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마르스의 분노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해가 두 번이 바뀌고 다시 또 한해가 지나갈 때까지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그저 태평성대라고 생각했겠지만, 물밑에서는 이미 준비가 다 끝나있었다.
사타바하나의 혼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년 전부터 촉발된 갈등은 점점 내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드넓은 국토가 전란의 화마에 휩싸였다.
선대 왕의 죽음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스와티 왕자는 자신만이 유일한 사타바하나의 정통 후계자라 주장하며 사타바하나의 삼라트에 오를 것을 천명했다.
반대파들은 당연히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그릇된 판단으로 국가의 미래를 망친 자를 어찌 삼라트로 모실 수 있겠는가!"
그들의 주장에는 명분이 있었다.
로마가 스와티 왕자의 집권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말도 뒤따랐다.
그렇다고 포기할 왕자가 아니었다.
스와티는 그동안 키운 자신의 병사들까지 동원해 수도를 장악하기 위해 나섰다.
이를 미리 알고 있었던 반대파 역시 즉각 반격을 꾀했다.
결국 수도 한복판에서 수만의 군사들이 얽혀 싸우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스와티의 세력은 이길 수 없었다.
이미 대세는 반대파에게 넘어가 있었고 그는 군사적인 재능이 특출난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계속 밀린 끝에 서쪽으로 계속 밀려난 그에게는 미래가 없어 보였다.
있는 대로 병력을 끌어모았어도 이미 7대 3 이상으로 전력 차가 벌어졌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스와티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내전을 일으킨 이상 항복한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할 확률은 낮았다.
자신에게 남은 결말은 반란죄로 처형당하든가, 아니면 시골 벽지에서 암살이나 독살당하는 것뿐이리라.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길은 기적을 바라고 최후의 일전에 임하는 것뿐이다.
병사들이 따라줄지 의문이었으나 남은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싸우려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북인도주식회사를 통해 로마의 사신이 그에게 접촉해왔다.
자신을 마르쿠스의 후계자라고 칭한 그녀의 제안은 간결했다.
<왕으로 만들어 줄 테니 로마에 충성을 바쳐라. 그리하면 너의 안전은 물론 자치권까지 보장해주겠다.>
일 년 전만 하더라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제안이다.
스와티는 로마가 미웠다.
대체 누구 때문에 자신이 이 꼴이 됐는데 이제 와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스와티는 로마에서 온 서신을 바로 찢어버리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과는 반대로 상세한 조건을 좀 더 제시해달라는 요청까지 건넸다.
감정과는 다르게 이성은 이미 소피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내전에서 지면 자신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도 전부 죽는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짊어진 자로서 부하들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결코 왕의 자리만이 목적이라서가 아니다.
게다가 이 서신을 보낸 사람은 마르쿠스가 아닌 그의 후계자라 했다.
마르쿠스에게는 원한이 있어도 그 후계자와까지 얼굴을 붉힐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끊임없이 합리화를 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충성을 맹세하라는 건 굴욕 중의 굴욕이었으나 한 번 무릎을 꿇는 걸로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남는 장사도 없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그냥 전부 죽는다.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법.
스와티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을 둘러싼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게 무섭게 로마는 내전을 중재하겠다는 명목으로 공식 선언문을 냈다.
<사타바하나에서 일어나는 분란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로마 상인들과 시민권자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즉각 무력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 로마는 자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군단을 파병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반대파들도 예상한 내용이었으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내용들이 뒤따랐다.
<사타바하나의 왕은 정통성을 갖춘 스와티 왕자가 오르는 게 합리적이다. 이를 반대할 어떤 이유도, 명분도 찾아볼 수 없다.>
반 스와티 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던 흐름에 균열이 생겼다.
친로마파를 자처하던 이들은 로마가 대놓고 스와티를 옹호하자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부랴부랴 로마와 협상에 임하려 했지만, 로마의 주장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스와티 왕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완전한 자치권을 돌려준다?
말은 좋다.
그러나 스와티가 삼라트가 된다면 자신을 겁박한 반대파들을 가만 놔두겠는가.
로마라는 배경을 등에 업었으니 어떻게 힘을 휘두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건 로마에게도 유리한 흐름이었다.
스와티의 측근들은 소수에 불과했으니 나라 구석구석까지 자신의 수족으로만 채우는 건 불가능하다.
자연스럽게 로마의 입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칭 친로마파는 로마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사타바하나를 자신들의 속국으로 전락시킬 계획인 게 틀림없다.
자칭 친로마파는 한순간에 반로마파로 탈바꿈했다.
반면 반로마파의 선봉장이던 스와티는 삽시간에 친로마파의 기수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 웃을 수 없는 흐름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
전쟁의 때가 임박했다.
※※※
스와티가 로마의 편에 붙은 지 삼 개월 뒤.
그의 군대는 항구에서 엄청난 수의 군단을 맞이했다.
로마의 친구로 공표된 스와티를 지원하기 위해 온 8개 군단.
수는 무려 5만에 달한다.
스와티가 이끄는 3만의 군대를 더하면 총 전력은 8만에 육박했다.
적군의 수는 10만에 가까웠지만 스와티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로마 군단의 무서움은 이미 이전 전쟁에서 증명된 바 있다.
스와티 군의 조력이 없더라도 5만의 로마군만이 10만의 적을 간단히 박살 낼 것이다.
적이었을 때는 그토록 증오스러웠으나 아군이 되니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음직스럽다.
스와티는 자신이 직접 총사령관의 막사로 들어가 감사를 표했다.
"과거에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저를 이토록 지지해주신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사타바하나는 로마의 진실된 우방국으로서 온 마음을 다해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과거에 매몰되어 있어서는 사람도, 국가도 발전을 할 수 없는 법. 앞으로는 미래를 바라보고 건설적인 관계를 다질 수 있도록 노력하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온 하대에도 스와티는 별다른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서 정면을 바라보니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젊은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 앉아 있었으며, 두 사람의 측면도 그리 나이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은 젊은이들이 서 있었다.
앉아 있는 두 사람은 마르쿠스의 자식들인 소피아와 트라야누스.
그리고 두 사람의 옆에 서 있는 이들은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였다.
'로마는 이번 전쟁을 후계자들에게 먹일 경험치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오죽 자신이 있었으면 귀하디 귀한 마르쿠스의 직계를 전부 다 내보냈을까.
스와티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마르쿠스는 자식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려는 목적 외에도 한 가지 더 노리는 게 있었다.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마르쿠스의 자식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전과를 남길 의무가 있었다.
물론 전쟁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위험과 변수를 동반한다.
그래서 로마군은 만일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휘관들을 안전하게 후퇴시킬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두었다.
명목상 총사령관은 소피아였지만 그녀가 이끄는 군단의 실제 지휘는 아그리파가 맡는다.
트라야누스 역시 혹여라도 실수해도 수습할 수 있도록 수레나스가 뒤를 봐주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가 군단을 총지휘하게 될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야 전쟁에서는 원래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전후 처리 과정을 위해 따라왔다.
사관학교를 막 졸업한 아킬레스는 사전에 부탁한 대로 1개 군단의 지휘권을 얻어 구석에서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로마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스와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 그럼 슬슬 절차를 시작해볼까."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스와티의 귓가에 소피아의 엄숙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실제로는 몇 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스와티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충성의 맹세를 하기로 했을 텐데?"
트라야누스가 나지막하게 재촉하자 스와티는 천천히 소피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역사상 다시 없을 굴욕이지만 피할 수 없는 절차였다.
사타바하나의 차기 왕이 로마의 차기 지배자의 앞에 충성을 맹세한다.
이 확실한 관계 정립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로마는 결코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전군이 보는 앞에서 이런 의식을 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로마는 충분히 배려해준 셈이다.
스와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무릎을 꿇었다.
"사타바하나의 왕자 스와티는 위대한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와 그의 후계자에게 변함없는 존경과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옳은 결단이다. 우리의 치세 아래에서 그대와 그대를 따르는 백성들은 항구적인 번영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위대한 아우구수투스의 대리인으로서 약속하겠노라."
"···자치권을 보장해주시겠다는 약속은 유효하다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사타바하나는 그대의 나라다. 좋을 대로 통치하도록. 단, 로마의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한다면 제재를 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만큼은 유념해줬으면 하는군,"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스와티는 굴욕으로 점철되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자신을 다잡았다.
한순간 자존심을 굽히고 실리를 취했다면 싸게 먹힌 것이다.
이번 거래로 로마가 뭔가 원하는 바를 얻었다고 해도, 그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
일방적으로 손해만 본 게 아니다.
로마가 자신을 이용하려는 만큼 자신 역시 로마를 이용하면 된다.
앞으로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국정에 임해야만 했다.
이전처럼 한순간의 욕망이나 혈기로 그릇된 판단을 내리면 받아들 결과는 파멸뿐이리라.
"그럼······."
트라야누스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그리파가 커다란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이곳에 오자마자 조사는 끝내두었습니다. 적은 병력을 나누지 않고 10만의 군대를 한곳에 집결시켜두고 있습니다. 아마 회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겠죠."
"우리를 상대로 또다시 회전을 벌인다고?"
"소수 교전으로 가면 이쪽의 아퀼라누스를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겠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사타바하나는 이미 한 차례 로마의 최고전력인 판금갑옷 중장기병들의 위력을 맛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스와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사타바하나는 줄곧 기병의 돌파력을 저지할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코끼리 병이 로마군에 크게 위협을 주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로마의 주력에 큰 피해를 입지 않을 방법을 강구한 것이죠."
"그래서 좋은 방법은 나왔습니까?"
"우선 동수의 정면 대결로는 절대로 승산이 없다는 게 결론이었습니다. 기병들이 돌격할 수 없도록 전방에 장애물을 설치하거나 송곳을 뿌려두는 방법도 나왔지만 그거야 회피하면 그만이니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지요.
일단 책사들은 이쪽의 피해가 전혀 없이 중 장기병을 무력화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최대한 밀집시켜서 기병의 돌파력을 약화시킨 뒤, 전열이 뚫리는 사이 측면에서 공격해 낙마를 유도한다든가, 아니면 방패를 든 창병들을 고슴도치처럼 배치해 아예 돌파를 허용하지 않는다든가 ···이 방식은 서역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어쨌든 결론은 기병의 먹잇감이 되지 않게 최대한 뭉쳐있는 걸 전제로 하는군요."
아그리파의 간결한 정리에 스와티는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들의 주력을 철저히 분석 당했다는 말에도 아그리파나 트라야누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밀집대형 따위로는 자신들의 기병을 막을 수 없다는 절대적인 자신감 때문일까?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트라야누스는 아예 희미하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적들이 알아서 뭉쳐준다면 적중률이 기가 막히게 올라가겠군요.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겠는데요."
"그러네. 첫 실전에서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릴 수 있겠어. 아그리파, 병사들의 준비는 완벽하겠지?"
"물론입니다. 어디까지나 실전이 처음일 뿐 모의 훈련은 이미 수십 차례를 넘게 한 정예들입니다."
"좋아. 그러면 기대하도록 하지. 스와티 왕자?"
"아, 네."
소피아의 시선을 받은 스와티가 자세를 바로 하고 어깨를 폈다.
"그대는 놀라거나 도망가는 병사들을 관리하는 데 힘쓰도록. 그리고 우리 신호에 맞춰서 공격해주시기만 하면 그걸로 그대의 역할은 끝이네."
"아, 예. 도주하는 적들을 공격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소피아가 탁자 쪽으로 상체를 끌어당기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대의 병사들이 놀라서 도망가지 않도록 잘 관리해달라는 말일세."
< [외전] 마르스의 분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