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황가의 신들 >
299.
당장이라도 움직임을 취할 것 같았던 마르쿠스는 의외로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록 로마에 머물렀다.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는 만큼, 순조롭게 기틀을 다잡을 수 있었다.
동방은 당분간 마르쿠스가 없이 얼마나 잘 굴러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예전처럼 푸블리우스에게 마르쿠스의 빈 자리를 완전히 메꾸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고, 딱 최고결정권자의 의결이 필요한 사항만 해결하라고 전해두었다.
그래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사안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마르쿠스가 서신으로 지시를 내려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건 그동안 꾸려놓은 조직체계가 얼마나 잘 굴러가는지 확인하는 일종의 테스트였다.
덕분에 마르쿠스는 그간의 결실을 확인해 보겠다는 핑계로 널럴한 스케쥴을 만끽하며 푹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란게 참으로 간사한 법이다.
격무에 치일 때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시간이었는데 막상 시간이 많아지니 이제 또 심심해지는 게 아닌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발전해 가는 로마의 변화를 만끽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원로원 의원들과 연회를 즐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몇 달이 지난 지금은 하루종일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 외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다였다.
"나는 평생 아버지처럼은 살 수 없겠어."
마르쿠스가 정원 아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지금도 손에 서류 뭉치를 한다발 들고 있는 사람이······."
오랜만에 단 둘이 마르쿠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다나에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르쿠스의 손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그리 곱지는 않았다.
최근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긴 했으나 이렇게 완전 단 둘이서만 있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당연히 가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순순히 서류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넣은 뒤 사과했다.
"아, 이건 거의 습관 같은 거라서 나도 모르게 버릇이 나왔네. 요새 너무 일이 없이 지냈더니 조금 무료하긴 한가 봐."
"아버님의 별장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는 뭐라고 하셨었죠? 분명 한 번쯤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은 건 사실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사람은 원래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있는 법이야. 그런 삶은 나랑 맞지 않다고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됐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지."
"건강만 확실히 챙긴다면야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게 가장 낫죠. 오히려 그게 더 건강하게 사는 길일지도 모르겠네요."
다나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르쿠스를 따라 정원 아래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아들인 아킬레스가 스파르타쿠스에게 지도를 받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기를 쓰는 건 영 별로였던 마르쿠스와 달리 문외한이 보기에도 몸놀림이 아주 좋았다.
"두 사람이 저렇게 어울리는 사제관계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다행이지?"
"그렇죠. 생각해 보면 참 묘하죠? 로마 최고의 전사였던 사람의 아들은 그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는데 우리 사이에서 나온 아들은 전사의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하니."
"원래 자식이라고 무조건 부모를 닮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아이들 교육이 더 어려운 것이고."
현대에는 그런 경향이 적었으나 고대시대에는 자식을 부모의 분신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연스럽게 자식이 자신의 길을 계승하길 원한다.
그리고 자신만큼 해내지 못하는 자식을 보면 역정을 내거나 한탄을 낸다.
물론 자식이 다른 재능을 보인다면 그쪽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스파르타쿠스 같은 경우가 딱 그랬다.
그는 처음에는 당연히 아들도 자신 못지 않은 전사로 키우리라는 꿈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아이가 커갈수록 자신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아들은 무기를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책을 잃고 토론하는 걸 더 좋아했다.
마르쿠스의 자식들과 놀 때도 트라야누스나 아킬레스 보다는 소피아와 어울리는 걸 선호하는듯 보였다.
아들은 열렬한 마르쿠스의 신봉자였으나, 검으로 그를 뒷받침 해주겠다는 스파르타쿠스와는 아예 생각이 달랐다.
"저는 훌륭한 학자가 되어서 마르쿠스 님의 정책을 뒷받침하고 싶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스파르타쿠스는 자신만의 길을 확실히 찾은 아들이 대견스러운 한편,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묘한 아쉬움도 느꼈다.
마르쿠스와 다나에의 아들인 아킬레스를 수련시킨 건 바로 그즈음부터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마음을 알고 있던 마르쿠스가 슬쩍 이 아이나 가르쳐 보라고 권한 게 시작이었다.
그 뒤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에 있을 때도, 마르쿠스를 따라 동방으로 갈 때도 언제나 아킬레스를 데리고 다니며 그를 가르쳤다.
하늘이 점지해준 것처럼 성향이 딱 맞는 사제 관계였다.
다나에도 아들이 어느 분야로든 확고한 재능을 타고 났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저 아이가 훌륭한 군인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네요. 아무래도 입지가 조금 미묘한 게 사실이니."
"스파르타쿠스 말로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훈련시켜준다면 충분히 자신 이상의 전사가 될 수 있을 거라던데?"
"그건 그냥 우리 아들이니까 약간의 겉치례가 들어간 거겠죠. 솔직히 전 그정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스파르타쿠스 이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곧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다나에는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나 뛰어날 수도 있다는 행복회로는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 바보 기질은 마르쿠스가 더 강했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는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전사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잖아.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아이가 환경적인 면에서는 훨씬 좋지. 재능이 조금 더 떨어져도 종합적인 면에서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부모의 그런 마음이 오히려 자식의 성장을 막는 법이라니까요. 응원도 좋지만 너무 과한 기대는 짐이 되는 법이에요. 당신 말만 들으면 소피아는 당신처럼 될 거고 트라야누스는 수레나스처럼 될 거고 아킬레스는 스파르타쿠스처럼 될 거라는데 현실성이 없잖아요, 현실성이."
다나에가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팔불출 경향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는 마르쿠스로서는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가 볼 때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지만, 슬프게도 다나에나 율리아는 이걸 자식바보의 꿈같은 소리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였다.
"어쨌든 아킬레스 저 아이도 나중에 충분히 군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야. 정말로 재능이 출중하지 않았다면 스파르타쿠스가 그렇게까지 끼고 돌리가 없으니까."
"하긴 그렇긴 하겠죠.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다나에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품격있게 웃고 있는 그녀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로마의 완숙한 귀부인 그 자체였다.
율리우스 리키니우스가의 안주인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마르쿠스의 정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마에서든 동방에서든 그녀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들을 제외하면 스파르타쿠스 정도였다.
그래도 정식 부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영예로운 대우는 받을 수 있지만 실질적인 실권은 잡을 수 없는 위치였던 것이다.
물론 다나에는 그럴 마음도 없었고 아킬레스에게도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아킬레스는 율리아의 허락하에 마르쿠스의 양자 신분으로 입적시켰으나 당연히 상속권은 없었다.
마르쿠스의 재산과 권리는 오롯이 소피아와 트라야누스가 전부 가져갈 것이고, 아킬레스는 마르쿠스의 아들이라는 명예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마르쿠스의 자식 중 상대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위치라 할 수 있었다.
소피아나 트라야누스는 말할 것도 없고,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자식은 허울뿐이긴 해도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계속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가 아킬레스에게 스파르타쿠스를 붙여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실질적인 무언가를 물려줄 수 없는 만큼 스스로 능력을 키워 자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 상황만 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으니 아버지로서 한 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다나에 역시 비슷한 심정일 게 분명했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가 이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돌봐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적절한 보답을 해줘야겠는데 뭘 해주면 좋을까?"
"글쎄요···저도 따로 감사 인사를 하긴 했는데 오히려 펄쩍 뛰면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하더라고요. 가족이 재능이 있다면 당연히 그걸 키워줘야 하는 게 자신의 의무인데 여기에 감사를 표하는 건 오히려 자신이 더 섭섭하다고."
"스파르타쿠스다운 반응이네."
그가 어떤 심경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스파르타쿠스의 입장에서는 마르쿠스의 자식은 예외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다나에의 자식은 조금 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쭉 봐온 동향 사람이고 뒤에서 그녀를 응원해주기도 했으니 그 감정이 오죽 특별하겠는가.
다나에라고 별반 다른 감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줄을 동원해서 스파르타쿠스의 아들이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뭔가를 더 해주고 싶어도 너무 그러는 건 오히려 가족이 아니라 타인으로 선을 긋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가족이라고 해도 받은 건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거야. 오히려 가족이니 조건없는 헌신을 한다는 관념이 잘못된 거지. 이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적당히 모른 척 하고 있어줘."
"알겠어요. 그럼 저는 그냥 지금처럼 하던 일만 계속 하고 있을게요."
"성과는 좀 있었어?"
"그럼요. 옛날하고는 확연히 다르다는 게 분위기로 느껴지지 않나요?"
지금 로마에는 노예들에 대한 과한 처벌을 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거나 노예의 인권을 완벽히 보장한다는 급진적인 법안은 아니었다.
노예는 당연히 주인의 소유물은 맞지만 마음대로 때려 죽이거나, 아예 휴식시간조차 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노동하게 하는 걸 금지하는 정도였다.
<노예를 부려먹더라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하고 부려먹어라> 라는 기본적인 지침에 가까웠다.
사실 로마에서 상식인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이미 그렇게 노예를 대하고 있었다.
다나에는 자신이 노예 출신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학대받는 노예들을 제보받고,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은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그녀의 주된 관심사였다.
예전이라면 큰 반향을 일으키긴힘들었겠지만 지금 로마는 해방노예 출신들이 워낙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아주 미약한 정도이긴 해도 조금씩 인식의 변화는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의외로 노예제 자체가 폐지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이네. 몇 백년만 지나면 적어도 로마 내에서의 노예제는 사라질지도 모르겠어."
마르쿠스는 문득 아주 먼 옛날 다나에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궁금해졌다.
지금의 자신은 과연 약속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당사자인 그녀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마르쿠스는 아들의 훈련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았다.
빤히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지금의 로마는 어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약속을 내가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잠깐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녀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마르쿠스를 마주보았다.
몇 번이나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어떤 말로도 자신의 진심을 다 담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그저 정원에 내리쬐는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299. 황가의 신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