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후계자들 (311/326)

  < [외전] 후계자들 >

  남매들의 대화는 늦은 밤이 돼서야 끝났다.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들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킬레스는 두 사람과 따로 떨어져 상념에 잠긴 채 집으로 향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회의가 길어진 탓인지 이미 주변은 어둑해져 있었다.

  그래도 어두운 거리를 홀로 걷는 건 아킬레스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부근은 주기적으로 순찰을 하는 장소라 위험할 일 따위도 없었고, 설령 불한당들이 배회한다고 해도 아킬레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킬레스의 속마음은 깜깜한 주변보다도 더욱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 계속 있는다고 내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을까.'

  이번 회의에서 아킬레스는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

  소피아와 트라야누스가 그를 배제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피아는 지속적으로 아킬레스의 의견을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던 건 단순히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첫 주제였던 사타바하나의 후계 계승 문제부터 소피아는 아무런 막힘이 없었다.

  분명히 옥타비아누스와 사전에 논의를 했던 게 틀림없었다.

  여기에 트라야누스까지 말을 보태니 아킬레스가 끼어들 틈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애초에 그의 두뇌로는 소피아나 옥타비아누스 이상의 방안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실제로 사타바하나를 어떻게 할지는 소피아가 냈던 의견이 그대로 채택됐다.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쪽은 내 분야가 아니니까.'

  머리로는 두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딱히 그것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재능에 있다.

  전장에서 말을 타고 적군에 돌격해 적군을 유린하는 것.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없었다.

  물론 이대로 간다면 결국 인도에서 무력 충돌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설령 그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아킬레스에게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저택까지 도착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하인이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이제 오셨습니까? 주인마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다. 바로 가지."

  주인마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이 저택에서는 한 명밖에 없다.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다나에다.

  그녀가 부르면 꼭두새벽이라고 해도 바로 달려갈 정도로 그의 효심은 지극했다.

  다나에의 거처는 로마에서 알아주는 부자들의 집과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는 호화 저택이었다.

  아킬레스는 어머니의 방이 아니라 자택 앞에 있는 커다란 정원으로 안내받았다.

  8년 전, 마르쿠스가 다나에에게 선물했던 그녀의 개인 정원이었다.

  "이제 왔니? 조금 늦었구나."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도 다나에는 미인이었다.

  그 어떤 로마의 귀족 여인들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미태.

  행동과 말투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기품도 세월이 갈수록 더 진해졌다.

  "생각할 게 많아서 걸어왔습니다."

  "소피아나 트라야누스와 무슨 문제가 생겼던 건 아니고?"

  "아닙니다. 제가 누님이나 형님과 문제를 일으킬만한 입장이 아닌데요."

  "아니면 혹시 널 따돌린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주눅 들지 않도록 언제나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있어요.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쭉 그랬다는 걸."

  다나에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말처럼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당연히 집안에서 아킬레스는 소피아나 트라야누스에 비해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걸 잘 알고 있었던 소피아는 혹여나 이복동생이 주눅이 들까 봐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아킬레스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렸던 하인 한 명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린 적도 있었다.

  다나에는 그런 장녀의 마음 씀씀이에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무엇을 고민 중인 거니? 딱히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최근에 부쩍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란다."

  어머니의 예리한 안목은 피할 수 없다.

  한평생을 쭉 마르쿠스의 옆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빛은 어렸을 때부터 별다른 생각 없이 호강에 겨워 살았던 귀족가의 안주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냥 제 자격지심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누님이나 형님이 저를 잘 대해준다고 해도 저는 두 사람과는 다릅니다. 제가 과연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될까···그런 생각이 요새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너도 동방으로 넙죽 가겠다고 했던 거로구나."

  아킬레스는 더 부정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확신에 가까운 불안감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나왔다.

  "누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동정심인지, 아니면 정말로 순수한 가족애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솔직히 말하면 둘 다이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만."

  "소피아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알면 상처받지 않을까?"

  "그렇겠죠. 누님께서는 아마 제게 더 잘해줬어야 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그 마음은 분명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심 없이 잘해줄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점도 부정은 할 수 없을 겁니다."

  고민이 깊어지는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아킬레스의 입장은 이복 남매들과는 달랐다.

  같은 마르쿠스의 자식이라고 해도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완벽한 율리우스-리키니우스 가의 혈통이다.

  현재 로마에서 마르쿠스와 카이사르의 피를 그대로 받은 사람들은 이 둘밖에 없었다.

  아킬레스는 가문에 입양되기는 했어도 카이사르의 가계와는 아예 접점이 없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딸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두 사람은 이집트라는 자신들의 확고한 기반이 있으니 사정이 다르다.

  "지금이야 제가 아무런 연줄도, 배경도 없으니 문제가 되지 않겠죠. 아, 물론 누님이 나중에 최고 권력자가 된다고 해도 절 완전히 홀대하거나 하진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는 분명히 한계선이 그이겠죠. 그 이상 넘어가는 건 분란의 여지만 조장할 테니까요."

  "네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너 역시 그 사람의 핏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만······."

  다나에도 아들이 품은 고민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킬레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피아는커녕 트라야누스 이상으로도 올라갈 수 없을 거란 게 현실이다.

  사실 어느 정도의 실권이라도 쥐어 준다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인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 또 많은 피가 흐르게 되겠구나."

  "오늘 확실히 알았습니다. 누님은 기본적으로 선한 성품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마냥 유화정책만 필 나약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쩌면 옥타비아누스 님의 영향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이후로도 로마의 방침은 지금과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이미 그런 쪽으로 후계자들을 훈련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거니? 그 전쟁에 참가해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선보이려고? 나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구나. 동방의 사관학교에서 능력을 갈고닦는다면 분명히 다가올 전쟁에서도 대활약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면 방금 전 말대로 너의 지위가 오히려 애매해질 수도 있단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보려고요."

  어지럽게 뒤섞여 있던 생각은 이미 거의 다 정리되었다.

  지금의 대화는 그걸 확실히 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결국, 지금 느끼고 있는 답답함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지 않는 한 풀리지 않는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던 숙명의 끈들을 풀어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할 이야기가 있다고?"

  "어머니께 들으셨습니까?"

  "그래. 네가 고민이 많은 것 같으니 좀 들어달라는 부탁을 하더구나. 그런 부탁을 하는 법은 좀처럼 없어서 바로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거다."

  마르쿠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각별하게 사랑했다.

  아킬레스가 품고 있는 내적갈등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르쿠스가 그걸 나서서 어떻게 해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소피아나 트라야누스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예상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마르쿠스가 조금이라도 아킬레스를 편애한다는 인상을 주는 건 자식의 미래에 하나도 득이 될 게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철칙을 잘 지키고 있었기에 이복 남매들 간의 사이가 지금까지도 괜찮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저번에 저희가 토론했던 회의의 보고서는 받으셨습니까?"

  "안 그래도 오늘 아침 옥타비아누스가 보고서를 올렸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더구나. 잘했다."

  "전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의 다 누님께서 하셨죠."

  "혹시 네가 품고 있다는 고민이 그것과 관련된 것이냐?"

  과연 마르쿠스는 혜안이 대단했다.

  아킬레스의 미묘한 표정 변화와 어조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어 본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말을 빙빙 돌릴 필요가 없다.

  아킬레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생각해둔 결론을 입에 담았다.

  "사타바하나와 전쟁이 벌어지면 저를 군단장으로 삼아주십시오."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싶단 뜻이냐?"

  "지금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건 최소로 잡아도 몇 년은 더 뒤의 일이겠죠. 저는 그동안 동방에서 실력을 갈고닦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때가 된다면 제가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마르쿠스는 곧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평상시 아들이 경험하는 모의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재수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고 해도 생명을 잃을 위험이 언제나 존재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 친자식을 보내는 건 누구라고 해도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후방에서 지휘만 하는 위치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킬레스는 그런 타입의 지휘관이 아니다.

  마르쿠스는 아들의 성향과 전술의 성취도를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로마군의 수준은 사타바하나와는 격이 다를 정도로 뛰어난 건 맞다. 병기는 물론 전략과 전술, 그리고 종합적인 체계도 비교가 안 되지.

  하지만 그렇다고 위협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제아무리 강철로 몸을 보호한다고 해도 말에서 낙마할 수도 있고, 코끼리의 발에 깔리면 즉사를 면할 수 없을 거다. 솔직히 말해서 난 별로 허락해주고 싶지가 않구나. 네가 스파르타쿠스처럼 돌격하는 게 아니라 후방 지휘를 할 거라고 약속해주면 모르겠지만.

  "

  "만약 그렇게 죽는다면 전 그것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겠죠. 아버지, 전 전쟁을 얕보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죽는 건 무섭고 죽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진짜로 무서운 건 전쟁이 아닙니다. 전 전장에서 숨을 거두는 것보다도 더욱 두려운 게 있습니다."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

  "이대로 로마에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천천히 마모되는 겁니다. 아무리 힘을 키우고 실력을 끌어올려도 제대로 된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끝날까 봐 두렵습니다."

  마르쿠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일말의 씁쓸함과 안타까움이었다.

  그러고 어째서 아들의 심경을 모르겠는가.

  "나도 네 바람을 들어주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설령 군단을 이끌고 엄청난 활약을 거둔다고 해도···그건 순간의 갈증만을 풀어줄 뿐 나중에는 너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단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인정을 받고 싶은 대상은 누님이나 형님이 아닌 아버지니까요."

  "하지만 넌 앞으로 내가 아닌 그 두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

  이번에는 아킬레스가 바로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쉰 그는 결단이 선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전보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버지에게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고 한 이유는 지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제가 그럴 만한 능력이 된다고 판단하신다면 저에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게 무슨······."

  "로마의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누님과 형님에게도 폐를 끼칠 마음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약간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동안 쭉 품고 있었던 비밀스러운 갈망을 드디어 털어놓았다.

  "제 발로 로마를 떠나겠습니다."

  < [외전] 후계자들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