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후계자들 (312/326)

  < [외전] 후계자들 >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근래들어 점점 더 자주 만남을 가졌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럴 때마다 그림자처럼 소피아의 등 뒤를 지켰다.

  동방으로 건너 간 아킬레스가 마르쿠스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소피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트라야누스는 이게 신경이 쓰이는 듯 보였다.

  "누나가 아버지한테 물어보면 안 돼?"

  "궁금하면 네가 물어 봐. 왜 나한테 떠넘겨?"

  "그거야 아버지는 누나를 제일 좋아하잖아. 내가 물어보면 괜히 혼나기만 할 질문도 누나가 물어보면 흔쾌히 답해주시지 않을까?"

  "남에게 떠넘기는 그런 태도만 버려도 아버지도 널 훨씬 더 높게 평가하실 걸."

  소피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몇 번이나 지적을 했는데 동생의 저 심약한 면은 바뀌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니, 요새는 오히려 점점 뻔뻔해지는 것도 같았다.

  "어차피 누나가 알아서 다 해줄 텐데 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어휴···이런 놈이 내 동생이라고. 동생만 아니었어도······.'

  보통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다면 전의를 불태우거나 능력을 증명해 보일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생은 오히려 쾌재를 부르며 대부분의 힘든 일들을 모조리 자신에게 떠넘겨 버렸다.

  그리고는 원래부터 좋아했던 군사 관련 업무만 처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또 호기심이 없다거나 한 건 아니다.

  뭔가 궁금한 게 있다거나 알고 싶어하는 건 전부 자신에게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오냐오냐 예뻐해서 그래. 버릇을 잘못 들였어, 버릇을······.'

  동생을 이렇게 의존적으로 만든 데에는 엄밀히 말하면 소피아의 책임도 있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무언가를 배우면 소피아는 언제나 동생보다 우월했다.

  트라야누스가 자신감을 보이는 군사적인 전략에서조차 소피아가 딱히 뒤지는 건 아니었다.

  가정교사들도, 주변사람들도, 심지어 부모님들조차 누가 더 뛰어난 사람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소피아는 동생이 상처받지 않도록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 배려해주고 돌봐주었다.

  그게 너무 지나쳤기 때문일까.

  동생은 툭하면 어려운 결정을 누나에게 미뤘고 뭐든지 의존하기 일쑤였다.

  입에 딱지가 앉도록 지적을 했지만 이미 굳어진 성격은 어쩔 도리가 없다.

  "넌 심각하게 한 번 고민해 봐야 해. 나중에 전쟁에 나가면 어쩔래? 그때도 나한테 네가 세운 전략이 맞는지 물어볼 거야?"

  "누나가 따라오면 누나가 지휘하면 되지 않나? 나는 옆에서 조언만 해주는 거지. 참모처럼."

  "참모가 필요하면 아그리파를 데려가면 되지 내가 왜 굳이 널 데리고 가겠니······."

  소피아가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트라야누스는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가 저랬을까 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아~그 녀석이 있었지. 걔 어때? 사관학교 해당기수 최고 성적이라고 들었는데."

  "전 과목에서 역대 최고 점수로 수료. 그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았지. 아주 우수한 인재야."

  "하긴 그러니까 아버지가 직접 누나한테 붙여줬겠지. 사타바하나와 전쟁이 벌어지면 그 녀석도 데려갈 거지?"

  "물론. 아그리파만큼 그 신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은 로마에 몇 없으니까."

  사타바하나와 전쟁을 한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소피아는 물론 트라야누스도, 동방으로 가버린 아킬레스조차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스와티 왕자가 우리한테 붙을까?"

  "아직도 그 소리야?"

  "아니···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스와티가 지금 같은 꼴이 된 이유는 결과적으로 로마 때문이잖아. 그리고 그 반대편은 로마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고. 상식적으로 스와티가 아니라 반대편과 접촉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것도 내가 설명을 해줬잖니. 너 설마 정말로 스와티를 반대하는 세력이 우리 로마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찬동한다고 생각해?"

  트라야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긴 잘 모르겠으니 설명해달라는 자세였다.

  "스와티도 딱히 로마에 엄청난 악감정이 있어서 우릴 건드렸던 건 아니야. 단지 뜯어먹을 구석이 있다고 오판했을 뿐이지. 지금은 그 대가를 너무 가혹하게 치러서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맞아.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은 우리를 엄청 증오하고 있을 게 뻔하잖아."

  "조용히 하고 좀 들어. 스와티가 로마를 증오하는 이유는 반석 같았던 자신의 지위가 흔들렸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신도 이대로 가면 왕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을 걸? 이미 국내 세력만 놓고 봐도 자신들의 반대파가 더 커진 상황이고 그들의 뒤에는 로마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서 위기에 빠져 있는 왕자에게 이쪽이 손을 내밀어 준다고? 그걸 믿을까?"

  "스와티의 성격에 관해서는 이미 다 조사를 해뒀어. 왕의 자리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야. 게다가 점점 더 그 자리가 멀어지고 있는만큼 집착도 심해지고 있고. 내가 손을 내민다면 아마 발이라도 핥으려고 할 걸?"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농담에 가까웠지만 전체적으로 틀린 말은 없었다.

  이대로 흐름에 맡긴다면 사타바하나의 차기 왕은 스와티의 반대 진영이 미는 인물로 낙점될 게 뻔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양쪽 모두가 알고 있었다.

  "스와티 반대파는 결국 친 로마 세력이잖아. 이들을 밀어주는 게 내부 장악이라는 측면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아?"

  "동생아, 그들이 진짜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라면 그렇겠지. 그 명석한 머리로 생각이라는 걸 좀 해보렴. 그들이 정말로 로마에 호의적이라 친로마를 자처한다고 생각하니?"

  "······아, 그렇구나. 친로마파라는 건 그냥 입지가 불안정한 스와티를 몰아내가 위한 표면적인 위장에 불과하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사타바하나에서 진짜 친로마파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아버지의 심복인 타디우스가 만든 북인도주식회사의 입김이 닿는 사람들뿐이야.

  친로마파라고 주장하는 놈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로마의 이름을 팔아서 스와티를 몰아내고 허수아비 왕을 세우자. 어차피 로마 놈들이야 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적당히 숙여주는 척만 하면 되겠지.' 라고.

  "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소피아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세력의 균형은 7대 3 정도로 반 스와티 파에게 기울어져 있어. 절박한 사람일수록 도와줬을 때 많은 걸 뜯어낼 수 있는 법이야."

  "한 가지 더 있잖아. 이번 전쟁을 통해서 신무기를 실험하고 로마의 힘을 과시할 의도지?"

  "그래. 스와티가 품고 있는 로마에 대한 악감정을 감히 드러내지도 못할 정도의 큰 충격을 줄 거야. 그리고 지금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자칭 친 로마파를 쓸어버리고 진짜배기 친 로마파로 그 자리를 채워두는 작업도 해야겠지."

  "누나와 내가 직접 가기로 결정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전후 처리를 해야하니까?"

  "그것도 있고 스와티의 경계심을 풀어줄 의도 때문이기도 해. 아무래도 스와티는 아버지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스와티의 태도에 따라서 충분히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구슬리기도 쉽지 않겠어?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관계로 시작해보자는 거지."

  이 방안은 마르쿠스도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트라야누스도 이제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딱 하나 남았다.

  "아킬레스가 아버지에게 뭔가를 부탁한 것도 다가올 전쟁과 관련이 있는 건가?"

  "또 그 얘기야?"

  "솔직히 말해서 누나는 안 궁금해? 걔 요새 부쩍 고민이 많아 보였잖아. 그렇게 혼자 끙끙 앓더니 아버지와 면담을 하고 바로 동방으로 가버렸다고.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 줄 알고. 혹시 사타바하나를 점령하면 그쪽의 총독으로 자신을 보내달라고 한 걸까?

  그래서 동방에 가서 미리미리 영향력을 키워두려고 한 거라면 설명이 되잖아.

  "

  "글쎄···사타바하나를 속주로 삼을 예정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타바하나의 왕을 스와티로 세울 거라는 건 아버지도 동의하신 내용이야. 그럴 가능성은 없어. 그리고 아킬레스가 전쟁에 참가할 거라는 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항······."

  설명을 이어가던 소피아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과일이 한가득 쌓여있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쟁에 참여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제 아무리 통찰력이 남다른 소피아라고 해도 동생이 로마를 떠날 마음을 먹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번 전쟁에서 아킬레스가 두각을 드러내면 그를 어떤 자리에 추천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건 트라야누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이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괜히 옆에서 그들을 흔들 간신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할 뿐이었다.

  가진 사람은 가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건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태생적인 입장의 차이가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가문의 정통 후계자였던 두 사람에게 로마 밖으로 나간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노력하면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는 게 허락됐다.

  트라야누스가 소피아에게 밀린 건 순전히 그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태도 때문이었다.

  아킬레스는 달랐다.

  그는 열 살도 되기 전에 자신이 누나나 형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였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소피아는 동생이 능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타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누나와 형을 잘 둔 덕을 보며 로마에서 호의호식하며 평생을 생각없이 놀기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그런 삶을 견딜 수 없었다.

  넘치는 힘과 지혜를 원없이 쏟아부을 장소가 필요했다.

  설령 자신이 품은 열정에 몸이 불타 없어질지라도, 무력감에 썩어문드러지는 인생보다는 한 줌의 재가 되가 되는 그런 삶을 더 바랐다.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누나, 만약 아킬레스가 사타바하나와의 전쟁에 참가해 공을 세운다면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중용해 줘야지. 그래도 꽤나 시끄러워질 수도 있어서 조금 방안을 생각해 봐야겠어. 그런데 그냥 내가 넘겨짚었을 가능성도 있어. 아킬레스가 정말로 전쟁에 참가하길 원했다면 아버지가 나한테 말해줬을 거야."

  "하긴 그렇긴 해. 누나에게 대책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겠지."

  사실 아킬레스가 아무리 두각을 나타내도 소피아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능력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그녀의 옆에는 이미 옥타비우스와 아그리파라는 능력자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트라야누스의 경우에는 약간이나마 동생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정통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몫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민감한 문제를 아버지가 사전에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킬레스가 정말로 전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출세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냈다면 분명이 어떤 언질이 있었어야 한다.

  아버지가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지는 않을 터.

  "앞으로 좀 더 알아봐야겠네."

  "그냥 아버지한테 대놓고 물어보자니까?"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 못해. 어쩌면 아버지가 날 시험해보는 걸 수도 있고."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찾아오는 이때, 로마는 사타바하나와의 전쟁을 확정 짓고 준비를 시작했다.

  마르쿠스의 재능을 물려받은 후계자들의 길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조용히 갈라지고 있었다.

  < [외전] 후계자들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