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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클레오파트라의 한숨 (307/326)

  < [외전] 클레오파트라의 한숨 >

  "뭐야, 설마 네 딸도 옥타비아누스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발언에 클레오파트라의 머리가 일순간 복잡해졌다.

  오만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설마 이 아이가 그 웃기지도 않은 짓을 같이 하자고 자기 자매까지 꼬드긴 건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식 교육 잘못했다는 말을 들어도 변명조차 하지 못한다.

  파라오의 자리를 물려받을 두 계승자가 이런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건 수치스러워서 어디 가서 하소연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야기가 나와 봐야 결론은 클레오파트라 자신의 잘못이라고 나올 게 분명했다.

  파라오가 알렉산드리아를 지키고 있지 않고 허구한 날 외국에 머물러 있었으니 이런 꼴이 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반박하겠는가.

  아르시노에는 그녀의 굳은 표정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쿠스 님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있었지? 직접 보여줄 테니까 한 번 봐봐."

  "그냥 막 들어가도 뭐라고 안 해? 우리 딸은 요새 머리 좀 컸다고 자기 방에 들어올 때는 꼭 허락을 맡으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던데."

  어차피 옥타비아누스로 가득한 방에는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제발 들어와 달라고 해도 네가 나오라는 말을 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지금 밖에 나가 있어서 안에는 아무도 없어."

  "그래? 그러면 사양 않고······."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클레오파트라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대체 뭐야.'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의 풍경에 얼이 빠져버린 그녀를 따라 들어온 아르시노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이는 그대로 우리 딸도 지금 이런 상태라 내가 언니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야."

  "이거···소피아 맞지?"

  "음······."

  아르시노에의 딸은 처음의 예상대로 옥타비아누스에게 푹 빠진 게 아니었다.

  드넓은 조카의 방은 아름다운 여성의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실제 크기의 동상까지 떡하니 들여놓았다.

  대상이 바뀐 것만 제외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방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형태였다.

  그 대상은 클레오파트라도 익히 알고 있는 마르쿠스의 장녀 소피아.

  현재 로마에서 가장 존귀한 대우를 받는 살아있는 여신이다.

  딱 들어오자마자 정면에서 보이는 소피아의 그림이 마치 방문자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보면 알겠지만, 꽤 오래됐어. 저 침상 옆에 올려져 있는 작은 조각상 있지? 저건 무려 그리스에서 유명한 조각가에게 직접 의뢰해 완성한 작품이야."

  "잘 알지. 우리 집에도 저런 옥타비아누스의 조각들이 널려 있었거든. 누가 친척 아니랄까 봐 취미가 아주 비슷하네······."

  파라오 후계자 중 한 명은 자신의 이복언니에 푹 빠져있고, 다른 한 명은 그 이복언니의 남편의 추종자다.

  나라 꼴 참 잘 돌아간다는 한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 아이들은 이집트인이라는 정체성이 거의 없을 거야. 아버지는 로마의 신이고 자신들도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랐으니까."

  "그렇긴 하겠지···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너흰 파라오를 이어받을 몸이라고 그렇게나 강조를 했던 건데 이렇게 될 줄은···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네. 옥타비아누스가 남자니까 그렇다 쳐도 왜 같은 여자를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거지?"

  "마르쿠스 님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원래 여성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멋지거나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성에게 푹 빠지는 경향이 있대.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가? 하긴 남자보다는 그런 성향이 더 짙을 수도 있긴 하겠네. 그래도 나보단 네가 좀 더 낫구나. 옥타비아누스보다야 소피아한테 달라붙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응? 그런가? 옥타비아누스도 나쁘지 않잖아. 그 아이가 진지하게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동경심으로 그러는 거니까. 차라리 이성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아?"

  클레오파트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르시노에는 옥타비아누스와 제법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딸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푹 빠져있다는 게 도무지 용납이 되질 않았다.

  차라리 대상이 소피아였다면 그나마 참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 걔는 이상하게 정이 안 가.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진짜 이상하네. 내가 볼 때는 참 괜찮은 사람인데. 예의도 바르고 얼굴도 잘생겼고 능력도 좋고 흠잡을 데가 없지 않아? 괜히 마르쿠스 님이 옛날부터 사윗감으로 찍어뒀겠어?"

  "능력이야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게 정말로 본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걸까? 속으로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잖아."

  "그런 논리라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나쁘게 볼 수 있겠네. 아니면 옥타비아누스가 언니한테 무슨 실례라도 저지른 적 있어?"

  "없어."

  아르시노에가 대놓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냥 언니 기분 탓이네. 사람이 왜 그렇게 배배 꼬였어? 딸이 외간 남자에게 푹 빠진 게 그렇게 아니꼬와?"

  "선후 관계가 틀렸어. 하필 옥타비아누스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이 들러붙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고."

  "진짜 이해가 안 가네···어차피 큰 틀에서 보면 이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잖아. 막연한 느낌 때문에 가족을 싫어하는 건 좀 그렇잖아."

  "말은 잘하네. 어렸을 때는 틈만 나면 서로 헐뜯었던 우애 좋은 가족이 우리 아니었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족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왕가에서 가족들은 친애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다.

  아르시노에는 과거 클레오파트라를 물어뜯는 데 혈안이었던 자신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그땐 파라오라는 자리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랬던 거고. 옥타비아누스와 우리의 관계는 다르잖아?"

  "아, 몰라. 옥타비아누스 걘 그냥 마음에 안 들어. 전생에 원수였을 수도 있지. 걔가 날 죽였다거나 뭐 그런 악연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언니가 주술사의 적성까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통렬한 비꼼이 날아들었어도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해도 어차피 얼굴 볼 일도 그리 많지 않잖아. 우리야 알렉산드리아로 가버리면 끝이니까."

  "언니답지 않게 무른 판단이네. 그러니까 사이를 더 좋게 만들어 놔야 하지 않겠어? 난 솔직히 내 딸이 저러는 게 좀 한심하긴 해도 말릴 생각은 들지 않던데. 소피아 입장에서 동생이 그러면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나쁜 마음이 들지는 않을 거 아냐. 그런 점에서 본다면 훌륭한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그런 생각으로 저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건 그래도 파라오의 후계자로서의 자각이······."

  "파라오는 솔직히 이제 허울만 남은 이름이잖아."

  아르시노에가 뼈아픈 현실을 지적해왔다.

  동생은 결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이는 건 그녀의 성향 탓일 뿐 실제로는 확실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클레오파트라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면모가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단순히 왕족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그게 그녀 나름대로의 생존법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분명 훗날 파라오는 그냥 로마의 이집트 총독 같은 자리로 전락하겠지. 어쩌면 이미 그런 느낌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래도 수천 년을 이어온 파라오의 이름을 맡은 자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져야 하잖아."

  "책임감이라기보다는 미련 아닐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겠지."

  "후···그래. 네 말대로 그게 가장 큰 문제야."

  "당장 그 애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이름을 쓰는 걸 봤어? 우리가 볼 때나 마지못해 그런 이름을 쓰지 이미 걔넨 로마식 이름을 더 자연스럽게 쓰고 있어."

  클레오파트라라고 그걸 모르지 않았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전통대로 받은 자신의 이름을 늘 못마땅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자기가 직접 로마식 이름을 지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명을 뜻하는 라틴어인 비타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아르시노에의 딸 역시 로마에서는 자신을 마르키나라고 자칭하고 다녔다.

  "비타는 무슨 비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친구들 앞에서 클레오파트라나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쓰는 건 부끄러웠나 보지."

  "애초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혈통에게 친구가 무슨··· 아니다. 이런 말을 해봐야 의미가 없겠구나."

  "우리와 이 아이들은 달라. 인정할 수밖에."

  당장 아이들의 방을 둘러보기만 해도 이들은 완벽한 로마인이 된 지 오래였다.

  이집트인의 정체성보다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

  한 번 뿌리를 내린 이 성향은 부모가 뭐라고 한다고 다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어야 할까? 로마식의 교육은 다 크고 난 뒤에나 받으라고 하고."

  "그랬으면 현실감각 하나도 없는 철부지 왕족으로 자랐을지도 모르지. 이집트의 미래엔 그쪽이 더 좋지 않았을 수도 있어."

  "결국 어쩔 수 없었단 소리구나. 어떻게 보면 이것도 다 그 사람이 처음부터 안배해둔 계획일지도 모르겠네."

  "마르쿠스 님의 의도대로라는 거야?"

  "예전부터 생각은 했었어. 우리야 그 아이들을 다음 대의 파라오라고 생각하고 이집트의 왕족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사람도 같은 생각일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마르쿠스는 아마 처음부터 두 딸들을 철저하게 로마화 시키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는 편이 두 사람이 이집트의 권좌에 올랐을 때 제어하기도 훨씬 쉽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더 양질의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하나하나 신경을 써주었던 것 로마화를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으리라.

  "그게 딱히 마르쿠스 님이 잘못한 건 아니잖아? 그분은 로마의 지도자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을 한 거니까."

  "탓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냥 딸이라면 껌뻑 죽는 줄 알았는데 뒤로는 다 나름대로 계획을 짜뒀을 거라는 게 새삼 놀라워서."

  "그랬지. 돌이켜 보면 옥타비아누스나 소피아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여러 번 자리를 만들어 준 것도 마르쿠스 님이었어."

  "진짜로 빈틈이 없는 사람이야."

  가족이라고 해도, 아니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써준 것일 수도 있다.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이후 권력을 책임지게 될 이들이니 두 사람과 사이가 좋아지는 건 딸들의 안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두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집트인인 것보다는 로마인으로 사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더 지속되길 바라는 건 아르시노에의 지적처럼 그냥 미련에 가까웠다.

  파라오라는 이름은 인류사가 시작했을 때부터 찬란하게 빛난 태양과도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도 시간이 지나면 중천에서 내려오는 법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해가 솟아오른다.

  '그럼 로마는 어떨까.'

  로마라는 태양이 이제 한창 올라가고 있는지 상태일지, 이미 정점에 도달했는지, 아니면 이미 내려가는 상태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천 년이 이어지는 나라는 있을 수 있어도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는 것.

  마르쿠스가 과연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을지는 클레오파트라도, 아르시노에도 아직 알 수 없었다.

  < [외전] 클레오파트라의 한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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