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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황가의 신들(完)+후기 (303/326)

  < 302. 황가의 신들(完)+후기 >

  302.

  로마의 최고 부자들만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팔라티노 언덕.

  로마의 대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명소 역시 근 몇 년 사이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여러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매입한 마르쿠스는 이곳에 황궁의 터를 올리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 화려한 궁전이 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황제가 사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웅장한 곳은 아니었지만, 아마 대를 이어가며 이곳의 규모 역시 변해가리라.

  이 궁전의 내부에는 오직 마르쿠스와 카이사르만이 들어올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은퇴라는 일대 대사건을 앞두고 지금까지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상황들을 조율해 왔다.

  하지만 막상 그 날이 다가오자 현재 실내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음료를 들이켜던 마르쿠스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굳이 지금 내려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몇 년은 더 자리를 지키고 계셔도 예정에는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이미 내 구상은 거의 다 완성됐네. 그리고 내가 권력을 내려놓는 것으로 최후의 한 조각이 맞춰지는 거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최후의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고 몇 년이나 끌 이유가 없지."

  카이사르의 얼굴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제아무리 담대하고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그라고 해도 이 정도의 대사건을 앞두고 완벽하게 감정을 다스릴 수는 없는 듯했다.

  현재 두 사람은 로마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로마의 왕은 곧 세계의 황제나 마찬가지다.

  그 절대적인 권력과 힘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물러나는 것이다.

  더욱이 그 상속의 대상은 핏줄도, 양자도 아닌 자신의 사위였다.

  쉬운 결단이었을 리가 없다.

  아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설령 물려준다는 결정을 내렸어도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역사를 쭉 훑어보아도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선위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렇게 하기로 이미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말을 맞춰놨었다.

  마르쿠스는 그래도 카이사르의 심정을 고려해 여차하면 그가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부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카이사르 님은 키케로와는 다릅니다. 은퇴를 했더라도 키케로에게는 자문위원이라는 감투를 줄 수 있었지만, 카이사르 님은 정치와는 완벽하게 거리를 두고 사셔야 합니다. 제 아버지처럼요."

  "그건 이미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전혀 문제없으니 걱정 말게. 앞으로는 느긋하게 로마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책이라도 써볼까 하니까."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이름값과 영향력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은퇴한 뒤 조금이라도 정치에 개입하려는 듯한 모습이 보이면 마르쿠스의 중앙집권화에 장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카이사르는 철저하게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한다.

  이는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정치력의 소유자인 카이사르에게는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권력을 내려놓는다는 결정보다 그 이후의 삶이 더 힘들 가능성도 높았다.

  "예전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카이사르는 절대 당신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거라 말씀하셨죠."

  "그러면 그 예측이 틀렸다는 걸 내가 몸소 보여줘야겠군. 생각해 보니 자네 아버지의 별장에 가서 며칠 정도 쉬어보는 것도 재미있겠어. 듣자 하니 사람이 그렇게 많이 바뀌었다지?"

  "예. 이야기해 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기대되는군."

  카이사르가 즐겁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입에 가져갔다.

  그는 방 한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지도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네. 그러니 이렇게 몸이 멀쩡하게 움직일 때 물러나는 게 맞아."

  "대신 일하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걸 참으셔야 할 겁니다. 제가 저번에 몇 달가량 쉬어보니 일이 없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더군요."

  "다른 취미 거리를 찾아서 매진해야지. 어쨌든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삶을 산다고 생각하니 기대되는 부분도 있네."

  그렇다.

  지금까지의 카이사르의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었다.

  타지역으로 가는 건 언제나 전쟁을 위해서였으며, 로마에 있을 때조차 편히 있지는 못했다.

  마르쿠스와 달리 카이사르는 정적이 많았다.

  솔직히 말해서 카이사르가 앞에서 요란하게 시선을 끌지 않았다면 마르쿠스가 이토록 편하게 정상 궤도에 오르진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누리게 되는 진정한 평화로운 삶이다.

  이게 지루한 나날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회복의 여정이 될지는 살아봐야 알지 않겠는가.

  "정말로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 싶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몰래 일거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자네의 손을 빌리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노년을 즐겨보지. 이제 슬슬 시간이 됐을 텐데 일어나 볼까?"

  이번 은퇴식을 준비하기 위해 장장 몇 개월간 공을 들였다.

  심지어 일정 자체도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은퇴식 행사만 사흘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축복하기 위한 감사제가 열흘 동안 계속될 예정이었다.

  카이사르의 퇴장은 로마 정계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불러왔다.

  그가 원로원 의사당에서 한 연설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았다.

  "로마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향해 가야 합니다. 물려오는 뒷물결은 자연스럽게 앞물결을 밀어내며 나아가야 하는 법. 하지만 억지로 그 흐름을 막아두고 정체되어 있으면 결국 고이고 고인 물은 넘쳐 흐르거나 썩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저는 아직 충분히 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지켜보고자 합니다.

  "

  원로원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시민들도, 원로원 의원들도 카이사르가 종신으로 자리를 지켜줬으면 한다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이전에도 스스로 독재관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술라가 그랬다.

  하지만 카이사르와 술라는 명백하게 경우가 달랐고 정치적인 신념도 차이가 컸다.

  카이사르가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자리를 철저하게 지킬 거라고 확신했던 카토만 뻘쭘하게 되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라는 거물까지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다른 중진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눈치가 보였다.

  이미 키케로와 피소 같은 사람들도 물러났으니 더더욱 그랬다.

  자연히 위대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와 함께 물러나겠다고 선언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런 의원들은 은퇴식에서 카이사르의 뒤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어차피 은퇴할 거 이 기회에 같이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자리에서 내려오자고 판단한 의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카이사르가 이렇게 갑작스레 권력을 내려놓는 건 쉬고 싶어서도, 권력에 무욕해서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줄곧 구상해 왔던 로마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마르쿠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퇴장으로 자네는 로마에서 단 하나뿐인 최고의 존엄이 되는 것이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 그대로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지고의 존재."

  먼 옛날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은 이미 힘을 잃었다고 설파했던 그때부터 줄곧 생각해왔던 바다.

  로마가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질 개혁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처럼 은근슬쩍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아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제정 시대의 개막이다.

  "장인어른께 예전에 말씀드렸지만, 이 체제도 그리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저 역시 언젠가 다가올 큰 변혁을 맞이하기 위한 토대를 쌓아놓을 뿐이죠."

  "세상에 완벽한 체제가 어디 있겠나. 그런 건 있을 수 없지. 옛날 방식의 낡은 공화정보다는 지금이 낫고,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나오겠지. 내가 자네를 위해 터를 닦았으니 자네 역시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하리라 생각하네."

  백 년이, 천 년이 그렇게 쌓이고 쌓여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법이다.

  카이사르는 주변의 인식처럼 자신이 내려온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끝내놓았다.'

  내디딘 걸음 저 앞으로 온 세상을 뒤흔들 정도의 환성이 들려왔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나의 이름과 로마는 불멸로 남으리라.'

  앞을 향해 가는 걸음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별했던 어머니와 첫 아내, 그리고 좋은 동료였던 폼페이우스와 호적수 바야투르.

  이제는 기억 속 머나먼 저편으로 사라진 수많은 이름들.

  카이사르는 벅차오르는 심경과 함께 자신을 감싸는 눈부신 빛과 환호를 향해 몸을 맡겼다.

  ※※※

  카이사르의 은퇴식은 단순한 은퇴식이 아니었다.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만이 아닌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아프리카, 그리고 동방의 수많은 유력자들과 시민들이 찾아왔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우고 망루를 빽빽하게 설치했음에도 사람들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카이사르는 영예롭게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자가 있다면 다시 들어 올리는 자가 있어야 하는 법.

  행사의 대미는 마르쿠스가 카이사르의 모든 걸 승계받으며 장식했다.

  서방세계를 일통한 제왕이 동방의 주인에게 모든 걸 물려준다.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모습은 마치 세계가 하나로 재편되는 것처럼 보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쓰고 있는 월계관을 마르쿠스의 머리 위에 씌워주며 확고하게 선언했다.

  "나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로마의 시민들에게 받았던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에게 물려주고자 합니다.

  앞으로 그는 이 로마에서 위대한 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자이자, 모든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휘두르는 칼이자 로마를 지켜내기 위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 로마 역사상, 아니 저 신들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름이여!

  "

  마르쿠스는 기꺼이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새롭게 받아든 월계관의 무게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무거웠다.

  얇게 입혀낸 금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카이사르라는 우수한 동지이자 방벽이 있었을 때와는 다르다.

  앞으로는 오롯이 자신이 홀로 이 드넓은 제국을 떠맡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기꺼이 이 무게를 견뎌내리라.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큰 소리로 이름을 외치며 그를 힘차게 포옹했다.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의원들과 관객들이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환호를 내지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껴안은 다음 가족들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그의 머리 위로 군중들이 뿌린 수많은 꽃잎들이 흩날렸다.

  구시대의 끝과 신시대의 개막.

  임페라토르로서,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로서 마르쿠스는 앞으로도 수많은 전설들을 남긴다.

  로마를 인도하는 위대한 군주로서, 그리고 세상을 변하게 할 혁명적인 개혁가로서.

  제왕으로서의 등극은 종막이 아닌 그저 서막에 불과할 뿐.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 어디까지라도.'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이 곧 역사의 분기점이 되리라.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 302. 황가의 신들(完)+후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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