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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 황가의 신들 (298/326)

  < 297. 황가의 신들 >

  297.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명성과 부를 자랑했던 권력자였다.

  아들인 마르쿠스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뒤로 물러난 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가진 영향력은 상당했었다.

  만약 작정하고 권력을 탐했다면 카이사르만한 세력을 구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아니, 모두가 그렇게 하리라고 확신했다.

  젊었을 때부터 부와 권력에 집착적인 모습을 보였던 크라수스다.

  그런 그가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타인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 물러설 리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르티아 원정도 나날이 커져가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명성에 위기감을 느껴서 추진했던 일이지 않은가.

  거기에 가장 큰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도 먼저 죽었다.

  당시 귀족파가 크라수스를 중심으로 뭉쳐 급부상하는 카이사르를 견제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좀처럼 원로원에 출석하지도 않고, 그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권력의 중심에 오르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만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몸이 좋지 않다고 둘러댄 이상 행동을 조심할 필요도 있었기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크라수스는 회복이 끝났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한적한 지역에 있는 별장을 사서 식솔들과 함께 그리로 이주해 버렸다.

  이 사건은 로마 사람들에게는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크라수스가 로마를 떠나기 전 시민들에게 대대적인 연회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열흘 내내 이어지는 성대한 축제였다.

  귀족파 의원들을 제발 은퇴하지 말라고 기를 쓰고 요청했으나 크라수스는 그저 허허로운 웃음으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자네들도 그냥 적당히 하다가 이쪽으로 오게. 언제든 환영할 테니."

  오히려 다른 의원들에게도 은퇴를 종용하는 그의 반응에 귀족파는 크라수스가 정치에서 완전히 마음이 떠났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로마를 떠난 크라수스는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을 때조차 한 번도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암살 사건이 터졌을 때 귀족파가 그렇게 애원을 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손님들을 쫓아내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너무 확실해 설득의 여지조차 없었다.

  무궁화 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나 재물에 민감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원로원의 중진들은 이 때를 기점으로 크라수스를 완벽하게 은퇴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오히려 그의 결정을 칭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 정도로 부와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고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들인 마르쿠스가 로마 역사상 가장 존귀한 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형국이다.

  크라수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가문의 재산을 배로 불리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는 그런 일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별장 인근의 마을사람들에게 농기구를 선물하기도 하고, 편하게 물을 끌어올 수 있도록 관개시설을 설치해주기도 했다.

  이 모든 보고를 들었을 때 마르쿠스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변하셨다고?"

  한적한 곳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세한 내용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게 자신이 알던 크라수스가 맞나 싶었다.

  아들된 도리로서 너무 무관심했었다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동방에 나가 있는 자신 대신 정기적으로 별장을 방문하며 살뜰하게 챙겨준 율리아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쪽으로 가면 곧 보여요."

  크라수스의 인망은 놀라울 정도로 두터웠다.

  그리 크지 않은 변두리 마을이긴 해도 크라수스에 대한 걸 물어보면 사람들은 두 눈을 밝게 빛내곤 했다.

  어르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설명해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오랜만에 신선함을 느꼈다.

  "그 정도로 심경의 변화가 크셨던 건가······."

  생각해 보면 폼페이우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다.

  나이도 나이였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지긋한 나이에 노욕을 부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현자처럼 늙어가는 게 훨씬 더 보기 좋은 게 사실이었다.

  "나도 나중에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마차 한 대가 딱 지나갈 수 있을만한 길을 통과하며 마르쿠스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어림도 없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기엔 당신은 이미 너무 멀리 왔어요. 진심으로 물러나고 싶다고 해도 주변에서 놔주지를 않을 걸요? 야반도주라도 하면 모를까···아니다, 그래도 도로 잡혀와서 이것만 처리하고 물러나달라는 말이나 듣겠죠."

  "그리고 그 다음 날이 되면 또 똑같은 말을 들을 테고."

  절로 쓴웃음이 나오는 미래다.

  사실 방금 전 한 말도 딱히 진심은 아니었다.

  이미 로마의 모든 권력을 움켜쥔 시점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단 건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될 그 순간까지 변화하는 로마를 계속 지탱해줘야 한다.

  미래를 알고 있는 마르쿠스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난다는 건 책임을 내팽개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자신은 이렇게 살 수 없다.

  명확한 현실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긴 마르쿠스는 마차에서 내려 정원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엄청 크진 않네?"

  크라수스의 별장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소박한 느낌이 공존하는 묘한 느낌을 풍겼다.

  정원 한구석에서 느긋하게 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느냐?"

  나이가 많이 들긴 했어도 아직 노쇠했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천천히 다가오는 노인을 향해 마르쿠스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네가 로마에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그리 서운하지는 않다. 어차피 나야 중년티 펄펄 나는 아들보다야 우리 아가가 살갑게 대해주는 게 훨씬 더 좋지."

  "율리아도 이제 나이가 찼습니다. 아가는 무슨······."

  오랜만에 만났어도 어색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이가 돈독한 부자 관계란 원래 그런 법이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마르쿠스를 따라온 수행원들이 정원에 자리를 마련했다.

  "커피는 드시나요? 입맛에 맞지 않으시다면 차나 희석한 포도주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내가 아직도 로마에서 사오고 있는 몇 안 되는 물건이 바로 커피다. 요새 이걸 마시는 게 인생의 낙인데 없으면 안 되지. 네가 마시는 대로 타 보거라. 색다르니 아주 좋을 것 같은데."

  크라수스의 말과 행동에서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유쾌함과 여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새어나왔다.

  억지로 꾸며낸 모습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녹아든 버릇이란 게 느껴졌다.

  "그럼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점심을 들 때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으니 그동안 네 무용담이나 좀 들려다오. 푸블리우스 이 놈도 어떻게 지내는지 좀 듣고 싶구나."

  "그 녀석이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와도 여전히 사이가 좋고요. 율리아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쭉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쭉 말해보거라. 아들의 입으로 직접 나온 말을 듣는 건 또 색다른 묘미가 있을 테니까."

  크라수스가 느긋하게 잔을 들어 커피향을 음미했다.

  율리아는 어머니 테우토리아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마르쿠스는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업적을 설명해주었다.

  크라수스는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도 했고, 가끔씩은 흥미로 눈을 반짝이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키케로는 그 고생을 하면서도 기어코 집정관까지 올라갔다니 근성 하나는 대단하구만. 그 정도 됐으면 이제 그냥 은퇴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글이나 쓰면서 좀 쉬어도 될 텐데 말이야."

  "안 그래도 이번 집정관 임기를 끝으로 조금씩 활동을 줄일 거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그러라고 했고?"

  "물러나게 되더라도 법률 자문단으로서의 일은 계속 해주셨으면 한다고 요청을 드렸죠. 필요하다면 따로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아주 좋아하더군요."

  크라수스가 혀를 차며 웃었다.

  "그 녀석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만. 어찌보면 좋은 거겠지. 카토도 그렇고."

  "아버지께서 많이 변하셨다고 놀라워하는 의원들이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나 심경의 변화가 크셨던 겁니까? 역시 폼페이우스 님이 그렇게 세상을 뜨신 것 때문에?"

  "글쎄······."

  크라수스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말없이 뜨거운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증기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이내 정원에 피어있는 꽃으로 옮겨갔다.

  "아마 그게 제일 크겠지. 모든 걸 다 이룬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 본인은 후회가 없는 인생이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지."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삶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셨나 보군요."

  "회의감이라기 보다는 초탈이다. 네가 없었다면 나도 그렇게 깔끔하게 모든 걸 내려놓진 못했겠지. 하지만 네가 이미 나 이상으로 성공을 누리고 있고, 푸블리우스도 자리를 잡은 상황이니 전혀 부담될 게 없더구나. 네가 어디까지 올라가게 될지 바로 옆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거야 뭐 여기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거니까."

  "장언어른께서도 아버지의 변화에 신기해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그분도 여기에 자리를 잡지 않으실까요?"

  카이사르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며 몸이 삐그덕 거린다는 고충을 토로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카이사르라······."

  마르쿠스에게 쭉 이야기를 들은 크라수스는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런 삶은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너에게 말은 안 했겠지만 이번에 그 녀석이 내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거든. 자신만이 유일한 임페라토르가 되었다고 돌려돌려서 자랑을 늘어놓던데?"

  "그랬습니까?"

  "그래서 축하한다고 답장을 보내줬지."

  "아버지께서도 거창한 칭호를 하나 얻으실 겁니다. 저희 가문이 신으로 추대된다면 아버지께서도 자연스레 살아계신 신이 될 테니까요. 후대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재물의 신으로서 전해지게 될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크라수스는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눈동자에 눈물까지 찔끔한 게 정말 어지간히 웃음이 터져나왔던 모양이다.

  "내가 아들 하나 잘 둬서 신으로 대접도 받아보게 생겼구나. 하긴 너는 이제 로마의 왕···아니, 왕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었으니 신이라 불려도 무방하겠지."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정치에서 손을 뗐다고는 해도 타고난 통찰력이 완전히 죽은 건 아니었다.

  크라수스는 마르쿠스의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 이미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걸 간파했다.

  "그런데 이 넓은 나라를 다스리려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텐데 여기까지 와도 괜찮았던 거냐? 할 일이 저기 올림포스 산만큼이나 쌓여 있을 텐데."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커다란 사건이 하나 터졌었습니다. 그래도 지시를 내려두면 당분간은 제가 손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체재는 마련해 놨으니까요. 바빠지기 전에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해야지요."

  "그래, 그럼 푹 쉬다 가거라. 복잡한 정치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고 다른 이야기나 좀 해보도록 하자. 우리 귀염둥이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안 그래도 조만간 율리아와 함께 여기 올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아이 모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고 싶어하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마르쿠스는 휴식을 했어도 언제나 정치적인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었다.

  율리아도, 클레오파트라도 쉬는 동안에도 언제나 정치와 국제정세를 논하는 걸 좋아했고, 마르쿠스도 그런 이야기를 받아주는 걸 즐겼다.

  소피아도 자란 뒤에는 별 다를 게 없었고 여기에 옥타비아누스까지 가세하면 휴식의 장이 토론의 장으로 변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런 평소의 휴식과는 다르게 크라수스와 테우토리아는 평범한 부모들처럼 '밥은 건강한 식단으로 먹고 있느냐', '뭔가 걱정거리는 없느냐' 하는 질문들을 던졌다.

  국제정세가 앞으로 격변하든 말든 지금 이 자리는 그런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마르쿠스는 정말로 오랜만에 정치인으로서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가족끼리의 진솔한 이야기를 즐겼다.

  언제나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긴장감이 깨끗하게 씻겨져 내려가고 있었다.

  < 297. 황가의 신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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