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황가의 신들 >
298.
"너무 신세를 지고 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신세는 무슨. 아들이 찾아와줬는데 당연히 몇 날 며칠이라도 묶고 가라고 해줘야지. 너무 빨리 보내면 네 어미가 난리를 쳤을 거다. 사람이 왜 그렇게 무심하냐고."
"왠지 경험이 느껴지는 말인데요?"
"사실 예전에 며늘아가가 왔을 때 이틀 정도 머물게 하다가 돌려보냈는데 네 어미가 짜증을 내더구나. 친딸이 있었어도 그 정도로 지극정성은 아니었을 게다."
저녁을 먹고 해가 지기까지도 부자간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낮처럼 복잡한 정치 이야기 따위는 일절 나오지 않는다.
건강이나 로마와 동방에 떠돌던 신기한 소문들, 어떤 나이 많은 원로원 의원의 재혼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그저 그런 화제들만으로 대화는 끊임없이 계속 이어졌다.
낮에는 주로 마르쿠스가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은 크라수스의 차례였다.
마르쿠스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주고, 적절할 때에 답변을 해주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오랜만에 대화 상대를 만난 크라수스는 아낌없이 진심을 내비쳤고, 마르쿠스는 마음 그대로 그 진심에 공감했다.
생산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얻을 수 있는 게 있다.
여기에 오길 진심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푸블리우스도 함께 데려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한층 강해졌다.
기울어지는 술잔과 함께 풀벌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동방에는 언제 돌아갈 거냐? 이번엔 로마에 꽤 오래 있을 거지?"
"원래 일 년 정도는 있을까 했는데 절반 정도로 기간을 줄여야 할 듯합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흥미로운 보고가 도착해서요."
"하긴 그쪽 땅덩어리도 좀 넓은 게 아니니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겠지. 그래도 네가 없어도 잘 굴러가게 만들어 놨다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대외적인 문제는 제가 지시를 내려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일단 어떻게 대처할지 답변은 보내둔 상태입니다. 하지만 제 서신이 바다를 넘어서 티그리스강까지 도달하려면 시간이 꽤나 많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너무 비효율적이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나온다면 편리하겠지만··· 그런 건 신화에서밖에 나올 수 없겠지. 네가 만들어볼 수는 없겠느냐?"
크라수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진짜로 해보라는 의미보다는 어디까지나 농담을 던지는 것에 가까웠다.
마르쿠스는 그 말을 오히려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언젠가는 그런 물건이 나올 겁니다. 제 대에서는 안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요. 그때가 된다면 히스파니아에서 저기 페르시아 지역 끝까지도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겠죠."
"허허··· 아무리 말이나 새를 이용한다고 해도 서신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이거늘 어떻게?"
"지금은 아버지께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시대가 반드시 올 거라는 거죠. 어쩌면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발전속도로 보자면··· 200년 뒤 정도면 초기 형태에 가까운 물건 정도는 나올지도요."
"200년? 그건 너무 짧지 않느냐."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이라면 카르타고와 싸웠던 포에니 전쟁이 막 일어났을 무렵이다.
기술발전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았던 고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200년은 충분히 짧은 시간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로마로 관광이나 오신다고 생각하고 한번 놀러와 보세요. 아버지가 기억하고 있는 도시와는 또 다를 테니까요. 앞으로의 발전 속도는 사람들이 쉽게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지금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요. 분명히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는 사람들이 한가득 나올 텐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또또 그런 쪽으로 이야기가 빠지는구나. 너는 결국 평생 그런 쪽에서 자유롭지 못할 사람인가 보다."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살기로 정한 사람은 제 자신이니까요."
"이왕 이렇게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하자면 너무 부담감을 가지진 말거라. 그냥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보고 뒷일은 역사의 흐름에 맡겨야지. 내가 살아보니까 시대의 흐름을 일개 개인이 완벽히 제어하려는 건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 아닐까 싶더구나."
마르쿠스도 그 말에 일부분은 동감하고 있었다.
시대의 물결을 일으키는 시작은 상당수는 특출난 개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어난 거대한 파도는 이제 개인의 손을 벗어나 전 세계를 휩쓸게 된다.
그때부터는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마르쿠스는 이미 무궁화 파동과 주가조작 시도 사건에서 그 조짐을 보았다.
지금은 초기라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세상 모든 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급속한 발전으로 오히려 일자리를 잃고 가난해지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사회적인 갈등이 늘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충격을 최소화하는 게 그 흐름을 만든 자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긴 그 말도 맞다. 책임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겠지. 내 생각도 결국 나의 그릇에 맞춘 아집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 너는 네 생각에 충실히 살아보거라."
기분 좋게 포도주를 들이켜던 크라수스가 한 가지 질문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동방에서 터졌다는 큰일이 무엇이냐? 이쯤 되니까 나도 살짝 궁금해지는구나."
"그렇게 엄청 큰일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도 한이라는 나라는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당연히 알지. 예전에 거기서 비단과 차가 엄청 들어오지 않았더냐. 요새는 로마산도 좋아져서 좀 시들시들해진 느낌이지만."
"그 나라의 황제가 죽었습니다. 사실 아직 몇 년 더 살았어야 하는데 제 생각보다도 훨씬 일찍 죽어버렸더군요."
"그래? 예전에 얼핏 듣기로는 전성기의 페르시아나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마케도니아 못지않은 대제국이라 들었는데 황제가 죽었다니 그쪽도 시끄러워지겠구나."
원 역사대로라면 효원황제 유석은 5년에서 7년 정도는 더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수명이 확 줄어버린 건 역시 마르쿠스와 엮였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속을 꽤 많이 긁긴 했다.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도 뻥뻥 터트려 줬으니 어지간히도 속을 끓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렇게 몇 년이나 일찍 가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사인이 뭔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아직 그 정도의 상세한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내심 과한 스트레스와 고혈압이 아닐까 추측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정도로 심하게 혈압 오르게 한 건가.'
비단과 차의 원조가 로마라고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려본 건 사실이지만 이게 진짜로 상대를 그렇게 화나게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딱히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겠는가.
지금이 아니라 먼 미래까지 내다보면 중원은 해체시켜 두는 게 맞는 것을.
'딱히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 지 않을 수도 있겠군.'
생각해 보면 한국에 있을 때는 개인적인 악감정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적인 감정이 은근슬쩍 드러났을 수도 있다.
언젠가 누군가가 왜 그렇게 한을 밟아놓으려는 거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르쿠스는 절대 그런 감정 하나 때문에 한을 해체하려는 건 아니었다.
"로마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손봐둬야 할 필요가 있는 나라라 이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 나라에 대해 잘 모르는데 그렇게나 위협적인 나라더냐? 하긴 로마를 뒤흔들었던 흉노와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대제국을 멀쩡히 유지했으니 저력이 있을 거 같기도 하구나."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한나라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습니다. 십 년 뒤도 그렇고 백 년 뒤도 그렇겠죠.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법이라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중국의 저력은 그 광활한 영토와 압도적인 생산력, 그를 바탕으로 한 인구에서 나온다.
19세기 후반에만 해도 대영제국과 청나라의 국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차이가 불과 200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뒤바뀌게 될 거라고 당시 전쟁을 이긴 영국인들이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지금은 고대 시대였고 한나라의 생산력은 로마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백 년쯤 지나면 인구수에서도 로마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낙관적으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어쨌거나 마르쿠스가 판을 깔아놓을 수 있는 기간은 길어봐야 앞으로 40년도 채 남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후대를 이을 후계자들에게 이야기를 남겨놓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정확히 전해질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마르쿠스가 느끼는 감각과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감각은 괴리가 상당이 컸다.
크라수스만 해도 한나라가 정확히 어떤 나라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한나라는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감에 지나지 않는 듯 보였다.
"이렇게 쭉 듣다 보니 궁금하기도 하구나. 예전에 얼핏 듣기로는 거기서 온 사람들은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작다던데······."
"그건 과장이 많이 섞인 낭설입니다. 어쨌든 한나라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니 제가 설명해드리죠."
마르쿠스는 술잔을 기울이며 크라수스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중원의 유구한 역사와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천조질서.
서구권 문명은 낯설 수밖에 없는 책봉체제까지.
크라수스는 마르쿠스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며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동양에서 천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위상을 들은 그는 처음에는 놀라워했으나, 이내 점점 안쓰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 죽었다는 한의 천자는 대충 몇 살이었는지 아느냐?"
"마흔은 안됐을 겁니다. 옥좌에 앉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죽었을 테니까요."
"처음 왕이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세상의 전부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겠지. 실제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고. 하지만 고작 권력을 얻고도 십 년도 누리지 못했으니··· 권력의 삶이라는 게 더욱더 허망하게 느껴지는구나."
마르쿠스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석이 병이 든 데에는 자신이 세상의 전부를 가진 게 아니라는 냉엄한 현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쪽에는 안 된 일이기는 해도 저희에게는 잘 된 일입니다. 천자가 너무 빨리 세상을 뜬 덕분에 그쪽의 후계구도가 완전히 꼬여버렸으니까요."
"후계자가 마땅치 않은가 보구나."
"태자의 나이가 이제 10살을 갓 넘긴 정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그 자질도 딸리는 편이라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엔 역부족이죠."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무너질 것이다 이 말이로군. 네가 당분간은 여기에 있어도 될 것 같아 다행이구나."
마르쿠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포도주를 들이켰다.
확실히 지금의 한은 그냥 놔두기만 해도 알아서 자멸할 가능성이 9할 이상이었다.
나라는 어지럽고 어리디어린 천자가 즉위했으니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어쩌면 왕망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전한이 먼저 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원 역사와는 달리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고 다시 일으킬 구국의 영웅이 등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으나 0이라고 무조건 단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르쿠스는 텅 비어버린 잔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중원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될 제국에 사형을 선고했다.
"불치병에 걸려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느끼는 상대를 지켜만 보고 있는 것도 자비는 아니죠. 조금 더 빠르고 고통 없이 갈 수 있도록, 아주 조금만 등을 밀어주려 합니다."
< 298. 황가의 신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