고 있으니 더 좋은 겁니다. 아무도 여기서 무슨 의도를 읽어낼 수 없을 테니까요. 어차피 지금 로마에서 임페라토르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은 카이사르 님과 마르쿠스 님뿐입니다. 군권을 가지고 있는 분이 두 분밖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마르쿠스님은 임페라토르라고는 거의 불리지 않죠."

  "로마에서는 그냥 위대한 메소포타미쿠스라고 부르니까."

  "그리고 동방에서는 샤한샤라고 부르니 굳이 임페라토르라고 칭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실 이 이름은 지금 카이사르 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괜찮은 것 같군요."

  마르쿠스도 이번엔 옥타비아누스의 의견에 찬성의 뜻을 밝혔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임페리움 마이우스는 현직 집정관들의 임페리움보다 더 상급의 지휘권이었다.

  지금 집정관들이나 총독은 군대를 이끌 때 한시적으로 임페리움을 부여받지만, 카이사르나 마르쿠스가 원한다면 그 임페리움을 자신들의 권한으로 덮어쓸 수 있었다.

  이건 로마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치를 권리도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에게 집중된다는 뜻이었다.

  개선식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은 임페리움을 가진 지휘관인데 이 임페리움이 두 사람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잠시 머릿속으로 손익을 따져보던 카이사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군. 굳이 내 입으로 거창하게 드러내지 않더라도 앞으로 모든 공문서에 내 이름의 뒤에 임페라토르라는 서명을 덧붙이도록 하지."

  임페라토르는 그 이름에 서린 위용만으로도 로마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권위적인 이름이긴 했어도 로물루스에 비교하면 훨씬 더 나았다.

  "마르쿠스 님은 어떤 이름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카이사르 님처럼 코그노멘을 그대로 가져가실 건가요?"

  로마식 이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를 트리아 노미나, 삼명법이라 칭한다.

  가장 첫 번째의 이름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 프라이노멘이며 두 번째는 씨족을 구분하는 노멘, 그리고 마지막이 가문의 성을 의미하는 코그노멘이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로 치자면 마르쿠스가 프라이노멘이고 크라수스는 코그노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처럼 자신의 코그노멘을 쭉 사용할 마음은 별로 없었다.

  "크라수스라는 이름은 나보다는 아버지가 더 연상되잖아. 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확실히 구별 짓기 위해서 프라이노멘을 더 많이 사용했으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면 따로 생각해두신 이름이 있으신가요? 원로원에서 부여한 프린캡스라는 칭호를 코그노멘으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로마 시민들 중에서도 첫 번째라는 건 확실히 괜찮은 칭호긴 하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까지 누구도 사용한 적이 없는 이름을 코그노멘으로 붙이고 싶어서 말이야. 장인어른에게 했던 말과는 조금 모순되지만."

  처음부터 로마의 최고 자리를 뜻하는 이름은 이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아주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이상 적합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꽁꽁 숨기지만 마시고 좀 알려주시죠."

  "그래. 나도 슬슬 궁금해지는군."

  일부러 극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마르쿠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코그노멘으로 삼았던 적이 없는 이름이지. 가장 존엄한 자, 위대한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 아우구스투스라고 하기로 했네."

  < 294. 황가의 신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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