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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황가의 신들 (296/326)

  < 295. 황가의 신들 >

  295.

  "아우구스투스라······."

  카이사르는 천천히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을 음미해보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 앞으로 로마를 이끌어나갈 지도자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로군."

  "앞으로 이 이름이 새로운 로마를 대표하게 되겠군요. 이의 없습니다."

  옥타비아누스도 동의했다.

  마이케나스도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사용된 적이 없으니 직접적으로 왕을 연상시키지도 않으면서, 영예로움과 고귀함을 한껏 담아내는 이름이다.

  옥타비아누스와 마이케나스는 원로원을 동원해 마르쿠스에게 새로운 칭호를 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마는 위대한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에게 말로 다 표현 못할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눈을 돌려서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쟁쟁한 의원님들 사이에서는 저야 아직 어리다는 말을 피할 수 없는 신참자에 불과할 뿐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지금의 로마는 제가 어렸을 때의 로마와는 다릅니다. 물론 로마는 지금까지 숱한 전쟁 영웅들을 배출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순히 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위대한 메소포타미쿠스가 넓힌 영토만 하더라도 역대 그 어느 로마의 영웅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를 전부 병합한 카이사르 님만이 유일하게 비견될 수 있을 겁니다.

  "

  의석 곳곳에서 동의한다는 말이 짧게 솟아났다.

  옥타비아누스는 의원들의 면면을 한번씩 둘러본 뒤 일부러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르쿠스 님께서 가져온 변화는 위대한 전쟁의 승리만이 아니었습니다. 농업에서 일으킨 혁명 하나만으로도 로마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의원님들의 최고 고민거리가 바로 밀의 배분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빈민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밀 때문에 언제나 갑론을박이 오고 갔다고 하죠. 하지만 최근에 이 사안이 문제가 됐던 적이 있습니까? 몰락했던 자영농의 상당수가 다시 자리를 찾았고, 빈민들의 구제 사업은 지금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밀의 수급량도 종래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식량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

  옥타비아누스는 이 외에도 마르쿠스가 지금까지 이루었던 업적들을 쭉 열거했다.

  농업만이 아니라 상업, 학문, 과학, 세재개혁,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설명이 이어졌다.

  어찌나 항목들이 많았던지 옥타비아누스의 설명은 거의 한 시간이 되어가도록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게 결코 끝이 아니란 겁니다. 앞으로도 로마는 마르쿠스 님의 인도 아래에 더욱더 많은 발전을 이룰 것이고 세계의 중심으로서 우뚝 서게 될 겁니다.

  그분께서는 이전에 슬슬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신 바 있지만 우리 원로원에서 그걸 만류했습니다. 참으로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저는 앞으로도 마르쿠스 님께서 원로원의 수장으로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다 같은 의견일 거라 확신합니다.

  "

  "당연합니다!"

  "옳소, 옳소!"

  사방에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래서 저는 고민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인도자에게 원로원이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았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경의를 가득 담은 이름을 선물해 드리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써왔던 이름으로는 안 됩니다. 로마 역사상 그 누구도 사용한 적이 없는 이름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르쿠스 님은 이미 렉스나 둑스 같은 왕을 연상시키는 칭호는 절대로 받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

  옥타비아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많은 의원들이 갖가지 이름을 외쳤다.

  그는 의견을 취합하는척 하며 의원들이 말한 이름을 전부 후보에 올렸다.

  그리고 몇 분 뒤 마이케나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들 중에 가장 존엄한 자, 위대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자야 말로 마르쿠스에게 어울란다고 소리를 높였다.

  "아우구스투스······."

  "괜찮은데? 아니 그 이름 외에는 우리의 인도자의 위대함을 표현할 수 있는 칭호가 없는 것 같군."

  옥타비아누스가 솜씨 좋게 원로원의 여론을 하나로 모았다.

  투표는 전원의 만장 일치로 의결됐다.

  이번에는 카토조차 아무런 반대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왕의 이미지가 연상됐다면 거품물고 반대했겠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영예로운 칭호일뿐 딱히 왕과 관련된 이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원로원의 이름으로 마르쿠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린다는 의결안이 공식으로 채택됐다.

  그로부터 이틀 뒤, 원로원은 다음 해의 집정관으로 뽑힌 키케로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황금으로 만든 월계관과 함께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역사상 당신 같은 로마인은 없었습니다."

  키케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엄숙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에 감사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원로원이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려 합니다."

  키케로는 특유의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장장 한 시간 이상 연설을 이어나갔다.

  오랜만에 대중의 앞에 서는 자리인만큼 한층 기분이 고조된 그는 자신이 어째서 로마 최고의 지식인인지를 연설문으로서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다시 한 번 마르쿠스가 이룬 위용에 감탄하고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해가 질 때까지 계속 될 것 같던 키케로의 연설은 회장에 울려 퍼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끝을 맺었다.

  "본 원로원은 이런 이유로 정식으로 선포합니다. 모든 로마인들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자여, 그대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이 이 이름을 물려주는 대상 외에는 로마의 그 누구도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이 통과됐음을 알립니다.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 700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이름이여!"

  마르쿠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명예를 받아들였다.

  키케로가 마르쿠스의 머리 위에 월계관을 씌워주며 그를 포옹했다.

  시민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와 함께 환성을 내질렀다.

  시민들은 사실 복잡한 정치구도와 이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마르쿠스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자신들의 지도자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번 행사가 자신들의 염원을 원로원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해석했다.

  마르쿠스는 아내 율리아와 친우들을 대동하고 계단 위로 올라가 시민들을 향해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옥타비아누스는 큰 소리로 시민들을 향해 외쳤다.

  임페라토르도, 프린캡스도 이미 있었던 이름이다.

  샤한샤와 파라오, 천자라는 칭호도 다르지 않다.

  반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은 유일무이하다.

  앞으로 로마의 지도자로서 계승될 이름이지만, 지금 이 순간 마르쿠스는 이름이 상징하는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위대한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로마인.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

  ※※※

  "···그러면 이제 마르쿠스 님은 로마의 황제가 되신 건가요? 수도는 계속 로마로 가는 건가요? 왕이 다스리는 국가여도 선거 제도는 그대로 존재하는 거고?"

  며칠 동안 이어진 축제 일정이 끝난 뒤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두 파라오 자매와 오붓한 자리를 마련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터져나온 아르시노에의 질문공세에 클레오파트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넌 대체 옆에서 뭘 봤던 거니? 마르쿠스 님께서 왕을 칭할 생각이셨다면 진즉에 그렇게 했겠지. 이렇게 우아하고 세련되게 권력을 가져오는 걸 보고서도 한다는 질문이 기껏 그런 거여서야······."

  "···나도 대충은 알거든? 그냥 확인 삼아서 질문했을 뿐이라고."

  아르시노에의 항변을 대충 한 귀로 흘린 클레오파트라가 마르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고한 자리에 오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마르쿠스 님께서는 이제 역사상 누구도 손에 넣지 못할 권력을 쥐게 되셨네요. 역사상 그 어떤 파라오나 페르시아의 군주도, 심지어 저 알렉산드로스 대제도 마르쿠스 님처럼 광활한 땅의 주인은 되지 못했죠."

  "이건 끝이 아니라 출발선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과정보다는 이제부터의 행보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넓히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힘들다···맞는 말이네요.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도 후대에 갈갈이 찢어지고 지금은 우리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를 제외하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클레오파트라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자조섞인 허망함도 담겨 있었다.

  본래 허영은 있어도 야망은 없었던 아르시노에와 달리 클레오파트라는 상당한 야심가였다.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이집트 의 재부흥을 꿈꾸었던 그녀였지만, 이제 그것도 허황된 과거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마르쿠스와 만나고 로마의 힘을 보면서 똑똑히 깨달았다.

  이집트가 다시 한 번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될 시대는 이제 영영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집트의 최선은 지금의 위치를 고수하며 로마에게 붙어서 충실한 동맹국으로서 남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최소한 멸망은 피할 수 있으리라.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동생이 여인으로 태어나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르쿠스와 사랑을 나누고 아이라는 결실을 볼 수 있는 몸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공주가 없었다면 이집트는 파르티아 꼴이 났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번 세대에 한정지은 문제일 뿐.

  자신들이 죽은 뒤의 미래는 또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마르쿠스에게 프톨레마이오스의 존속을 약속받긴 했으나 더욱 구체적인 확약이 필요했다.

  "저기, 마르쿠스 님."

  클레오파트라의 한없이 진지한 표정에 아르시노에도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번에 하셨던 약속 말인데요. 황금을 내어주면 왕조의 존속을 약속해주시겠다던."

  "그랬죠. 혹시 제가 약속을 깰까봐 불안하신 건가요?"

  "아니요!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어떤 방법으로 해주실까 궁금해서······."

  아르시노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지금처럼 마르쿠스 님과 우리의 핏줄이 파라오의 자리에 앉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럼 후대 왕조의 지배자들도 결국 마르쿠스 님의 핏줄일 테니 상관없잖아."

  "그게 그렇게 잘 이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렇지.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파라오는 두 명이 공동 통치를 하는 게 관습이니까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그건 클레오파트라 님의 말이 맞습니다."

  마르쿠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그의 어조에 별로 심각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둔 바가 있긴 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두 명이 공동 통치를 하죠. 이건 확실히 지금까지 언제나 분열의 씨앗이 됐습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찍어 누르는 구도가 돼야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두 분이 다투지 않아도 이집트의 정세는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마르쿠스 님이 사실상 저희의 위에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비슷한 구도를 유지할 겁니다. 저의 공식적인 후계자, 즉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물려받는 이 역시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할 겁니다. 그리고 저와 클레오파트라 님, 아르시노에 님의 핏줄도 지금처럼 파라오를 맡으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는 마르쿠스의 후계자가 될 게 뻔하다.

  하지만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리아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 통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혈통들이 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이집트 총독직을 영구 세습하는 정도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좋은 생각이라며 마르쿠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 식으로나마자 자신들의 후손의 안전이 쭉 보장될 수만 있다면 뭔들 마다하겠는가.

  분위기가 좋아진 세 사람은 침상 위로 올라가 오랜만에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 295. 황가의 신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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