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석별 (316/326)

  < [외전] 석별 >

  "절대 안 돼."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누나와 동생은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고집을 부렸다.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다.

  아킬레스는 언제나 소피아의 뜻대로 따랐고, 소피아 역시 아킬레스가 바라는 게 있다면 거절하지 않고 요구를 들어주었다.

  처음으로 열린 남매간의 말다툼은 꽤나 심각한 분위기였다.

  장난감이나 카드가 가지고 싶다고 조르던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던 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로마를 떠나겠다니 대체 어떤 생각을 해야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거니. 난 허락 못 한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누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설득하면 돼. 그리고 네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면 아버지도 아무 말 안 하실 거고. 대체 아버지는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하신 거야······."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말에는 황당함마저 서려 있었다.

  아킬레스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고 있었던 본심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이곳에서는 제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기는 싫습니다."

  "네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번에 있었던 전쟁처럼 활약할 무대는 충분히 있어. 지금처럼 네 능력을 충분히 증명하기만 하면 나도 널 걸맞은 자리에 넣어줄 수······."

  "저를 군부의 최고 자리에 올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만약 제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증명되었을 때를 가정하는 겁니다. 하지만 무리겠죠. 그 자리는 아그리파와 형님의 자리니까요. 저도 형님을 제치고 제가 그런 자리에 앉을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게 해주신 것들이 있는데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죠."

  아킬레스는 담담하게 현실을 지적했다.

  언제나 청산유수처럼 논리를 전개하던 소피아도 이번만큼은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아킬레스의 능력에 맞는 자리를 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군단장 정도만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아킬레스는 율리우스-리키니우스 가문의 사람이면서 율리우스의 피는 전혀 받지 못한 특이한 케이스다.

  아무리 로마에서 피가 이어지지 않은 양자에게 상속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건 가문에 마땅한 후계자가 없을 때의 일이었다.

  타고난 태생 때문에 자신이 지닌 능력만큼의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킬레스가 아예 가문과 상관이 없는 타인이었다면 아그리파 같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역시 마르쿠스의 아들이라는 족쇄가 무겁게 발목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어. 나에게 조금 더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서운함이 있긴 하지만···그래도 조금 더 같이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 방법은 정말 아니야. 문제가 있으니까 그냥 나가버리겠다고? 이건 나도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한마디 해야겠어. 이런 식으로 널 보내는 건 결국 쫓아내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누님······."

  대화를 나누는 도중 처음으로 아킬레스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래도 한 번 품은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권력 구조를 다 뜯어고쳐서라도 네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고작 저 한 명을 위해 수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넌 내 동생이야!"

  소피아의 목소리에는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성급한 결정을 내린 동생만이 아니라 자신까지 탓하는 그녀다.

  진즉 동생이 품고 있는 갈등을 짐작했다면 여기까지 오게 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러셨지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님이 돌봐주시지 않았다면 전 저를 둘러싼 주변에 짓눌렸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지금까지도 내가 어떻게든 해줬잖아? 이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해결책을 마련해줄게. 누나만 믿어.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실 거 같아?"

  소피아가 말하는 어머니는 율리아가 아닌 다나에다.

  그녀는 언제나 율리아는 '엄마', 다나에는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아킬레스와는 달리 다나에는 엄밀히 말해서 가문의 일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어머니라고 불러주는 그녀를 다나에도, 아킬레스도 언제나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머니와도 이야기는 끝내놓았습니다. 아버지가 있으시니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자식으로서 실격이고 염치없는 부탁이긴 하지만···누님께서 신경 좀 써주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해결해줄 수 있다니까.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

  아킬레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럴 줄 알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의 누나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만약 진짜로 아킬레스가 자신의 본심을 털어놨다면 소피아는 어떻게든 방법을 구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사회적인 통념이라는 게 있고, 현실적인 제도의 문제가 있다.

  안 그래도 로마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도자가 될 누나에게 자신이라는 부담까지 추가로 지울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서 제가 나가는 걸 허락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누님이 저로 인해 책임감을 느끼고 무리를 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겠죠."

  "말도 안 되는 소리···그건 결과적으로 나나 트라야누스를 위해서 널 쫓아냈다는 말이나 다름없어. 난 용납 못 해."

  "쫓겨나는 게 아닙니다. 전 아버지와 내기를 했습니다. 제가 정말로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는 그릇인지, 아닌지. 그걸 판별하기 위해 이번 전쟁에서 군단을 이끌었고 수레나스 님이 제 능력을 가늠해보기 위해 따라오셨던 겁니다. 이 부분은 누님도 이미 눈치채신 것 같지만요."

  단순히 자신의 재능을 다 살릴 수 없는 환경에 절망해 뛰쳐나가려는 것으로만 여겼다.

  그렇기에 충분히 보내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킬레스는 좀 더 많은 걸 보고 있었다.

  소피아는 어리기만 했었던 동생이 이미 자신을 배려할 만큼 훌쩍 커버렸다는 걸 알았다.

  결코 쫓겨나듯 떠나는 게 아니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확고하다면 동생의 도전을 응원해주는 게 가족으로서의 도리일지도 모른다.

  "···네 뜻이 정말로 그렇다면 뭐라고 더 말하진 않을게."

  "감사합니다."

  점점 높아졌던 목소리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소피아가 한결 안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갈지는 생각해 뒀어? 설마 무작정 그냥 로마의 영역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니었을 거고."

  "동쪽으로 갈 수밖에 없죠. 서쪽은 이미 땅끝까지 로마의 영역이니까요. 아버지가 만든 세계지도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너도 그걸 본 거니?"

  "역시 누님도 보셨군요.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로마가 넓기는 하지만 결코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아직 이 세계는 발 디딜 곳으로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동쪽이라···거긴 지금 유목민들의 영역일 텐데."

  "유목 생활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밀보다는 고기가 더 좋거든요."

  농담처럼 덧붙인 한 마디에 소피아가 피식 웃었다.

  "만약 일이 여의치 않다면 고집부리지 말고 로마로 돌아오거라. 그 점만 약속해준다면 나도 더 말리진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괜한 자존심 세우지 않겠다고 확실히 약속드리죠."

  "그리고 만약 네가 거기서 자리를 잡더라도 나···아니, 가족을 너무 멀리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딜 가더라도 너는 우리 가문의 일원이고 내 동생이니까."

  소피아의 목소리에는 동생을 염려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킬레스도 은은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도 수많은 이복형제, 남매들이 있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자신에게 방해가 되면 가족조차 쳐내버리는 일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다.

  심지어 배다른 형제들이면 오죽하겠는가.

  소피아나 트라야누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아킬레스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충분히 방해할 수도 있었다.

  아킬레스가 지금까지 누린 최고의 축복은 그를 아껴준 누나와 형의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새삼 그런 걸 느낀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이만 물러가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낼 보고서도 써야 하고 이후의 일을 준비도 해야 해서요."

  "그렇게 하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좀 더 알아봐야겠구나."

  소피아는 흔쾌히 아킬레스를 자신의 방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앞으로의 관계가 어떻게 되더라도 누나와 동생이라는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가득 담긴 신뢰와 애정을 느끼며, 아킬레스는 마음속으로 또 한 번 다짐한다.

  받은 은혜는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어떤 위치에 서게 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다짐이었다.

  ※※※

  아킬레스는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보다 먼저 사타바하나를 떠나 로마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어 내년에만 귀환할 수 있을 것이다.

  아킬레스에게는 이게 더 편했다.

  너무 거창한 작별인사를 나누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어머니에게는 몇 번이나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눈물을 보이긴 했으나 자식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더욱 크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다.

  불효막심한 자식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어머니를 두었다.

  스승인 스파르타쿠스는 어딜 가더라도 자신이 최고라는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다음은 마르쿠스의 차례였다.

  그는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눈 대로 자식의 뜻에 따라주었다.

  "수레나스의 보고서는 몇 번이고 상세히 읽어보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최저한의 기준을 넘었을 뿐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 네가 지금까지 누린 모든 것은 로마와 나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가능했었다는 점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소피아가 서신으로 부탁하더구나. 자기 재산을 털어도 좋으니까 네가 떠날 때 확실하게 지원을 해달라고 말이다."

  "누님께서 그렇게까지······."

  "이전에도 말했듯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물적 지원뿐이다. 너와 함께 떠날 사람들은 너 스스로 구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아킬레스가 하려는 건 로마의 이름을 걸고 원정을 가는 게 아니다.

  물적으로라도 지원을 해주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 부분은 이미 제가 다 구해놓았습니다. 제가 동방으로 돌아가는 즉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도 해두었습니다."

  "그래···빈틈이 없구나. 갑옷과 무기, 혹시라도 필요할지 모르는 농기구들도 준비해주마. 단, 1급 기밀로 지정된 제작법을 알고 있는 자들은 데려갈 수 없다. 너무 매몰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닙니다. 오히려 저걸 내어주신 것만으로도 과분한 배려를 받았다고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부자간의 마지막 대화는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사무적으로 이루어졌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

  로마를 떠나는 길에 볼썽사납게 눈물을 보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아킬레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한 정중한 태도와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지금까지 제게 주신 모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를 올립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로밖에 감사를 전할 수 없는 절 용서하십시오."

  "그래."

  마르쿠스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다면 아버지다운 작별인사다.

  그렇게 쓴웃음을 짓고 아킬레스가 돌아서려는 찰나, 덤덤하면서도 어딘가 안타까운 어조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킬레스."

  "예?"

  "몸조심하거라."

  수많은 의미와 감정이 함축된 한 마디에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킬레스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정부의 소생인 자신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줘서, 다른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주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낳아줘서.

  '아버지의 아들로 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밖을 향해 나아가는 아킬레스의 두 눈에는 미래를 바라보는 의지가, 발걸음에는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는 신념이 깃들었다.

  마르쿠스와 다나에의 소생인 아킬레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드넓은 아버지와 로마의 품을 떠나 거대한 바깥 세계로 향하는 문턱을 넘었다.

  < [외전] 석별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