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망국의 간신 >
왕망은 원제의 치세인 초원 4년, 현 산동 지역인 위군 원성현에서 태어났다.
왕씨이긴 하지만 그의 가문은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의 손자인 전안의 후예였다.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의 이력은 상당히 특이했다.
숙부들은 모두 후작의 지위를 받은 권신들이었으나 정작 그는 가난을 면치 못했다.
효심이 지극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그는 백부인 왕봉의 추천으로 천자의 눈에 들어 관직에 올랐다.
어질고 인덕이 많아 승승장구하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는 그의 명성은 날로 드높아졌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수많은 지지자들을 거느린 그는 장차 한의 중심인물이 될 거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의 마음은 언제나 어지러울 따름이었다.
'···답이 없구나, 답이 없어.'
왕망은 아직 구경 같은 고관이 아니라 천자가 주관하는 자리에서 먼저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모든 걸 지켜보았다.
나라 그 자체인 천자와 그 천자를 떠받치는 삼공과 구경이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그 답 없는 현장을 멀리서나마 계속 봐야 한다는 건 고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대진국(로마)의 야욕이 드디어 백일하게 드러났다고 보면 되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국방의 총책임자인 태위가 힘차게 고개를 세로로 흔들었다.
군을 책임진다는 거창한 칭호와는 다르게 군사적으로는 별 재능도 없는 문신이었으며, 지니고 있는 실권도 그리 크지 않은 자였다.
그럼에도 청산유수로 입을 놀리고 있는 걸 보면 한심한을 넘어서 분노까지 끓어오를 지경이다.
'무능한 새끼들. 지금 나라가 내부에서부터 박살 나고 있는데 자각이 없는 건가?'
왕망은 몇 번이나 자신의 상사이자 구경 중 하나인 광록훈에게 작금의 심각함을 알렸다.
궁전의 내무를 총괄하는 직위인 광록훈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천자의 심기에 거슬리는 말 따위는 하지 않고 있었다.
"천축의 무리는 원래부터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겠죠. 이미 그들은 예전에도 로마에게 패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의 힘이 천축을 손쉽게 무너트릴 정도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인가?"
"물론 로마는 강할 겁니다. 통합된 흉노와 정면에서 맞붙어 이겼을 정도니 상당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겠지요. 하지만 나라의 총력을 다 끌어모은다면 그건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라도 천자께서 명령하시는 즉시 백만의 장병들이 결집할 테니까요. 흉노든 천축이든 로마든 천자께서 두려워 할 만한 적은 아닙니다."
'백만은 지랄. 백만이 어디 뉘집 개 이름이냐? 백만 군대를 먹여살릴 식량은 니 창고에서 가지고 오랴?'
앞에서 연이어서 터져 나오는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소리쳐 묻고 싶었다.
정말로 지금 이대로 가도 이 나라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나라의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최고 관직에 있는 사람들로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떳떳하게 선언할 수 있는지.
그러나 지금 그렇게 외쳐봐야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 왕망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무력감을 느끼는 건 왕망 자신만은 아닐 것이다.
말석에 자리 잡고 있는 젊은 관리들은 대부분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자는 신하들이 그러든 말든 측근들이 하는 말만을 철석같이 믿고 앞으로의 국정을 논하는 중이었다.
"그러면 이번 유람은 어떤 식으로 해야 좋을까? 태복이 한번 말해보라."
"예. 소신은 폐하의 행차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은 자로서 일각, 일 초도 허비하지 않고 언제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사옵니다. 이번 정기행차에 사용할 말들과 가마, 그리고 뒤를 따를 행렬들도 이미 전부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원제께서 계실 때의 행렬과 비교하면 어떤가?"
"모자람이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특히 이번 행차에 쓰실 가마는 이름난 장인들을 수십 명이나 동원해 만든 특상품이옵니다."
"허허, 그것참 기대가 되는군. 그럼 다음에 논할 문제로···대농령, 지금 재정과 물자 관리의 현황은 어떤가."
모두의 시선이 대농령과 그의 옆에 있는 소부에게 집중되었다.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대농령과 황실의 자산을 관리하는 소부는 천자와 가까울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이들의 말 한마디로 수많은 국가의 대사가 결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폐지 되기도 했다.
문제는 현 고관대작들 중 대다수가 외척인 왕씨 일족이라는 점이다.
왕망 역시 이들과 같은 가문의 사람으로서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을 정도로 왕씨가 나라에 끼치는 해악은 심각했다.
이미 나라의 재정은 거덜 나고 있었고, 이를 비탄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현 천자 유오는 이를 수용할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신하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기는 것 같아도 그게 전부였다.
아랫사람의 말을 잘 듣기는 하지만, 진짜로 잘 듣기만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사람이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욕은 먹기 싫으니 그냥 신하들이 뭐라 하는 걸 듣고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기세 등등해진 왕씨 일족은 이제 나라가 자기 것이라도 된 마냥 서서히 천자의 눈과 귀를 막고 자신들 마음대로 정사는 농단한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눈앞의 저 참상이었다.
왕망은 저들은 사실 로마에게 감사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게 로마 덕분에 점점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고, 그만큼 왕씨 일족이 나라를 뒤흔들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이대로 가면 망한다···어쩌면 다음대를 넘기지 못할지도 몰라.'
제아무리 내부에 적이 없는 통일왕조라고 해도 망할 때는 망한다.
시황제가 세운 진나라조차 그러했는데 한이라고 천년만년 계속가겠는가.
이미 조짐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재정이 파탄나고 있으니 지방 지배력은 갈수록 약해졌고, 군의 질적인 수준도 나날이 떨어졌다.
남쪽과 동쪽에 만들어 두었던 한사군과 한구군에 대한 제어력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지금이라도 특단의 조치를, 아니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재정 건은 이쯤하고 넘어가지."
'제일 심각한 문제를 그냥 이렇게 넘어간다고?'
젊은 관리들의 속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천자와 고관들의 대화는 점점 더 듣기 괴로운 수준으로 치달았다.
"천축은 이제 어떻게 된 건가? 로마의 속국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
"천축의 경우 지금처럼 왕이 나라를 다스릴 거라고 하긴 합니다. 하지만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밑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책봉-조공 관계가 형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로마 놈들이 꽤나 기세등등한 것 같은데 우리한테도 그런 요구를 하면 어떻게 대처하지?"
"할 수 없을 겁니다. 우선 로마와 저흰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천축의 경우 로마의 동쪽 국경에서 배를 타면 손쉽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하지만, 저희는 다르죠. 비단길을 따라 한참을 와야지만 간신히 국경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그런 장거리 원정을 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래도 미친 척하고 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다행히도 로마에 패배했던 유목민들이 다시금 힘을 회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딘가에서 걸출한 인물 하나가 나왔다고 하는데 그들이 힘을 키우면 로마가 섣불리 이쪽으로 올 수는 없겠죠."
천자는 태위의 예측이 마음에 들었는지 별다른 반박 없이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왕망으로서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는 사고의 흐름이었다.
'진짜로? 저걸 납득한다고? 어째서?'
로마가 단순히 무력만을 써서 한을 겁박할 거라는 건 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온 예상인가.
지금까지 한이 로마에게 입은 피해는 무력싸움에서 져서 입었던 것인가.
게다가 유목민족들이 다시 대두하는 건 로마가 아니라 한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유목민들이 힘을 회복하면 미쳤다고 한번 박살이 난 로마에게 가서 다시 싸움을 걸겠는가, 아니면 내부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한을 치겠는가.
유목민들이 한을 지켜줄 방패 역할을 할 거라는 건 너무 자기중심적인 예측이다.
'무엇보다 어째서 한번 박살 났던 유목민들이 다시 뭉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봐야지. 군부는 사태 파악을 하고 있긴 한 건가? 알면서도 일부러 말 안 하는 거겠지?'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로마가 천축과 전쟁을 할 때 사용했다는 신병기도 반드시 조사가 들어가야 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태위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일더니 자욱한 연기와 함께 폭발이 일었다? 그 힘은 마치 벼락과도 같았다···로마의 현 지도자는 천둥과 벼락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신통력을 타고 난 게 틀림없다. 라는 보고가 올라왔더군요. 당연히 근거 없는 헛소문입니다."
"역시 그런가?"
"물론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하늘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권능이 허락된다고 해도 그건 천하의 주인이신 천자께나 해당되는 이야기겠지요. 서양의 오랑캐들 따위가 어딜 감히. 이건 그냥 자신들의 전과를 과장하려는 양이들의 헛소문에 불과합니다."
이 말에는 다른 젊은 관리들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상식적으로 천축에서 들어온 보고가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왕망도 이번만큼은 태위를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듣기로 로마군은 벼락을 거대한 철통에 가둔 뒤 발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벼락을 철통에 가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어보면 솔직히 아니라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객관적으로 상황을 짚어 보면 로마의 현 황제야말로 하늘이 선택한 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따로 조사해본 바로는 천축을 복속시킨 로마의 영토는 한의 배 이상 넓었다.
기술력의 차이 역시 명백했다.
따지고 보면 한은 현재 뭐 하나 로마보다 나은 점이 없는 게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역을 전부 제패한 대국을 그냥 오랑캐 취급해 버리는 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고루한 태도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뭔가를······.'
궁 밖으로 나온 왕망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고민으로 정처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지금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나라는 차근차근 망국의 길로 향하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이상주의자라는 평을 받는 왕망에게 지금의 한을 지켜보는 건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수도 장안조차 외곽으로 나가면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게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다.
하물며 더욱 변방으로 가면 상황이 어떨지는 안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외척이다. 하지만 그들을 쳐내고 내가 실권을 잡는다고 해도 나 역시 외척인 것을······.'
게다가 아직 왕망은 한창 떠오르고 있는 신진 관리에 불과했다.
요직에 자리잡고 있는 외척들을 쳐내려고 해도 세력이 열세였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며 한숨만 내쉬던 그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왕만 어르신의 차남 왕망, 맞습니까?"
"음? 누구······."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한 번도 보지 못한 중년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망과 눈이 마주친 그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상단을 이끌고 있는 장속이라 합니다. 부평후 장방 어르신의 조카되는 몸이지요."
"아, 장방 어르신의 사람이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장방이라면 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실권자 중 한 명이다.
장속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장방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왕망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거야······."
장속이 주변을 힐끔 살피더니 왕망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왕망조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입에 담았다.
"왕망 님께서 마음에 품고 계신 대업에 힘을 빌려드리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건 새로운 질서를 정립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 역할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마치 뱀처럼 몸을 휘감는 속삭임에 왕망은 잠깐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지금 감히 역모를 논하는 거냐고 일갈해야 했으나, 그런 속마음과는 반대로 그의 눈동자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 [외전] 망국의 간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