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석별 >
완전히 진형이 무너진 군대만큼 유린하기 쉬운 자들은 없다.
뿔뿔이 흩어진 순간부터 사타바하나의 대군은 로마군에겐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도합 20만에 가까운 대군이 맞붙은 전장이었지만, 한나절 만에 결판이 났다.
사실 아킬레스가 이끄는 군단에 의해 우익이 무너진 순간부터 이 싸움은 전투라고 할 만한 게 아니었다.
12만의 적들 중 도망치는 데 성공한 자들은 약 3만.
9만의 병사들이 죽거나 포로가 됐다.
"아군의 피해는?"
마르쿠스의 후계자로서 명성을 드높여줄 대승이었으나 소피아는 들뜨지 않았다.
차분하게 자료를 취합하고 있는 트라야누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우리 쪽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네요. 부상자들은 나왔지만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대부분은 스와티가 이끄는 부대에서 나왔습니다."
"만족스러운 전과네."
"포로들의 처우는 어떻게 할까요?"
"그런 건 스와티에게 맞기는 게 낫겠지. 선심 쓰는 척도 할 수 있고."
"그러면 다 죽여버릴지도 모릅니다. 아까 보니까 눈이 뒤집힌 것 같던데요."
조금 전 전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소피아가 눈살을 찌푸렷다.
트라야누스의 말대로였다.
오랜 세월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일까.
스와티는 그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도망가는 병사들을 추적해 죽이라고 명령했다.
도주에 성공한 이들이 3만밖에 되지 않는 건 스와티가 보인 광기에 가까운 추격 때문이었다.
"만약 사로잡은 포로까지 전부 처형해 버린다면 역풍이 불 수도 있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지금 반대파에 선 세력들이 항복할 리가 없으니까요."
"스와티가 그걸 몰라서 이러지는 않겠지. 오히려 목숨 걸고 계속 저항하기를 바라지 않을까? 전부 죽일 명분이 서는 거니까."
"괜찮을까요?"
"괜찮을 리가 없지. 단 스와티에게는 좋지 않다고 해도 우리에겐 나쁠 거 없어. 오히려 난 그쪽보다는 아킬레스가 더 마음에 걸리는데 걘 지금 어디 있어?"
"그 녀석은···군단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스와티의 방식상 반군세력이 추가로 합류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걸 치겠다고···."
그들의 동생은 변했다.
물론 변한다는 게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아킬레스는 장수로서,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췄을 뿐이다.
전황을 지켜보았던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아그리파가 감탄하더라. 신기에 닿은 용병술이라고."
"저도 놀랐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폭주해서 돌격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과 아군의 상황을 전부 파악하면서 지휘를 하고 있더군요."
"사관학교에서 잘 배운 덕분인가?"
"그런 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가깝죠."
동생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건 원래라면 기꺼워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소피아는 트라야누스의 앞에서 그걸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이번 전투 한 번만으로 그 아이의 재능이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무리잖아?"
이번 전투에서 아킬레스가 보여준 모습이 가지고 있는 기량의 전부였는지, 아니면 그 이상을 발휘했는지, 오히려 가진 능력을 다 발휘 못했는데도 이 정도였던 건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고 보니 수레나스는 이번 전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쭉 좌익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원래 수레나스는 예상외의 사고가 났을 때 군단을 대신 지휘하기 위한 보험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번 전투는 대승이었으니 그가 나설 자리는 없는 게 맞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니 단순히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수레나스는 아버지의 최고 심복 중 한 명. 그런 사람이 단순한 보험으로 우리를 따라왔을까? 그만큼 나나 트라야누스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다른 목적도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피아는 기억력을 극한으로 발휘해 전투 당시 수레나스의 행동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는 전투의 시작부터 끝까지 좌익만을 보고 있었다.
그때는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방면이 그쪽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지금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킬레스를 보고 있던 건가? 그렇다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아킬레스에게 1개 군단을 주고 직접 지휘를 맡기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마르쿠스였다.
그리고 수레나스는 마르쿠스의 최고 심복이다.
소피아가 마르쿠스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해도 수레나스나 스파르타쿠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예의를 차렸다.
당연히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내리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수레나스가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면 그건 마르쿠스에게 받은 명령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킬레스에게 군단을 주고 능력을 평가해 보라고 했다···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네.'
현 로마에서 수레나스 이상의 군사적인 기량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굳이 뽑아 보자면 이미 은퇴한 카이사르나 아버지인 마르쿠스 정도가 아닐까.
두 사람이 이런 곳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최적의 인물은 수레나스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어째서 마르쿠스가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 하는 점이다.
'트라야누스는 물론 나한테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단 말이지. 어째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이것도 일종의 시험인가?'
마르쿠스는 자식들을 사랑하긴 했어도 끊임없이 그들에게 문젯거리를 가져다주고 엄격하게 능력을 평가했다.
무엇보다 고약한 점은 이런 시험의 태반은 제대로 된 언질조차 없이 갑자기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미 트라야누스는 수차례나 합격점 이하의 점수를 맞았고, 소피아 역시 몇 번인가 위험할 뻔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일지도 모른다.
전쟁에서 이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초전에 불과할 뿐.
본 시합은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소피아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하하하하!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장장 3개월에 걸친 토벌전 끝에 스와티의 반대 세력은 완전히 뿌리가 뽑혀 나갔다.
사실상 회전에서 대패한 순간 큰 틀에서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집요할 정도의 숙청작업에 공포를 느낀 그들은 생명을 걸고 저항에 나섰다.
아직 자신의 세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스와티는 반란군을 찍어누르는데 전적으로 로마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트라야누스가 나서려고 했으나 아킬레스가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요청했다.
소피아는 아킬레스가 생각하는 구상을 그대로 실행해 보라고 전권을 위임해 주었다.
결과는 충격적일 정도로 확실했다.
사타바하나를 20개의 작전구역으로 나눈 그는 전방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토벌 작전을 개시.
반란군 세력은 결집다운 결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각개격파를 당하고 모조리 수도로 압송당했다.
그리고 방금 스와티의 명령에 따라 이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3개월.
기병의 기동성을 극한까지 활용한 놀라운 속도전이었다.
"로마의 힘이 막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신의 군대란 바로 로마군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사타바하나를 안정시키는 데 이제 걸림돌은 없겠지? 로마의 백성들이 신변에 위험을 느끼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단언하겠습니다. 저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이제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혹시라도 이곳에 머무시면서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즉위식의 준비로 신경 쓸 게 많아서요."
스와티는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트라야누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잘 듣는 왕을 세우는 건 좋은데 진짜 저걸로 괜찮을까요?"
"문제없다니까. 자기 스스로 손발이 되어줄 사람들을 죄다 숙청해 버렸으니 어차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심어놓을 거니까 결국 내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이미 타디우스와 말 다 끝내놨어."
"벌써 북인도주식회사가 이야기가 끝났다고요? 어느새?"
"너랑 아킬레스가 반란군 진압한다고 정신이 없을 때."
트라야누스는 누나의 철두철미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동시에 자치권을 보장받고 왕이 되었다며 좋아하는 스와티가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권좌에 앉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지만 경제권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고, 신하들도 자신의 사람들은 거의 없을 터.
과연 현실을 아는 게 행복할까, 아니면 지금처럼 모르고 있는 게 행복할까.
아마 그냥 이대로 모르고 사는 게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싶었다.
"참, 그러고 보니 저번에 알아본다는 그건 알아봤습니까?"
"어. 안 그래도 말을 들어보려고 지금 막 부른 참이야. 곧 오겠다고 하더라. 네가 보기엔 어때? 아킬레스 그 아이의 재능과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니?"
"확실해요. 적어도 기병들을 활용한 전투에 있어서는 저보다도 확실히 더 위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아, 마침 도착했네."
남매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도착한 수레나스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인사를 건넸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희 때문에 먼 이국땅에서 고생이 많으시죠? 빨리 로마로 돌아가고 싶으실 텐데 죄송해요."
"아닙니다. 젊었을 때부터 워낙 수많은 땅을 돌아다니며 전쟁을 한 몸입니다. 타향살이에는 익숙하죠."
"그래도 무료하시진 않나요?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제가 바로 조처를 해드릴게요. 혹시라도 수레나스 님의 몸이 편찮아 진다면 제가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으니까요."
소피아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철이 들기 전에는 아저씨라고 부르며 품에 안겨서 재롱을 부린 적도 있는 사이다.
지금은 서로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더라도 그동안 쌓여온 친애의 감정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두 분의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게 곧 저의 기쁨입니다. 지금처럼만 해주셔도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저희 둘이 아니라 셋 아닌가요? 수레나스 님의 관심은 특히 세 번째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 같던데요."
소피아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수레나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눈치채고 계셨습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지금도 아킬레스에 관한 건으로 아버지에게 쓸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오신 게 아닌가요?"
"하하하···이거 나름 티 안 나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간파당했군요.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다우신 통찰력입니다."
"그렇게 웃으시는 걸 보아하니 우리에게 들킨다고 곤란한 내용은 아니었나 보네요. 어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대체 왜 제가 이번 일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는지."
소피아는 마음속에 있던 의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 원정의 최고책임자는 그녀였다.
그런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요구는 정당했고 이치에 맞았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던 건 아닙니다. 그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두 분의 마음을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우리가 복잡해 한다고요? 어째서?"
"그도 그럴 게···두 분은 아킬레스 님을 상당히 아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우구스투스께서는 동생이 로마를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두 분께서 괜히 생각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신 거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걔가 로마를 왜 떠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소피아마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어둑해져 가는 저녁, 밤이 깊어갈 때까지, 수레나스는 아킬레스가 품고 있었던 갈등의 실체를 남매에게 말해주었다.
< [외전] 석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