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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토라는 남자 (305/326)

  < [외전] 카토라는 남자 >

  다음날 새벽. 동이 트자마자 원로원 의사당으로 향했다.

  최근에 새로 증축한 의사당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넓었다.

  덕분에 원로원 회의가 없는 날에도 젊은 의원들은 끼리끼리 모여 각종 토론과 회의를 여는 게 가능했다.

  "정식 회의가 소집되지 않은 날 여기 온 게 얼마 만이더라······."

  솔직히 말하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문득 지금까지 얼마나 대충대충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작은 회의실은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로 가득하여 있었다.

  대충 훑어보니 오늘 있을 회의를 위해 누군가가 미리 가져다 둔 자료 같았다.

  "채권의 취득과 부당이득 성립요건에 관해서 유의해야 할 점, 새롭게 시작할 보험사업과 보험사기 방지와 대책 협의제 구성에 관해······."

  대충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자신이 최근 사회 문제에 관해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로원 의원으로서 결코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라이나스라는 젊은 의원이 '너는 전통만 부르짖고 있지 실제 사회를 위해 무슨 공헌을 하고 있느냐'라고 일갈하는 게 당연하다.

  그들 눈에는 자신이 시대에 뒤처진 주제에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그저 자리만 차지한 채로 꼰대 같은 소리나 늘어놓는 한심한 인간으로 보였으리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사실이 가슴을 쿡쿡 찔러왔다.

  어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건 어이없어서도, 너무 화가 나서 말문이 막혔던 것도 아니다.

  그냥 정곡을 찔려서 반박할 거리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들의 말에 틀린 사실은 없으니 그냥 인정하고 은퇴하는 것.

  만약 물러나겠다고 한다면 마르쿠스는 분명 지금까지의 공적을 고려해 성대한 은퇴식을 열어줄 것이다.

  원로원에서 나온 뒤로도 적적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해줄 게 틀림없다.

  실제로 이미 은퇴한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면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계속 버티면서 못볼꼴 보느니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나오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패배한 개처럼 꼬리말고 나가는 건 나 카토의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한 차례 꺼질뻔했던 불꽃이 타오르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줄 때였다.

  생각이 바로 섰다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라.

  마르쿠스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입밖에 내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말이다.

  미리 준비 되어 있는 자리의 구석에 하나 더 자리를 마련해두고 한쪽에 놓여 있는 책들을 보고 있는 사이 몇몇 젊은 의원들이 호의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중에서 어제 논쟁을 벌였던 라이나스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카토 의원님?"

  "좋은 아침, 아니 좋은 새벽일세. 자네들 지금까지 매일 이런 시간에 이곳에 나왔던 건가? 정말로 부지런하군."

  "저기, 그러니까······."

  "어제 자네에게 호되게 한 소리를 듣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네. 그리고 결심했지. 늦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원로원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해보자고."

  예전부터 나날이 복잡해져 가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단 건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배움을 청하면 따라갈 수 있었겠지만,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스무 살도 더 차이 나는 어린 청년들에게 몸을 굽히고 새로운 지식을 알려달라고 하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은퇴한 대다수의 의원들은 사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만둔 것이리라.

  하지만 모르는 게 있다면 배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있는 대로 용기를 쥐어 짜낸 지금 다시금 깨닫게 됐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한참이나 더 연장자가 이런 자세로 말을 하면 상대방도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도 내심 깔려 있었다.

  "나는 지금 자네들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부족하네. 사실 마음을 다잡았어도 자네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회의하기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겠지. 그러니까 우선 견학이라도 하게 해주게.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내 나름대로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고 공부하려고 하네."

  "카토 님······."

  "어제 자네의 말 덕분에 무기력하게 세월만 축내고 있던 나날을 끝낼 수 있게 됐네. 지금은 마치 옛날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 자네들과 어울려 논쟁을 벌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

  "하, 하지만 제가 너무 버릇없이······."

  "그러지 말고 그냥 감사히 받아들이는 게 어떤가."

  라이나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옥타비아누스가 산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새 들어서 느끼는 사실인데 저 젊은이는 보면 볼수록 마르쿠스와 비슷해지는 것 같았다.

  마르쿠스보다는 조금 더 효율 중시인 것도 같지만, 기본적인 자세가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옥타비아누스와 소피아를 합친 다음 반으로 나누면 마르쿠스 같은 성향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속내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다는 것이다.

  그게 굳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만큼 정치인으로서의 격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아마 로마의 미래를 책임지는 건 자신이 아닌 저런 젊은이가 되겠지.

  그는 이쪽을 바라보며 예의바른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카토 님은 우리가 기초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의정 활동을 하신 분이네. 그 경험은 아직 젊은 혈기만 내세우는 우리로서는 다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에 있지. 서로 배울 게 많은 관계가 될 테니 어제의 사고는 좋게좋게 흘러버리세. 다행히 카토 님께서 용서한다고 하시지 않은가."

  옥타비아누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관대한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이 친구도 느끼는 바가 많았을 겁니다."

  라이나스도 황급히 옥타비아누스를 따라 어제의 무례를 사죄했다.

  아마 그가 어제 말한 건 분명 본심에서 우러나온 발언이었을 것이다.

  일종의 신념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 사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분명 엄청난 무례였다.

  자신은 20년 이상이나 원로원 의원으로서 활동을 해왔고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도 양호한 편이었다.

  이제 막 원로원에 들어온 신참자가 예의 없는 소리를 쏟아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이건 감사조직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충분히 처벌을 내릴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물론 그렇게 문제를 키우면 나 역시 원로원에서 고립될 게 뻔하니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힘들어질 터.

  어차피 젊은 의원들 틈에 껴서 처음부터 다시 자신을 갈고 닦으려고 각오한 이상 이들과 척을 질 마음은 없었다.

  한 가지 문제는 이 어색함을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였는데 다행히 옥타비아누스가 중재해준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모양새다.

  라이나스는 아래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되돌린 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어제 카토 님에게 했던 말은 저희들의 마음을 대변해서 한 말이기는 했지만···분명 따지고 보면 제가 느끼는 초조함과 짜증을 카토 님에게 퍼부었던 면도 있었습니다.

  카토 님께서 오늘 여기까지 오시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각오를 하셨는지 익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아직 공부할 게 많은 몸이지만 제 무례를 용서해주신 답례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카토 님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카토 님의 그런 자세를 꼭 배우고 싶습니다.

  "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최근 통용되고 있는 지식들을 알기 쉽게 좀 가르쳐주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내민 손을 라이나스는 강하게 움켜잡았다, 서로가 품은 뜨거운 결의가 상기된 체온을 통해 확실하게 전해졌다.

  ※※※

  그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충실함의 연속이었다.

  마치 어렸을 적 로도스의 저명한 학자에게 새로운 지식을 배울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이제와서 젊은이들을 따라가는 건 쉽지 않았으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은 시간을 쏟아부어서 해결하면 그만이다.

  새삼 지금까지 체력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열심히 걸어 다녔던 과거의 습관이 고마워졌다.

  라이나스가 자신이 공부하며 주석을 달아둔 책들을 선물해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귀족들이 주최하는 만찬의 초대도 전부 정중하게 거절했다.

  원래도 그런 자리를 그리 즐기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정말 순수하게 시간이 모자라 갈 여유가 없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걱정이 됐던 건지 마르쿠스와 키케로가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요새 자네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지고 있네."

  "내 얘기가?"

  "젊은 의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회도 참가하고 있다면서? 뒤늦게 무슨 바람이 분 겐가?"

  키케로는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와는 마지막에 틀어지긴 했어도 은퇴한 뒤로는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된 상태였다.

  예전에 시간이 남아돌 때는 집필 활동에도 직접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그때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자네도 은퇴하고 우리와 합류해서 즐겁게 노년을 즐겨보세'하고 설득을 당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진지하게 그 말에 따르려고 했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늦은 바람이라면 늦은 바람이겠지. 최근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겨서 말일세."

  "이미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니. 자네는 몰라도 내 경우는 그저 열심히 하는 척을 했을 뿐이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르쿠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카토 님께서 저번에 은퇴 이야기를 꺼내셔서 나름대로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그런 없던 일로 해야 할까요? 은퇴하시면 대학에서 철학 교수를 맡아주십사 부탁드리려고 했었는데요."

  "나라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승낙하겠네. 머리 아픈 원로원 의원직보다 존경받으면서 후임들을 양성할 수 있는 교수직이 훨씬 매력적이지 않나? 나도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게 굉장히 만족스럽다네. 자네도 함께하면 좋을 것 같은데?"

  "정말로 고마운 제안이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네. 아우구스투스께도 괜한 신경을 쓰게 만들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번에 했던 말은 전부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그야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리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자리는 마련해둘 테니 힘이 드신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배려심 넘치는 제안이기는 해도 아마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 한 가지 목표가 생겼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원로원 의원으로 있는 것. 그게 지금 제가 가장 강하게 바라는 소원입니다. 어쩌면 민폐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한계가 올 때까지는 조금 더 제 신념을 관철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원로원 의원으로서 책무에 전념하시려는 모습은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카토 님의 결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저도 더 신경을 써드리겠습니다."

  키케로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어쩔 수 없지 않나. 나란 사람이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그리고 나는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충실하고 재미있네. 이렇게나 재미있는 삶을 그만두라는 건···역시 무리지."

  길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지금은 따라가는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분명 다시 한 명의 어엿한 원로원 의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겠지.

  예전에 내가 꿈꾸던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의 질서는 이미 붕괴됐다.

  하지만 로마 공화정은 끝난 게 아니다.

  그렇다면 내 손으로 새로운 공화정의 미래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보이겠다.

  기약 없이 먼 훗날일지도, 어쩌면 이 눈으로 보지 못하게 될 미래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상관하지 않는다.

  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원로원의 의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도록 하자.

  그것이 나, 포르키우스 카토가 품은 새로운 꿈이다.

  < [외전] 카토라는 남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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