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아니 되옵니다, 폐하!"
왕망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다.
로마에서 온 서신을 받은 천자는 문자 그대로 눈이 돌아가서 당장 군사를 출정시키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 상황에서 전선을 분열시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우선 동북방에 들어와 있는 흉노 놈들을 장성 바깥으로 밀어내는 게 우선이옵니다."
"내가 언제 로마 놈들을 직접 치겠다고 했느냐. 지금 그놈들은 둔황의 서남쪽에 괴뢰국을 세우려고 하지 않느냐. 그것만 박살 내면 문제는 사라진다. 그런다고 그놈들이 대군을 이끌고 중원까지 건너오겠느냐. 많이도 필요 없다. 3만 정도의 정예만 보내도 충분히 비단길을 안정시키고 올 수 있을 거란 말이다."
"영토 내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장거리 원정을 가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3만의 병사들을 둔황 너머까지 보내는 건 국내에서 10만 이상의 병사를 일으키는 것과 비슷한 부담이 가해집니다. 지금 저희는 전선을 넓히기보다는 확실한 한 군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간언 드리는 바입니다."
이 조언은 왕망이 시국을 읽는 눈이 뛰어나서 하는 게 아니었다.
지극히 상식 중의 상식인 정론을 설파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분노에 눈이 뒤집힌 천자는 도통 그의 말을 수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흉노 놈들과 잠깐 휴전을 하면 그만이지. 흉노 놈들이 우리 영토 내로 쳐들어오긴 했으나 그들조차 로마놈들처럼 짐을 무시하고 깔보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도발을 당했는데도 이걸 무시한다면 짐을 어찌 천자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아니, 짐만이 아니다. 앞으로 이 땅을 다스리는 짐의 후계자들도 수치스러워서라도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선 흉노를 몰아내고 그 다음 로마를······."
"그때쯤이면 로마에게 붙은 토하라 놈들이 방어체계를 완성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더냐. 그때가 되면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쏟아부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당한 말씀이긴 합니다. 하나, 흉노가 휴전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인데 요청해 보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이냐. 만약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 흉노를 먼저 치면 그만이지."
천자의 의지가 이토록 강경하니 왕망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말로 강하게 나간다면 천자가 뭐라 하든 그냥 묵살해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뒤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천자를 갈아치울 명분이 없었다.
오히려 로마에서 천자라는 칭호 자체를 박탈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다른 제후들도 천자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서양의 외적들이 감히 중원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로마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이번 건 명백한 실책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뜻하지 않은 결집 효과를 잘 이용만 한다면 비교적 쉽게 국난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설마 이렇게 결집한 여론으로 군대를 쪼개서 둔황 바깥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자는 주장이 나올 거라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이미 왕망이 반대한다고 천자가 의견을 굽힐 일은 없어 보였다.
왕망을 따르는 세력들이 아직 더 많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일단 여기서는 한 번 맞춰주는 게 옳았다.
'좋아.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 어디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지.'
이번 결정으로 왕망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쥐꼬리만 한 충심은 완전히 꺼져버렸다.
어차피 이번 원정군은 십중팔구 실패한다.
천운의 가호로 성공한다면야 좋게 좋게 넘어가면 그만이고, 실패한다면 그걸 명분으로 삼아서 천자를 내려오게 하면 된다.
원래 이런 바보 같은 일에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았을 테지만, 천자의 자리가 걸려 있다면 이런 바보짓도 한 번은 넘어가 줄만 했다.
나라가 망하면 천자의 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은, 아직도 한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걱정하는 이들은 소수였다.
"폐하의 결단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수라고는 해도 로마군이 토하라인들의 뒤를 봐주고 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아군의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방비를 하셔야 합니다. 특히 로마가 천축에서 선보였다는 신병기는 여러 방면에서 사실이라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점을 특히 유의하셔야······."
"그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네. 내가 설마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싸움을 주장했겠나. 태사, 나도 나름대로 계책이란 걸 다 세우고 있다네."
"그게 대체 무슨······?"
"로마 놈들의 그 신병기를 완벽히 무력화할 방어구를 다 알아놨다 이 말일세."
"로마의 신병기는 벼락을 거대한 철포에 가둔 뒤 발사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걸 막아낼 수 있는 방패나 갑옷을 만들려면 상당한 비용지출을 감수해야 할 텐데요."
천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짓하자 멋들어진 도포를 입은 도사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평소 신선과 귀신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왕망도 고명한 도사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도인을 바라보는 천자의 두 눈에는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깊은 신뢰가 묻어나왔다.
"이 삼청도인은 도교의 성지인 청성산에서 도를 닦아온 진정한 도인일세. 사천성에서 내 어렵게 모셔왔지."
일설에 의하면 청성산에서 도인들이 수련을 해온 건 주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라고 한다.
심후하게 이어져 온 역사 덕분일까.
삼청 도인의 말에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히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양이들의 신무기가 그토록 강력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부리는 사이한 요술 때문입니다."
"요술?"
"그렇습니다. 듣자 하니 로마의 황제는 양이들이 믿는 신의 힘을 이어받은 자라고 하더군요. 그의 후계자인 황태녀도 비슷한 부류의 요녀일 테고요. 천자를 향한 무도한 언사만 보더라도 일목요연합니다."
"로마의 신무기에 사이한 요술이 쓰였다는 말이로군요."
도사의 말을 듣는 신하들 사이에서도 그럴 법하다는 말들이 나왔다.
이건 딱히 그들이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시대는 신선들과 귀신, 요술의 존재가 당연히 존재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였다.
오히려 믿지 않는 게 비정상이었으니 이런 쪽으로 이유를 찾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기술과 문화로는 세계 제일이라 자부하는 한나라가 서양 오랑캐들의 무기를 이해조차 못 할 정도로 기술이 뒤처진다는 사실이 있어서는 안 됐다.
그러니 결국 돌고 돌아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로마는 어떤 주술적인 힘을 다루는 데 성공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저희가 로마의 벼락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도가에서만이 아니라 유가에서도 이 세상 만물은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벼락과 폭발은 양적인 요소가 극대화되어 있는 것이죠. 그걸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음의 속성을 극대화하면 됩니다."
"그럴듯하군요."
"그래서 준비한 게 바로 이것입니다. 병사들을 이걸로 무장시킨다면 양이들의 무기 따위는 바로 힘을 잃고 무력화될 것입니다."
삼청 도인이 자랑스레 가리킨 물건을 본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정말 이걸로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음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그 물건을 바라보는 삼청과 천자의 눈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 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
"휴전? 강화조약을 맺는 게 아니라 잠시만 휴전을 하자고?"
아킬레스는 때아닌 한나라 사신의 제안에 진심으로 황당해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 역시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예. 딱 1년만 휴전을 하자고 하더군요."
"대체 왜?"
"그, 글쎄요···뭔가 노리는 게 있지 않을까요?"
"시간을 끌면 놈들에게 전혀 좋을 게 없을 텐데······."
"그래서 따로 부하들에게 조사를 명령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답을 보류하고 사태를 관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킬레스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이제 슬슬 한이 느끼고 있는 부담은 임계점을 넘어서야 했다.
그는 이미 소피아에게 모든 계획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토하라인들처럼 흉노에 흡수되지 않은 몇몇 유목민족들을 독립시켜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비단길을 안정화시킬 생각이라 했다.
지리상으로 보면 현대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나라 입장에서는 거슬리지 않는 게 이상한 지경일 것이다.
'설마 이쪽과 휴전을 하고 그쪽을 먼저 공격할 생각인가? 설마 그런 멍청한 짓을······.'
초조해진 한나라가 기습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밀고 들어올 가능성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동북방에 흉노를 놔두고 서쪽으로 원정군을 보내는 일대 무리수를 둘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일주일 뒤, 척후가 물어온 정보로 아킬레스는 자신이 일축했던 가능성을 한나라가 실행에 옮기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든 걸 논리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예상치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법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예상하기 힘든 상대는 교활하거나 지혜로운 자가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바보들이었다.
※※※
아킬레스와 그를 따르는 선우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둔황 너머로 진격하는 한나라군의 사기는 아주 높았다.
군에 있는 이상 일단 밥을 굶을 걱정은 없고, 이기면 많은 보상도 약속되어 있었다.
중원을 욕보이는 오랑캐들을 정벌하러 가는 대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은 물론이요, 승산도 높다고 했으니 사기가 낮을 이유가 없었다.
지휘를 맡은 장수는 병사들이 겁먹지 않도록 틈만 나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첫째. 이번 전쟁은 로마와 직접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놈들이 세우려는 괴뢰국을 무너트리는 것뿐이다.
둘째. 그런 이유로 로마군의 병력은 일만 남짓한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토하라인들을 합쳐도 3만 남짓한 수준이다.
셋째. 무엇보다 한나라군은 로마의 신병기를 무력화할 비장의 수단을 갖추고 있다.
자랑하는 신병기가 무용지물이 되면 로마군의 사기는 바로 수직 낙하할 터, 그러면 개전과 동시에 승패가 결정 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진짜 이게 효과가 있긴 할까?"
"당연히 효과가 있으니까 가지고 오라고 했겠지. 천자께서 초빙한 고명한 도사가 낸 해결책이라는데 당연히 효험이 좋지 않을까?"
"하긴. 그 뭐더라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트릴 때도 강태공이 신묘한 도술로 왕을 보필했다며?"
"아, 그래? 자넨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나?"
"주변에서 그렇게 떠드는 걸 주워 들었지. 어쨌든 이번에도 도술이 톡톡히 효험을 보였으면 좋겠네 그려."
상식적으로는 쉬이 믿기 힘들었지만 높으신 분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니 병사들도 별말 없이 모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냄새가 나서 짜증나긴 하구만. 포대안에 넣어놨는데도 냄새가 뚫고 올라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지. 오줌이 아주 흠뻑 묻어 있는 물건들인데 냄새가 안나고 배기겠나?"
병사들은 슬쩍 고개를 돌려 등에 매고 있는 짐을 보더니 다시 얼굴을 찡그리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소중한 물건이긴 해도 냄새가 나는 건 냄새가 나는 거다.
장수들은 이번 출정에 나서기 전 병사들에게 아내의 오줌을, 아내가 없다면 여자 형제나 그도 안된다면 어머니의 오줌이라도 흠뻑 묻혀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삽질이냐 싶었던 이들도 설명을 들은 뒤에는 대충 다 납득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서라는데 그깟 오줌이 대수겠는가.
다만 코를 찌르는 비린내를 맡는 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했다.
냄새를 중화할 무언가를 묻히고 싶었지만, 음기가 쇠할 수도 있으니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엄명이 뒤따랐다.
그렇다.
한나라 군대가 로마군의 화포를 막기 위해 가져온 비장의 방패는 바로 요강이었다.
<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