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삭방군을 둘러싼 흉노와 전한의 갈등은 역사가 깊다.
한나라 초기에 흉노의 침입으로 상실한 이 유역을 한무제가 수복했다.
삭방자사부라는 이름으로 5개의 군이 설치되었으며 이 일대에만 해도 수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밀집해 살았다.
한나라는 흉노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삭방자사부의 방어를 매년 강화해 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힘을 회복한 흉노는 첫 공격목표로 이곳을 선택했다.
습격은 신속하면서도 매서웠다.
삭방자사부의 5개 군 중 3개가 한순간에 흉노의 손에 떨어졌다.
주둔군이 제대로 된 방어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이미 흉노의 대군은 안쪽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삭방자사부에서 현황을 파악하고 장안에 전령을 보냈을 때는 이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왕망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흘 뒤, 이번에는 삭방자사부가 완전히 흉노의 손에 떨어졌다는 비보가 들렸다.
추정되는 병사의 손실만 2만이 넘었다.
오랜 시간 공들인 방어선이 한순간에 헛수고로 전락해 버렸다.
충격은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삭방이 완전히 뚫렸다면 장안까지는 방어선이 그리 많지 않다.
"군을 소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정에서는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흉노의 기동성은 익히 정평이 나 있다.
그들이 작정하고 최단 거리로 장안까지 밀고 내려오면 군을 결집할 시간이 없었다.
30만 대군이고 뭐고 일단 모아야 싸움을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이 개자식들이 우리의 의도를 알고 선수를 친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파악되고 있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단 확실한 건 기병이 최소 5만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흉노족만이 아니라 색목인 오랑캐들도 목격되었다는 증언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흉노족만이 아니라 서양 유목민들도 합류했다면 5만이라는 숫자는 오히려 적다.
최악의 경우 훈련된 정예 기병만 10만 이상과 전투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만약 숫자가 15만에 가깝다면 30만 대군을 동원한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아무 전조도 없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온 이상 15만이나 되는 대군을 끌고 오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북방으로 들어온 이들은 아무리 많아도 10만을 넘어가진 못하리라.
아직까지는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왕망은 적극적으로 장수들의 의견을 들었다.
"오랑캐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대책을 말해보라."
"참으로 송구한 말씀이오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천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병력을 소집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천자와 태사께서 직접 가신다면 한층 더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을 테니까요."
적당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긴 했지만 결국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자 이 말이다.
왕망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빠른 속도로 적이 들이닥쳤기에 일단 몸을 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침공한 오랑캐들이 경우가 없는 것이라 합리화를 했다.
"병력을 모은 다음 오랑캐들과 일전을 벌인다면 승리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저들의 목표는 우리에게 많은 타격을 주고 좋은 협상 조건을 끌어내는 것일 겁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으니까요. 끝장을 보기보다는 계속 치고 빠지면서 식량과 물자를 요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쪽도 장거리 원정을 계속 지속할 수는 없고 우리도 말을 타고 다니는 저들을 완전히 섬멸하는 건 불가능하니 적당한 곳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요."
"···결국엔 협상으로 풀 수밖에 없단 말인가. 기습적으로 공격한 저 패역의 무리에게 심판을 내리지도 못하고?"
"저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신 전투에서 이겨서 피해를 주는 건 가능하겠지요."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군사를 모아도 장거리 원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일까.
제 아무리 한이라고 해도 원정하는데 수십만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한다면 전쟁에서 이겨도 나라가 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적이 국토 안까지 들어왔다면 이건 경우가 다르다.
수십만 이상의 방어 병력을 거뜬히 운용할 수 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최대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혀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중원을 침공한 오랑캐들이 다시는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짓밟아주도록. 그걸 위해서라면 지금 수도를 비우는 굴욕 정도는 감수할 것이다."
왕망은 이를 갈며 결단을 내렸다.
천자를 설득하려면 또 입에 발린 소리를 실컷 해야겠지만 권토중래를 위해 그 정도의 수고는 감수할 수 있다.
여기서 꾸물거리다가 오랑캐들에게 덜미를 잡히기라도 하면 황조의 존폐 위기까지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었다.
'아니, 잠깐.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천자를 알현하러 가는 왕망의 뇌리에 어떤 계획이 번뜩였다.
너무나도 망극한 일이라 감히 입에 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런 구상.
천자라는 이름의 주인이 꼭 유씨일 이유는 없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이었다.
※※※
"병주의 제압은 완료됐습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로군요."
산서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병주는 오악 중 북악에 위치한 요지다.
초기 중원의 국가들은 이곳을 기점으로 북방 유목민들과 경계를 형성했다.
흉노의 분열 시기에 한나라는 북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남 흉노를 병주의 일정 지역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그 덕분에 지금 새로운 천태선우가 이끄는 유목민 대군은 너무나도 손쉽게 병주까지 파고들었다.
병주와 북방의 경계선상에 지나는 장성조차 이들에게는 별다른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아군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입니다. 병주 방어군의 피해는 2만 이상으로 추산되는 반면 저희군의 피해는 1천조차 되지 않습니다."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강철 투구 속에서 서늘한 푸른 안광이 번뜩인다.
흉노족 태생이 아닌 서양의 색목인임에도 흉노의 선우들은 그를 자신들의 수장이라 인정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지닌 압도적인 힘과 능력 때문이다.
비록 패배로 끝나긴 했어도 선우들은 바야투르 대에서 이루어질 뻔한 유목민의 대제국을 잊지 못했다.
색목인이 선우로 받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바야투르가 로마까지 밀고 들어가며 온갖 유목민들을 전부 다 끌어들였던 덕분이다.
지금의 초원은 능력과 힘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정점에 설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천태선우 아킬레스는 이런 환경의 덕을 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 탓에 로마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가 이번에는 반대로 환경의 덕을 본 셈이다.
"있는 대로 현지 물자를 징발해서 보급을 끝내도록. 이대로 기주를 거쳐서 청주 서쪽 부근까지 밀고 들어간다."
"예? 남쪽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동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지금 바로 장안까지 밀고 들어가면 중원 놈들의 항복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운이 좋으면 놈들의 황제를 사로잡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데요."
"무리다. 이미 꽁지가 빠져라 도주했을 테니. 내가 여기서 아무리 빠르게 장안까지 가봐야 이미 도망친 놈들의 빈자리만 보게 될 텐데 그러면 도망간 놈들의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만 증명해주는 꼴이 아니겠느냐."
아킬레스를 보좌하는 선우가 알 듯 말 듯 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래도 놈들의 수도를 점령하는 건 의미가 크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 조금 더 먼 미래다."
"저는 천태선우의 판단력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전군! 진로를 변경한다. 목표는 서쪽의 청주. 길을 가로막는 모든 걸 쓸어버리고 약탈하라!"
흉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들은 마치 검은 태풍처럼 중원의 땅을 일방적으로 헤집어놓으며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아킬레스는 한의 주력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예의주시하며 쉴 새 없이 병력을 쪼개서 운용했다.
그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한 흉노군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가장 개선된 점은 뭐니 뭐니 해도 장비였다.
아킬레스가 처음에 입고 왔던 판금 갑옷은 십 년이 넘는 격전의 세월 속에서 수명을 다했다.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를 했어도 지금까지 쓸 수 있는 부위는 극히 일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투구의 일부라도 쓸 수 있는 게 용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흉노군의 장비 수준은 이전보다 훨씬 더 향상되어 있었다.
로마의 활을 모방해 만들었던 합성궁은 물론이고, 주력 기병들이 쓰는 무기와 갑옷의 질도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흉노의 제련 기술이 갑자기 일취월장한 게 아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아킬레스를 통해 로마로부터 들어온 물건이었다.
물론 로마가 자신들이 쓰는 최고급품의 장비를 넘겨준 건 아니었다.
현 로마의 기준에서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하급품에 불과한 무기와 갑옷이었다.
그래도 아킬레스의 병사들을 무장시키는 데에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바야투르 이후의 흉노와 싸워본 적이 없는 한나라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이전의 흉노족에 관한 정보밖에 없는 그들에게 지금 흉노의 전력은 문자 그대로 이해불가였던 까닭이다.
"장군님! 평원현이 뚫렸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경악성이 연일 울려 퍼졌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평원현은 물론 격현, 고당현이 흉노의 세찬 말발굽에 짓밟혀 갈려 나갔다.
지옥문이 열렸다고 해도 무방한 광경이 펼쳐졌다.
"북군 주둔군이 전멸했습니다. 적의 수괴가 직접 이끄는 부대로 여겨집니다!"
청주자사부 평원군의 수장인 군수는 방어선을 간단히 뚫고 밀려 들어오는 전율을 목도했다.
죽음을 형상화한 듯한 기병들의 선두에서 독수리를 연상케 하는 투구를 쓴 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저놈이 흉노의 새로운 수괴······."
다급히 보고를 올리는 이들도, 장안으로 향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들도 저 수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푸른 눈을 지닌 색목인이라는 사실만이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였다.
현재 살아있는 장군과 병사 중 저자의 맨얼굴을 직접 본 이는 없었다.
이곳을 공격당한 것도 완전히 허를 찔렸다.
병주가 박살이 났다는 보고는 당연히 들었다.
그러니 병사들을 모으긴 했지만, 이곳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건 막연한 우려 정도에 불과하다 여겼다.
모두가 천자가 있는 남쪽으로 내려갈 거라 여겼고, 군수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주 정도는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지만 청주까지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눈앞에서 병사들이 짓밟히고 핏물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아군의 수는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만 갔다.
"대체 어째서······. 약탈하며 무력 시위를 하려던 게 아니었나? 이건 마치······."
한을 짓밟으려는 것 자체가 목적인 듯한 행보다.
그 말을 입 밖으로 채 내뱉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군수의 목을 꿰뚫었다.
뒤이어서 주둔군의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병주에 이어 청주까지 짓밟혔다.
북방과 인접해 있던 주요 지역들이 모조리 오랑캐의 손에 떨어진 충격적인 결과였다.
장안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친 왕망은 오지도 않을 적에게 놀라 수도를 비운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한고조가 흉노에게 치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은 이래, 이만한 굴욕을 당한 적은 없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청주자사부를 완전히 괴멸시킨 뒤로, 아킬레스는 보란 듯이 움직임을 멈추고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중원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예상을 넘어선 흉노의 쾌진격으로 왕망은 결단의 기로에 섰다.
수십만이 넘게 집결하고 있는 대군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더 이상 뒤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식당한 그는 로마의 황태녀가 보냈던 서신을 다시금 떠올렸다.
'너는 어차피 답신을 보내게 될 거다.'
코웃음 치고 넘겼던 그 문구가 거짓말처럼 되살아나 심장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