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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후계자들 (310/326)

  < [외전] 후계자들 >

  아킬레스는 마르쿠스와 다나에의 아들이자, 스파르타쿠스의 제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힘이 월등하고 학문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스파르타쿠스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그를 가르쳤다.

  해가 지날수록 아킬레스는 강해졌다.

  이제 비슷한 연령대에서는 아예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그는 신분을 숨기고 검투 경기에 출전해 보기도 했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승리를 거둬 수수께끼의 검투사로 상당한 명성을 얻기도 했었다.

  출전 사실을 들킨 뒤 스파르타쿠스에게 제대로 혼이 나 검투 경기는 그만두었지만, 그의 실력 자체는 주변 모두가 알게 됐다.

  아킬레스가 이름의 유래가 된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이름을 떨칠 거라는 말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그래도 스승인 스파르타쿠스가 보기에 아직 그는 배워야 할 게 많고 손이 많이 가는 제자에 불과했다.

  "헉헉···후우······."

  하루 일과가 된 수련을 끝낸 아킬레스는 바닥에 대 자로 뻗어 있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이미 체력을 있는 대로 써서 도무지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승님은···그 연세에도···강하시군요."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네가 미숙한 거다. 이 다 늙은 몸뚱이로는 한 번 밀리는 순간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 테니까."

  "하지만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는걸요. 목검으로 겨룬 거였긴 하지만요."

  "맞추긴 했지. 여기 봐라. 살짝 스쳤잖아."

  스파르타쿠스가 뻗어버린 아킬레스의 옆에 풀썩 앉아 왼팔을 내밀었다.

  반색하며 시선을 옮겼던 아킬레스가 이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치긴 뭐가 스쳤다는 겁니까. 살이 까지지도 않았는데."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스친 자국이 있다니까? 확실히 저번보다는 좀 나아졌구나. 그때는 진짜로 스치지도 못했으니까. 뭐···내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

  아킬레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예전에 스파르타쿠스는 감히 그로서는 싸워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가 아직 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하고 봐도 그때의 스파르타쿠스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강했다.

  그것조차도 전성기보다는 약해진 상태였다고 하니 한창때는 정말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제자가 어떤 심경인지를 짐작한 스승은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넌 충분히 강해지고 있으니까. 같은 연령대로 비교해 보면 나보다도 더 나을 거다."

  "정말입니까?"

  "물론. 게다가 너는 나랑 달리 전략과 전술도 배우고 있으니까 종합적으로 보면 나보다도 훨씬 더 위로 갈 수 있겠지."

  "전략을 수립하는 측면에서 보면 저는 형님만 못합니다."

  "트라야누스는 장기가 그것밖에 없는데 네가 그것마저 걔보다 잘하면 형의 자존심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 정도는 밀려줘야지."

  어렸을 때부터 아킬레스는 이복형인 트라야누스와 사이가 좋았다.

  둘 다 학문보다는 무예에 관심이 높았고, 철학서적 보다는 병서를 읽는 걸 선호했다.

  다만 스파르타쿠스가 탐을 낼 정도의 육체적 재능이 뛰어난 동생과 달리 형쪽은 그다지 몸을 쓰는 데에는 큰 적성이 없었다.

  "그래도 위대한 아우구수트스의 자식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저보다는 형님이겠죠. 아버지께서도 직접 검을 들고 전투를 하신 적은 별로 없으니까요."

  "최고 사령관이 적진 한복판으로 돌격할 일은 거의 없으니까."

  "형님은 그런 점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유형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가장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 누님도 계시고요."

  "부모란 자신과 닮은 자식을 보면 흐뭇해하는 법이지. 그러나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보이는 자식을 봐도 자랑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마찬가지란다.

  나도 처음에는 책만 파고드는 아들 놈이 영 불만족스러웠거든. 그런데 그쪽으로 확실히 성취를 내는 모습을 보이니 이전과는 달리 보이더구나. 내 밑에서도 저렇게 똑똑한 자식이 나올 수 있구나 하면서 감탄이 나오지 뭐냐. 마르쿠스 님도 널 보면 비슷한 생각이실 게다.

  "

  말을 이어가던 스파르타쿠스가 갑자기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기가 막히게 잘 싸우면서도 전략이 출중한 사람이 하나 있었지. 너는 그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누구요? 로마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아니, 로마인이 아니다. 대신 로마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던 대적이었지."

  "아···설마 그 흉노의?"

  "그래. 흉노의 천태선우. 이름이 바야투르였나? 아주 징글징글한 놈이었어. 내가 한창때 싸웠다면 조금 더 위였을 것 같은데 그때는 기량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을 때였던지라 나도 똥줄 좀 탔지."

  흉노에 관한 이야기는 아킬레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킬레스만이 아니다.

  로마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게르마니아와 갈리아를 불태우고 그리스에서 로마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사상 최대의 강적.

  이탈리아 본토에 직접 발을 들여놓은 한니발과는 달랐지만, 흉노의 위협을 훨씬 더 크게 서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야 그 흉노를 때려 부순 마르쿠스와 카이사르의 업적이 더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적이라고는 해도 결국 아버지에게 패배한 자가 아닙니까."

  "그건 로마군이 흉노군보다 훨씬 더 우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바야투르가 마르쿠스 님보다 뛰어나단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하지만 개인의 무력도 나와 견줄만했으면서 그 대군을 자유자재로 이끌던 그자의 능력은 충분히 경의를 받을 만하다. 그러니까 그 유목민족들을 모조리 통합하면서 로마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올 수 있었겠지."

  "흉노···바야투르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어라? 이전에 이야기해줬을 때는 시큰둥하게 듣지 않았더냐."

  "그땐 지금처럼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잖아요."

  적진을 종회무진 누비며 아군 병력을 통솔하는 방식.

  이건 분명 로마의 정석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떨어진 전법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자신이 가진 강점이 극대화되려면 이런 쪽으로 연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바야투르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건 하늘의 인도일지도 모른다.

  흉노와 그들을 이끌던 천태선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이름이 한창 성장하고 있는 소년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

  수련을 끝마친 아킬레스는 깨끗하게 몸을 씻고 의복을 갖춰 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녁 시간까지 스파르타쿠스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오늘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누나와 형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

  "아, 스승님이랑 이야기를 조금 하느라고."

  부랴부랴 자리에 앉은 아킬레스에게 트라야누스가 커피잔을 건넸다.

  "내가 직접 내린 거야. 조금 더 산미가 나는 맛으로 해봤는데 어때?"

  "괜찮은데? 그런데 누나는?"

  "잠깐 아버지를 보고 온다고 했어. 이제 곧 올 거야."

  "미안~! 내가 좀 늦었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녀 소피아가 호들갑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마주 보고 있는 트라야누스와 아킬레스의 중간 위치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뒤를 따라온 옥타비아누스는 자리에 앉지 않고 소피아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 하셨어?"

  "그냥 평상시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

  "진짜? 그러려고 일부러 누나를 따로 불렀다고?"

  "물론 다른 이야기도 했지. 저번에 말씀하셨던 것의 반복이기는 했지만. 내가 말했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거라고."

  트라야누스가 미심쩍은 얼굴로 재차 반문했다.

  "진짜로 우리끼리 그런 걸 논의해도 된다고? 혹시라도 문제가 되면 누나가 책임질 거야?"

  "그렇다니까. 너는 가끔 보면 너무 결단력이 없어. 자신이 책임자가 되기는 싫다는 그 태도도 좀 바꿀 필요가 있고."

  "그건···많이 지적받았던 사실이기는 한데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논의를 하는 건 그렇다 쳐도 아킬레스도 같이하는 건가?"

  "왜. 얘도 엄연히 우리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한 우리 동생이짆아. 물론 얼마 뒤면 동방으로 가버리니까 계속 참여하는 건 무리겠지만."

  소피아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아킬레스 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동방으로 가려고 하는 거니? 사관학교라면 로마에 있는 곳을 가도 되잖아. 트라야누스처럼."

  "스승님이 그쪽으로 발령을 받으셨으니 저도 따라가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래도 로마에 있는 쪽이 더 낫지 않아? 네 교육상 그쪽이 더 나을 거 같으니 스파르타쿠스 아저씨도 그냥 로마에 자리를 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드려 볼까?"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스승님은 로마보다는 동방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시거든요. 저도 오랜만에 돌아가 보고 싶기도 하고요."

  "네 생각이 그렇다면 뭐라고 더 말하지 않을게."

  소피아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끊었다.

  배다른 형제, 자매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아킬레스를 전혀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아킬레스가 율리우스-리키니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두 사람의 도움이 컸다.

  원래 최고 권력자의 밑에서 난 이복형제들은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하지만 세 사람은 예외였다.

  아마 소피아와 트라야누스의 위치가 그만큼 확고한 덕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는 건 아킬레스 본인의 문제였다.

  아무래도 친자식임에도 양자로서 가문에 들어온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가 소피아에게 엄청난 타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되도록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중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분위기를 전환 시키려는 듯 트라야누스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논의를 시작해보자. 첫 주제가 뭐였지? 사타바하나의 차기 후계구도 문제였나?"

  "맞아. 오랜 내부공작이 결실을 맺어서 그쪽은 이제 후계구도의 계승을 앞두고 내란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야. 사타바하나의 추락을 야기한 왕자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거든."

  "그러데 이건 아버지께서 결정하셔야 할 문제 아닌가? 이렇게 중대한 일을 우리보고 논의해 보라는 건 조금······."

  "우리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게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의견엘 제기해 보라는 거겠지. 즉, 간단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우리의 실력을 가늠해 보려고 하시는 거야. 이제 우리도 나이가 어느 정도 찼으니까."

  트라야누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역력해졌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옥타비아누스가 소피아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우구스투스께서는 여러분들이 자격을 갖추시길 원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 그리고 많은 권한을 받았을 때 어떻게 나오려는지도 보시려는 거겠지. 너무 쫄보처럼 굴어서도 안 되고 왕이 된 것 마냥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해서도 안 돼. 어디까지나 이건 시험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알았어. 그러면 누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거야? 역시 로마에 반항적이었던 스와티를 실각시키는 쪽으로 가야겠지?"

  "글쎄······."

  생글생글 웃던 소피아가 눈가를 가늘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마냥 상냥하기만 했던 누나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변해가고 있다.

  왠지 모르게 낯선 누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킬레스는 왠지 모르게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만 같았다.

  < [외전] 후계자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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