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마르스의 분노 >
전투의 준비는 끝났다.
양군 모두 시간을 끌 마음은 없었다.
로마군은 당장이라도 적들을 분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타바하나군 역시 시간이 지연되면 로마의 지원군이 더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력은 로마군의 열세였다.
스와티가 이끄는 3만의 병사들은 무장도 그리 탄탄하지 않았을뿐더러 계속된 패전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로마군의 합류로 사기 자체는 올라갔으나 기본적인 전투력이 너무 낮았다.
반면 로마군의 상륙 소식을 듣고 필사적으로 군대를 더 끌어모은 사타바하나군은 약 12만까지 불어난 상태였다.
이쪽도 무장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코끼리 병들도 대동했고 로마군의 기병을 견제하기 위한 장창병들도 준비시켰다.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한 셈이다.
그러나 저 멀리 보이는 적들의 진영을 훑어본 트라야누스는 전혀 긴장감을 느끼지는 않는 듯 보였다.
"정말로 괜찮겠지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불안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스와티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지면 모든 게 끝이다.
"아무 걱정 하지 말도록. 곧 전부 끝날 테니. 저번에 우리가 말했던 사항들은 전부 전달했나?"
"예.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 놀라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일러두었습니다."
트라야누스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와 똑같이 평온해 보이는 신색의 소피아와 왠지 모르게 살짝 불편해 보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시선에 들어왔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십니까?"
"아니···배가 조금 아파서요."
"이 사람은 원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마. 전장의 긴장된 분위기가 몸에 안 맞나 봐."
옥타비아누스가 면목 없다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그가 정치적인 재능과는 달리 군사 쪽에 재능이 없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카이사르나 마르쿠스와는 다르다.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언제나 냉정 침착하던 평상시의 모습과는 다른 얼굴을 보니 살짝 웃음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님, 논의했던 대로 좌익의 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중앙과 우익은 맡기겠습니다. 아그리파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일단 아킬레스 그 녀석도 신경을 좀 써주십시오."
"알았어. 걱정하지 마렴."
두 사람의 눈길이 거의 동시에 우익의 가장 끄트머리로 움직였다.
판금갑옷을 입고 능숙하게 백인대장들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는 아킬레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동생의 변화는 소피아조차 많이 낯설었다.
문무에 모두 재능이 뛰어나긴 했어도 태생적인 문제 때문에 어딘가 심약함이 느껴지던 아이였다.
그로 인한 정서적인 불안을 덜어내 주기 위해 많은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아킬레스에게는 어렸을 때의 잔재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전략을 수립할 때도 냉정하게 자신의 할 말을 하고 사라졌다.
너무 사무적인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동안 그에게 부족했던 자신감이 붙어 보였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잡념은 여기까지.
밀린 이야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나누면 그만이다.
한 차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낸 소피아는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실제적인 전투의 지휘는 아킬레스와 트라야누스가 하지만 사기를 높이는 건 그녀의 역할이다.
"들어라. 자랑스러운 로마의 병사들이여!"
쩌렁쩌렁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병사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지중됐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가며 쌓아온 훈련의 성과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적들의 숫자가 많다 한들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 것이다. 혹여라도 두려움을 품고 있는 병사들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모두 털어버려라. 위대한 아우구스투스와 군신 마르스의 가호가 그대들과 함께할 테니."
"부대 앞으로!"
아그리파의 호령에 병사들이 거대한 쇳덩어리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스와티는 생전 처음 보는 묘하게 생긴 철제 원통이었다.
그냥 길쭉하고 크기만 한 저런 철통을 어디에 쓴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조사했던 바로는 로마군이 저런 물건을 가지고 다닌다는 정보는 없었다.
'저기서 화살이라도 쏘는 건가?'
바퀴를 달아서 끌고 다니기는 하고 있지만 딱 봐도 너무 무거워 보여서 제대로 된 기동성은 부족해 보였다.
전열에 뚫린 구멍을 적진을 향해 놓고 있는 걸 보면 무언가를 쏘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앞에 나온 병사들이 부지런히 요상한 작업을 하며 움직이는 동안 나머지 병사들도 모두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바로 달려나가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적군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왜지? 적들과 너무 가까워지면 기병들이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없지 않나?'
스와티가 받았던 언질은 신호가 떨어지면 공격을 하라는 것뿐이었다.
혹시 자신이 신호를 놓친 것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로마군은 아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적의 대군이 실로 대단했다.
10만이 넘는 군사들이 접근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압박감을 주었다.
그럼에도 로마군은 태연자약하게 기다렸다.
중앙에 자리 잡은 소피아나 아그리파도, 저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 트라야누스도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전쟁의 경험이 적어서 그러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자신이 나서서 우리도 움직이자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먹은 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로마의 적들에게 마르스의 분노를!"
콰아아아아앙!
쭉 늘어서 있는 거대한 철 덩어리에서 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으, 으아아악!"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진 거라고 착각한 스와티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가린 그는 몇 초 뒤에나 간신히 눈을 뜨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스와티가 이끄는 병사들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몇몇 병사들은 갑자기 들린 굉음에 깜짝 놀라 그대로 주저앉았다.
말에서 낙마해 버린 기병들도 상당수 있었다.
잘 훈련된 로마의 기병들과는 달리 스와티가 이끄는 부대의 말들은 투레질을 치며 도망가려 하기까지 했다.
뿜어지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연기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히이익!"
전열에 있는 병사 중 한 명이 비명 섞인 신음을 흘렸다.
스와티 역시 눈이 휘둥그레진 채 전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상이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군인 스와티가 이런 감정을 느낄진 대 포격을 맞은 적군의 심경이야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두 번째 폭음이 내려앉았다.
꽈아아아앙!
칼과 창이 부딪치거나 화살이 육신을 파고드는 소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매캐한 연기와 번쩍이는 섬광, 그리고 폭발이 동반되는 폭음이다.
무시무시한 진동과 굉음이 사위를 휩쓸고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소리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인위적으로 땅에 꽂아 넣는 느낌이었다.
사실 아무리 화탄을 쐈다고 해도 지금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화포로 몰살시키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사거리도, 탄속도, 폭발력도 아직은 한참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병기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본디 알 수 없는 것에서 공포를 느낀다.
무언가가 번쩍번쩍하고 폭음이 울릴 때마다 자신과 아군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땅이 터져 나간다.
이 현실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제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 오더라도 수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군대를 수습해야 할 지휘관들부터가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밀집대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전진하고 있던 게 최악의 악수가 됐다.
그냥 최대한 빠르게, 산개해서 달려왔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몇 차례 더 폭음이 일자 사타바하나군은 더 이상 대열을 유지하지 못하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깜짝 놀란 코끼리들은 통제를 잃고 이리저리 날뛰며 아군을 짓밟았다.
"으아아아악! 살려줘!"
"이 병신아! 어디로 오는 거야! 저쪽으로 꺼져! 뭉쳐 있으면 죽는다고!"
밀집해 있는 곳을 우선적으로 포격한다는 걸 알아챈 병사들은 지휘를 무시하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되면 대열이고 뭐고 없다.
화포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처음부터 초기 형태의 화포로 적들을 쓸어버리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건 적의 사기를 꺾어 대열을 흐트러뜨리고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아그리파가 무기를 뽑아 들어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겨누며 소리쳤다.
"보아라! 마르스와 아우구스투스의 가호는 우리와 함께한다. 전군, 적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전의를 한꺼번에 폭발시킨 병사들이 쏟아져 나갔다.
그 와중에도 가장 먼저 앞으로 튀어나가는 부대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뒤질세라 엄청난 기세로 짓쳐들어오는 기병들이다.
육신을 갈아버리는 파열음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도망가!"
아킬레스가 이끄는 좌익의 군단이었다.
그는 다른 군단장들과는 달리 최전선에서 적들을 도륙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부대들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문자 그대로 피의 비가 내렸다.
창칼이 뼈와 육을 박살 내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저 녀석 저거···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야?"
반대편에서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을 파악한 트라야누스가 다급하게 병사들을 전진시켰다.
아무리 대열이 흐트러진 적이라고 해도 너무 깊게 들어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킬레스의 군단은 미친 듯이 적을 갈아버리며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트라야누스의 휘하에 있는 아퀼라누스 부대보다도 오히려 더 사납고 살기가 넘쳐 흘렀다.
얼핏 보면 무모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돌격이었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아킬레스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적을 도륙하면서도 아군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뒤를 따르는 백인대장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유기적으로 위치를 옮겨가며 적의 취약한 부분만을 찌르고 깎아낸다.
아킬레스는 적군의 우측을 자연스럽게 깎아내며 어느새 후방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군에게는 놀라움을, 적에게는 한없는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저, 저 미친놈은 뭐냐! 뭘 믿고 여기까지 들어와서 설치고 있는 거야!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의 병력을 집중적으로 공격······."
사타바하나군 우익의 최후방에 위치해 있던 대신은 악몽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설령 전투에서 패색이 짙더라도 자신은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이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제대로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로마 놈들이 벼락을 쏴대더니 웬 미친놈 한 명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아군을 헤집어놓지 않는가.
혼란에 빠진 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독수리를 연상케 하는 투구를 쓴 적장의 창이 그대로 병사 한 명의 명치를 꿰뚫었다.
그놈이 양손으로 창대를 잡고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무지막지한 완력에 기마의 힘까지 더해진 돌진이다.
대신의 앞에 있는 병사 두 명이 마치 꼬치에 꿰인 것처럼 창날에 박혀 들었다.
"아, 안돼···! 누구 없느냐! 누가 저놈을 막···!"
그의 말은 끝까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콰자작!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대신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라 창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전열은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후열의 퇴로까지 적에게 막혔다.
병력을 집중해 반격하려고 하면 적은 영악하게도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 틈이 생긴 다른 곳을 파고들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치가 떨릴 정도로 효율적이고 비겁한 방식이었다.
그렇게 계속 반복해서 타격을 입다 보니 사타바하나군의 우익은 자연스레 너덜너덜해졌다.
반대편에서도 로마군에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이 올 가망도 없었다.
독수리 투구를 쓰고 대학살을 자행한 적장이 처음으로 손을 멈추었다.
사타바하나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서렸다.
드디어 저 괴물이 창을 멈추려는 것인가.
그런 기대를 비웃듯 아킬레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1대대와 2대대는 나를 따라와라. 적의 후미를 돌아 중앙을 치겠다. 그리고 3대대부터 6대대는······."
투구 속의 서늘한 시선이 공포에 떨고 있는 사타바하나의 병사들을 훑고 지나갔다.
"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따라오도록."
그 말을 끝으로 아킬레스는 그대로 말을 몰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미 전의를 잃은 적군을 베고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다.
이미 투지를 잃은 사타바하나 병사들의 몸을 암울한 현실이 옥죈다.
다행히도 로마군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자들은 우선적으로 쫓지 않았다.
다만 제때 무기를 버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가차 없이 창칼이 날아들었다.
더 이상 싸운다는 선택지는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거대한 절망만이 온 얼굴에 가득할 따름이었다.
< [외전] 마르스의 분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