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황가의 신들 >
296.
로마에서 최고로 영예로운 자라는 이름을 얻은 마르쿠스의 첫 대외활동은 카이사르에게 적합한 이름을 수여해주는 것이었다.
마르쿠스가 얻은 게 있는 것만큼 카이사르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영광을 돌려주어야 한다.
오랜만에 원로원 의사당에 모습을 비친 마르쿠스에게 수많은 의원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마르쿠스 님, 아니 아우구스투스 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하하하. 로마에는 언제까지 계시는 건가요?"
"아우구스투스시여, 카프카스의 광산개발 입찰 건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집트에 나일강까지 곧바로 연결되는 운하를 뚫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던데 혹시 사실인가요?"
마르쿠스는 여러 가지 청탁과 질문에 대강 답을 해주며 자신을 위해 마련된 좌석으로 향했다.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께서 모든 의원들께 청할 발언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자연스럽게 운을 떼자 모두의 이목이 한층 더 집중됐다.
마르쿠스가 모든 의원들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선 제가 로마를 비우고 있는 동안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모든 의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저도 안심하고 동방의 기틀을 다지는데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돌아오신 뒤 다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집정관 키케로 님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언제나 비판적이면서도 건설적인 의견으로 균형을 맞춰주시는 카토 님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들은 키케로는 얼굴에서 솟아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열심히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카토도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마르쿠스는 그 이후로도 다른 의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들이 세운 공을 한 가지씩 짚어주었다.
의원들은 이걸 자신들의 체면을 살려주는 행동이라 해석하고 그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원로원의 환심을 얻으려는 행동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바쁜 격무 와중에도 원로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있다는 신호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알아차린 이가 거의 없더라도 나중에 어떤 계기로든 분명 한 번쯤은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마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는 로마의 위대한 영웅, 카이사르 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카이사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여 마르쿠스의 찬사에 화답했다.
마르쿠스는 박수를 치려는 의원들을 손짓으로 자제시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이사르의 업적을 쭉 읊어나갔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를 점령한 표면적인 사실만을 늘어놓은 게 아니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얻음으로써 장래 로마에 어느 정도의 생산력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의 양이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지.
그리고 게르마니아를 복속시킴으로써 장래에 다가올 위험이 얼마나 극적으로 감소했는지를 모두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이 외에도 흉노전쟁에서 카이사르 님이 어떻게 로마를 구했는지는 여기 계신 분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카이사르 님의 신속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흉노의 기병들이 이탈리아 반도 안쪽으로 침입해 왔을 것이고 그랬다면 우리 측의 피해는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전쟁을 통해 얻은 당장의 이익은 마르쿠스가 좀 더 많았다.
갈리아나 브리타니아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인 반면, 마르쿠스가 점령한 곳들은 대부분이 이미 문명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전쟁 외에도 이것저것 손을 댄 분야가 워낙 많았기에 로마에서 군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카이사르가 좀 더 강했다.
특히 저 먼 동방에서 주로 전쟁을 수행한 마르쿠스보다는 역시 이탈리아 반도의 바로 북쪽에서 군사를 지휘한 카이사르의 전과를 피부로 느끼기 쉬웠다.
흉노전을 지휘할 때도 로마와 히스파니아 방어선을 카이사르가 지휘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지금까지의 행적이 보여주듯 로마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장군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안하는 바입니다. 로마를 구한 위대한 영웅 카이사르가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영구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대부분의 의원은 찬동하는 분위기였지만 카토처럼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임페라토르는 현재는 군단의 통수권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였으나 과거 왕정 당시에는 왕의 권한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아우구스투스처럼 새로운 칭호를 만든 거라면 모를까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지배자의 느낌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마르쿠스는 반발이 채 나오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그리고 저는 카이사르 님에게 버금가는 위대한 로마의 지휘관들에게도 이 뜻깊은 칭호를 수여하고자 합니다. 한니발을 물리치고 로마를 구한 구국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리고 동방의 왕조들을 무릎 꿇리고 로마의 위용을 아시아까지 확장시킨 폼페이 우스 마그누스. 이 둘 역시 위대한 임페라토르로서 로마의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로마인이라면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두 이름이 같이 거론되자 원로원의 반응도 한층 더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카이사르 혼자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독식하는 것도 아니니 카토로서도 딱히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마르쿠스의 입장에서는 저런 권위적인 호칭을 카이사르에게 주는 것으로 자신이 권력에 초연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실리만큼이나 허영을 좋아하는 카이사르도 자신이 역사상 최고의 장수로 공인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느라 고생 중이었다.
사실 임페라토르라는 칭호 역시 훗날 마르쿠스가 계승할 테니 실질적인 수혜자는 마르쿠스였지만, 그 정도로 멀리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마르쿠스의 편이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었다.
마르쿠스의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옥타비아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외쳤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위대한 로마의 수호자에게 영광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의 뒤를 따라 민중파 의원들이 열광적으로 환호를 지르며 카이사르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어서 다른 의원들도 박수로 찬성의 뜻을 밝혔다.
키케로와 브루투스, 그리고 결국 마지막으로는 카토조차 과거 얼굴에 오물투척을 당했을 때와 거의 흡사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두 번.
그게 그가 카이사르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였다.
※※※
그 뒤로 원로원의 의결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르쿠스는 이후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느긋하게 자신의 저택에서 휴식을 즐겼다.
커피향을 음미하고 있는 그의 옆에 앉은 율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시던데요. 이야기는 나눠 보셨나요?"
"장인어른께서?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하시던데 그 정도로 마음에 드셨나?"
"당연하죠. 아버지가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얼마나 그런 종류의 명예에 집착하시는데요. 로마의 유일한 최고 사제이자 임페라토르. 그런 거창한 칭호에 흠뻑 취해있을걸요."
과연 딸이라 그런지 율리아는 카이사르라는 사람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명예 쪽을 좀 더 중시하고 옥타비아누스나 마르쿠스가 실리 쪽을 더 챙기는 타입이라면, 카이사르는 둘 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전 앞에 역대 임페라토르들의 조각상을 만들 예정이야. 스키피오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장인어른의 순서대로 장식을 해둘 건데 장인어른의 조각상은 특히 신경 쓰라고 말해둬야겠네."
"그건 제가 말해둘게요. 그런데 당신도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오셨으니 슬슬 아버님을 찾아뵐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아예 로마를 떠나서 한적하게 살고 계신 분이라 시간을 내기가 좀 어려웠는데 이제 잠깐 여유가 생겼으니 한 번 가봐야지."
크라수스는 현재 자신의 아내와 충실한 몇몇 해방노예들만을 대동하고 로마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별장을 짓고 유유자적 전원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폼페이우스 사후 그는 속세의 번잡함이나 권력욕, 야망 같은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탈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마르쿠스도 이제는 아버지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고 편하게 노년을 보내도록 배려하고 싶었다.
"당신이 동방에 가 있는 동안 제가 몇 번 찾아뵌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많이 변하셨더라고요. 당신은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거예요."
"혹시 몸이 편찮으신 건 아니지?"
"네. 이제 꽤 연세가 드셨는데도 굉장히 정정하세요."
"그건 다행이네."
"가시는 김에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소개해주시는 게 어때요? 아예 이번 기회에 다나에까지 함께 가서 가족 전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말투는 나긋나긋했지만 어쩐지 마르쿠스에게는 어딘가 찔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파라오들 얘기는 왜 갑자기······."
"로마에 돌아오시자마자 두 사람과 같이 침실에서 보내셨다면서요? 아직 체력이 넘치시는 것 같아서 솔직히 안심했답니다."
"아니 그건 차기 파라오의 계승 문제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거야. 어디까지나 본래 목적은 그런 거였다고."
황급히 변명하는 마르쿠스의 반응에 율리아가 재미있다는 듯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농담 좀 해본 거예요. 그런데 차기 파라오 계승 문제라면··· 우리 아이들이 이집트의 파라오도 겸하는 건가요?"
"그래야지. 이집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파라오가 아닌 자들에게 통치받는 걸 원하지 않아. 그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거든."
역사상 이집트를 지배한 군주들은 이집트인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 언제나 파라오를 자처했다.
먼 과거 쿠시 왕국이 상 이집트 유역을 손에 넣었을 때도 그러했고, 가까운 과거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같은 방식을 취했다.
원 역사에서도 로마의 황제들은 이집트에 있을 때만큼은 이집트의 파라오를 칭하기도 했으니 똑같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걸 납득했어요?"
"그런 방식이 아니면 프톨레마이오스가 존속할 수 없을 테니까. 그 외에는 길이 없다는 걸 두 사람도 알 거야."
"그렇군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서로 간의 이해가 일치한 걸 기념하기 위해 아주 뜨거운 시간을 보내셨을 테고요."
살짝 허리를 들어 마르쿠스와의 거리를 좁힌 율리아가 은밀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면 저도 그 두 사람 못지않은 사랑을 기대해 봐도 되는 거겠죠?"
"···물론이지."
"그럼 내일은 당신이 힘들 테니까 부모님을 뵈러 가는 건 그다음 날로 하도록 하죠."
어제도 고생했는데 오늘도 하루종일 놔주지 않을 거라는 선언에 마르쿠스는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으나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맡겨줘."
자신감을 쥐어짜 낸 대답에 율리아가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부 사이에 오붓한 시간을 즐기기도 잠시, 전령 한 명이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사적인 휴식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급하게 왔다는 건 상당히 중대한 일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마르쿠스의 시선을 받은 전령이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품속에서 푸블리우스의 인장이 찍힌 보고서를 꺼내 바쳤다.
"동방에서 날아든 소식입니다. 한나라의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 296. 황가의 신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