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망국의 간신 >
사람에게는 가끔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여겨지는 순간이 온다.
왕망에게는 장속과의 만남이 딱 그랬다.
"도탄에 빠진 한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허무맹랑한 소리인 줄 알았다.
장방 본인도 아니고 그의 조카가 뭘 안다고 저딴 소리를 내뱉는가.
자신을 놀리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모시는 분은 모든 걸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딱 왕망 님을 짚어서 왔겠습니까."
"저에 대해 뭘 알고 있다는 겁니까."
"많은 걸 알지요. 왕씨 가문의 사람이면서 현 외척들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어쩌면 왕망 님보다 왕망 님을 더 잘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장속은 그렇게 말하며 품 속에서 책을 몇 권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대체······."
두 눈으로 직접 봐도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현재 고관들이 저지른 비리들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단순히 정황증거만이 아니라 거래기록들과 어디에서 상세한 물증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적혀있었다.
"제 주인께서 왕망 님께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왕망 님의 이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자료들은 대체···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걸······."
조작된 자료는 아니었다.
설령 조작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상세하다면 진실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
장속은 그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고 떠났다.
한참 동안 멍하니 손안에 들어온 보물을 바라보던 왕망은 결국 결심을 내렸다.
이건 하늘의 선택이다.
난세가 도래할 때마다 하늘은 언제나 영웅을 내려보냈다.
이번에 그 역할을 떠맡게 된 사람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여기서 왕망이 기회를 잡지 않는다며 이 자료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가 기존 세력을 쳐내고 위에 서야 한다면 자신만이 그 중책을 떠맡을 자격이 있다.
왕망은 확신했다.
비탄에 빠진 한을 구원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자신뿐이다.
마음을 다잡은 왕망의 얼굴은 이전의 그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망국으로 치닫기만 하는 암울한 현실은 이제 끝이다. 내가 삼공에 올라 하늘의 뜻을 받을 테니.'
※※※
"분명 그렇게 모든 게 잘 풀렸어야 하는데······."
원대한 야망을 품은 왕망은 차근차근 권력의 계단을 밟아 마침내 권력의 중추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장속이 준 자료들을 활용했다고는 하나 삼공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왕망이 가진 정치력과 왕씨라는 배경 덕분이었다.
천자의 스승을 의미하는 태사의 지위에 오른 그는 이제 한 황실을 주무르는 막후실세가 되어 있었다.
무력한 천자보다야 왕망이 훨씬 더 많은 실권을 쥐고 있다.
왕망은 이 힘을 이용해 당장이라도 국가 체질개선에 들어가려 했다.
첫 번째 개선안은 빈민들에게 땅과 식량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시작도 하기전에 암초에 부딪쳤다.
상상 이상으로 국가의 재정이 개판이었던 까닭이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왕망은 그토록 원하던 한의 정점에 섰지만, 자신이 구상하던 정책은 무엇 하나 필 수 없었다.
왕망에게 신묘한 지혜를 주었던 장속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몇 년 전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상황이 이러니 그는 점점 더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게 됐다.
신선과 귀신의 힘이라도 빌릴 생각으로 엄청난 자금을 들여 팔풍대와 구묘를 건축했다.
당연히 얼마 남지 않던 국고는 바닥을 보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이상주의자가 타락하는 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게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한은 적이 너무 많다. 중원이 품은 문제의 근원은 그 대부분이 언제나 이민족들이었지. 이들을 몰살시키면 한이 끌어안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그야말로 미친 생각이었다.
더 놀라운 건 이 미친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천자까지 왕망의 의견을 지지했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무언가 문제가 터지면 이걸 외부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자신들의 책임은 회피하고 싶어한다.
문제는 현재 한의 국력으로는 속시원하게 이민족들을 밀어버릴 수 없단 것이었다.
로마에게 대패해 한창 약화되었던 흉노는 놀랍게도 해가 갈수록 그 세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왕망이 집권하기도 전부터 흉노의 부활조짐은 있었다.
그때 왕망은 군대를 투입해 흉노를 짓밟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사뿐하게 무시당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조금만 계산을 돌려봐도 무리라는 결론이 바로 도출된다.
지금의 한은 그때보다 더욱 약해진 반면 흉노는 엄청나게 힘을 키웠다.
무신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선우는 푸른 눈을 지닌 서쪽의 유목 오랑캐들과 흉노를 하나로 엮어내는데 성공했다.
한의 입장에서 보면 오랑캐 대통합이라는 환장할만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옛날 유목민들을 하나로 끌어모았던 바야투르가 연상되는 행보다.
세력을 키운 흉노는 시간이 갈수록 대담해져만 갔다.
바야투르에게 복속되었다가 그의 몰락과 함께 떨어져나간 오환이 다시 흉노족에 흡수되었다.
위협을 느낀 왕망은 흉노에게 사신을 보내 즉각 오환을 해방하고 세금을 받는 정도로 만족하라고 일렀으나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흉노의 새로운 지배자가 사신의 손에 들려보낸 서신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한의 황제는 들어라. 우리는 우리 외에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숭상한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는 초원에 대한 그 어떠한 간섭도 허용치 않을 것이다.
만약 부탁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정중히 예물을 갖춰서 오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고자 한다면 응해줄 것이고, 그 이상을 원한다면 자신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 초원은 언제라도 그대들의 도전에 응할 것이다.>
"이런 미친! 겁대가리를 상실한 새끼를 보았나!"
천자는 노발대발하며 서신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이건 경우에 따라서는 선전포고라고 읽힐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왕망 역시 오랑캐들에게 이렇게나 무시를 당하니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이 개자식들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
왕망은 마음 같아서는 즉각 군사를 일으키자고 간언하고 싶었다.
분노로 점철된 천자는 옳다꾸나 하고 응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저 오랑캐들이 일부러 폐하를 도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쪽에게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면 바로 군사를 일으키는 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허면 저들이 저지른 무례를 이대로 넘어가자는 것인가? 나의 권위를 실추시킨 저들을 그냥 두고보고만 있으면 주변에서 나를 어찌 생각할까."
"물론 그대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적들의 힘이 강맹하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뜻이옵니다."
"만반의 준비라면?"
"지금 저들은 단순한 흉노족이 아니옵니다. 서양의 유목 오랑캐들까지 흡수한 거대 세력이지요. 하지만 그만큼 차지하고 있는 영역도 넓습니다. 그러니 로마를 끌어들여 적들의 서쪽을 공격하게 할 수만 있다면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마 역시 유목민들에게 꽤나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으니 끌어들이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
왕망은 순간적으로 번뜩인 자신의 기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자 역시 묘안이라며 왕망의 의견을 추켜세웠다.
'두고보자 오랑캐놈들. 감히 중원을 업신여긴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게 해주마.'
천자의 인가까지 받은 왕망은 거침없이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우선 흉노의 책봉인장을 흉노선우새에서 흉노선우장으로 격하 시켰다.
이 조치에 흉노는 코웃음을 치며 한나라의 변방을 약탈하고 유유히 돌아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왕망은 이민족들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해서 부채질해 여론을 하나로 묶었다.
이미 내리막길인 한나라이긴 해도 명확한 공통의 적이 생긴다면 어느정도는 힘을 짜내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국외에서 한에 대한 평가는 수직으로 하강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여의 왕은 부여후로 위치를 낮추었고, 동쪽에 남쪽을 점령하고 있는 군에서 식량과 물자를 더욱 더 많이 걷으라 엄명을 내렸다.
덕분에 어떻게든 30만 이상의 병력을 쥐어짜낼 수 있는 상황은 만들었다.
이제 로마에서 사신이 긍정적인 답을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로마가 조금이라도 호응해 준다면 바로 군사를 일으켜 분수를 모르고 기어오른 흉노족을 참하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로마에서 돌아온 사신이 가져온 답은 왕망의 기대를 완벽하게 저버렸다.
"뭐라? 로마 놈들이 내 제안을 무시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참수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신이 넙죽 엎드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왕망은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먼저 들었다.
"흉노 놈들이 들고 일어나고 있다고 똑바로 말했느냐? 계속 두고보면 이전에 로마를 침공했을 때와 비슷한 세력을 갖추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무, 물론이옵니다. 전부 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로마의 황제를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황제가 슬슬 선위를 생각하고 있으니 후계자를 만나 이 일을 논해보라는 핑계로······."
"이놈들이 누가 근본은 오랑캐 아니랄까봐 아주 대놓고 방자하게 구는구나. 어찌 천자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들고 간 사신을 이리도 푸대접한다는 말인가."
"그···로마의 차기 후계자라는 여인이 태사님께 보낸 서신이 있습니다. 태사님이 한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기둥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면서 이걸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왕망은 바로 사신의 손에서 서신을 낚아채 쭉 펼쳤다.
어떤 구질구질한 핑계를 대며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한 번 보기나 하자는 심경이었다.
그리고 채 반 각도 되지 않아 그는 시뻘개진 얼굴로 서신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건방진 계집년이 감히 나를 무시해!"
사신은 허둥지둥 땅에 떨어진 서신을 주워다가 다시 서탁 위에 올려두었다.
얼핏 보니 내용이 참 가관이긴 했다.
로마의 황태녀가 쓴 문장을 보면 왕망을 자신의 손아래 사람처럼 여기는 티가 역력했다.
물론 왕망은 한의 권력자 중에는 이례적일 정도로 젊은 이였다.
나이만 보자면 당연히 로마의 황제는 물론이고 황태녀보다 더 어릴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어쨌든 그는 한의 태사다.
천자의 스승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말투는 절대로 용납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용은 더 가관이다.
속을 박박 긁는 문장은 이 내용에 비하면 약과였다.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논의하고 싶다면 태사 네가 직접 와라. 그러면 고려해보겠다.>
왕망은 처음에는 누군가의 농간으로 서신이 뒤바뀐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이건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한의 태사인 자신보고 직접 오라?
그러면 들어주겠다도 아니고 고려해보겠단다.
이게 대체 무슨 미친 망발이란 말인가.
"역시 천하디 천한 오랑캐들이라 그런 것인가···예의범절이란 찾아볼 수가 없는 놈들이로구나. 이런 놈들과 대업을 도모해 보려고 한 내가 어리석었다."
왕망은 로마를 끌어들이려던 구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저들이 없다면 피해는 커지겠지만 그래도 이쪽의 군대는 30만이 넘는다.
흉노를 정벌하고 전쟁에 든 비용을 그쪽에 다 떠넘길 수 있다면 어떻게든 수습은 가능할 것이다.
한 가지 꺼림칙한 건 서신에 쓰인 마지막 문구였다.
<어차피 오래 지나지 않아 그대의 답신이 도착할 테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네.>
답신을 보내긴 누가 보낸다는 말인가.
선전포고나 보내지 않으면 다행인 것을.
왕망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히기 위해 찻잔을 따랐다.
한 모금 마시며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는 그 순간, 전령이 헐레벌떡 그의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태사님! 큰일입니다! 변고가 터졌습니다!"
왕망이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전령을 쏘아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요란을 떤단 말이냐. 만약 하찮은 일이라면 크게 경을 칠 줄 알아라."
전령은 애써 침착하게 차를 마시는 왕망의 눈앞에 황하 중상류 유역에 위치한 삭방군에서 날아든 비보를 펼쳐보였다.
"흉노 놈들이 드디어 미쳐버린 게 분명합니다. 놈들이 대군을 일으켜 삭방군을 치고 주둔군을 몰살시켰다고 합니다!"
푸웁!
왕망의 입안에 담겨 있던 찻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전령의 얼굴을 적셨다.
일그러지는 전령의 얼굴과 경악으로 점철된 왕망의 표정이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 [외전] 망국의 간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