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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323/326)

  <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한의 원정군 파병 소식은 즉각 로마의 귀에도 들어갔다.

  안 그래도 최종점검을 위해 잠깐 시찰 나왔던 아그리파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잘못된 정보가 아니라 진짜로 파병을 했다고?"

  "예, 병력을 꽤나 긁어모았는지 그 수가 무려 4만에 가깝다고 합니다."

  "완전히 반대쪽 방면에 적이 들어앉았는데 전선을 여기까지 확장하다니 대범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아그리파는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라도 적들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바보가 아니니 당연히 적들도 바보가 아니다.

  이게 아그리파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의 흐름이었다.

  "증원을 요청할까요? 북인도나 카렌 왕국에서 1개 군단씩만 데리고 와도 이쪽도 3개 군단이 됩니다."

  "원군이 도착하더라도 거리상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 최소 한두 번 이상은 우리만으로 전투해야 할 거다."

  아그리파가 이번에 이끌고 온 군단은 1개 군단보다 조금 더 많은 1만 남짓한 병사들이 전부였다.

  사실 그는 여기에 별로 오래 머물 생각도 없었다.

  적당히 얼굴만 비추고 로마가 이 지역을 주시하고 있다는 신호만 주고 돌아오는 게 원래 목적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적들이 쳐들어오는 중이라고 하니 아그리파로서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포병 대대를 이끌고 왔다는 점일까.

  화포가 지속적으로 발전되고 강해지면서 로마군의 편제는 변화가 생겼다.

  기존 1개 군단에 포병대대가 편성되면서 인원수도 늘었고, 보급체계도 달라진 것이다.

  굳이 여기까지 포병들을 데려온 건 토하라인들에게 로마군의 화포의 위력을 과시해 선전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전투는 오히려 로마군의 힘을 직접 보여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직 방어선이 제대로 구축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간이 요새를 건설하는데 로마군만큼 뛰어난 이들은 없었지만, 1개 군단만으로는 이 지역의 요충지들을 전부 막아내기 힘들었다.

  토하라인들의 군대 2만은 공성전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결국, 회전을 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다.

  '놈들이 아무런 대책 없이 쳐들어오지는 않았을 테니 일단 그 점을 가장 먼저 알아봐야겠군.'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전투는 언제나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 하에서만 치러졌다.

  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전투는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투는 상대방의 노림수를 간파하고 그 대응책을 세우는 치열한 심리전이 될 것이다.

  아그리파는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동방의 패자인 한의 군대라면 분명 상당한 전력과 뛰어난 전술을 보유하고 있을 터.

  곧 있으면 다가올 혈전의 예감에 아그리파는 흥분으로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 분명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뭐냐, 저건. 저놈들은 뭘 들고 있는 거지?"

  저 멀리서 보이는 한의 군사들은 딱 보기에도 방패라고 보기엔 너무나 작은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어차피 방패 따위 든다고 해봐야 화포를 막을 수는 없으니 크기를 줄인 것인가 하는 어이없는 상상도 해 보았다.

  척후병들의 보고로는 한나라군이 용도를 알 수 없는 뭔가를 들고 있다고는 했는데 직접 보니 정말로 그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로마에도 요강은 있었다.

  하지만 동양과 서양의 요강은 생김새가 약간 다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전쟁터에 요강을 가지고 나온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한나라 병사들의 손에 들린 물건의 정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저 물건을 마치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고 있단 것이다.

  '대체 저걸로 뭘 막으려고?'

  자세히 보아하니 무슨 물 같은 액체를 땅바닥에 철퍽철퍽 뿌리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전투를 하기 전에 치르는 의식 같은 건가?'

  그런 거라고 한다면 이해가 간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신들에게 기도를 올린다거나 승리를 염원하는 의식을 치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냥 별 신기한 의식이 다 있구나 하고 넘어간 아그리파는 관심을 끊고 전투 준비 명령을 내렸다.

  엄격한 훈련과 여러 번의 실전으로 전쟁 기계나 다름없는 로마군은 명령이 떨어진 즉시 움직임에 나섰다.

  화포에 붙어 있는 포병들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화탄을 장전하고 각도를 잡는 손놀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빨랐다.

  "놈들이 사거리에 들어오면 가차 없이 포격을 퍼부어라."

  로마군의 화포는 인도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보다도 훨씬 더 발전해 있었다.

  그만큼 소문도 빠르게 퍼졌으니 적들이 멍청하게 거리를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우회기동을 취해 여러 방면에서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의 기병이 많지 않다는 것 정도.

  걸음이 느린 보병들로 전진하면 당연히 화포의 과녁이 되어 대열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설마 저놈들 마르스의 분노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는 건가?'

  그릴 리가 없다는 판단에 고려하지 않았던 일말의 가능성이 아그리파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찌 됐든 일단 쏴보면 알게 될 일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고 해도 아그리파는 자신의 임기응변 능력을 믿었다.

  마침내 태연히 거리를 좁히고 있는 병사들이 화포의 사정거리까지 들어왔다.

  "쏴라!"

  화포의 포문이 일제히 적군을 향했다.

  콰앙!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와 함께 화탄들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한나라 병사들은 굉음이 들리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요강단지를 앞으로 겨누었다.

  그들이 들은 대로라면 양이의 주술로 만들어진 저 무기들은 음기로 무장한 자신들에게 닿지 못해야 한다.

  매섭게 날아간 화포들은 거짓말처럼 한나라 병사들을 비껴가···지는 않고 당연히 완벽한 명중률을 선보였다.

  콰아아앙! 콰콰앙!

  연달아 터지는 폭발이 사위를 울렸다.

  한나라군 수십이 그 자리에서 땅에 쓰러졌다.

  파열된 육신들과 핏물이 삽시간에 하늘을 날았다.

  조각조각 난 요강 파편들이 허무하게 공중을 수놓으며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 으아아아아!"

  "뭐야 이게! 효과가 전혀 없잖아!"

  "무, 물러나! 앞으로 나가면 죽어!"

  자신 있게 앞서가던 병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참상을 면치 못하자 병사들의 사기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꺼졌다.

  아무 피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어느 정도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돌격하라고 했다면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으리라.

  병사들이 당황해하든 말든 로마군은 열심히 장전을 끝내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눈에 띄게 느려진 적군의 머리 위로 화탄이 계속 떨어져 내렸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날 때마다 한나라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땅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멈추면 죽는다! 지금 와서 뒤로 돌아가도 죽어! 그냥 공격해라! 살고 싶으면 공격해!"

  장수들이 뒤늦게 지휘해보려 했으나 초장부터 혼란에 빠진 병사들은 통일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정신력이 강한 이들은 장수들의 말에 따라 앞으로 돌격했지만, 겁에 질린 이들은 오히려 뒤로 도망갔다.

  개중에는 아예 정신줄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이들도 있었다.

  사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화탄의 공포는 장수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솔직히 진짜 요강을 앞세운다고 저 무기가 빗나갈까 하는 의심은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손톱만큼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보고 나니 지휘할 기력조차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먹물만 든 윗대가리들이 이번에도 헛짓거리했구나 하는 절망만이 가슴을 꽉 채웠다.

  그 뒤로는 전투라기보다는 거의 학살에 가까운 전개가 이어졌다.

  굳이 로마군이 나설 것도 없었다.

  우수한 기병 부대를 갖춘 토하라인들에게 완전히 전열이 붕괴된 병사들을 유린하는 건 굳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오히려 사타바하나와 싸웠을 때보다도 전투가 더 싱겁게 끝났다.

  그때는 대열이 무너졌어도 적들이 어떻게든 싸우려 했던 반면 이번에는 그냥 알아서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휘해야 할 장수들이 가장 먼저 말머리를 돌려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가는 장면도 보였다.

  가장 어이가 없는 사람은 바로 아그리파였다.

  예상과 전혀 다르게 전투가 흘러간 현실에 좋아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지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해야 하는 치열한 전술 싸움?

  서로 간의 노림수를 간파하고 대응책을 마련한 뒤, 그걸 다시 파훼하는 지휘관의 역량 격돌?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화포 몇 방 맞았다고 겁먹어서 도망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렇게 무너질 거면 애초에 싸움을 왜 걸었다는 말인가.

  토하라 부족장들은 과연 로마군이다 하면서 감탄을 늘어놓았지만, 그런 칭찬을 받는 것 자체가 낯뜨거운 상황이었다.

  '저놈들 대체 뭐지?'

  어안이 벙벙해진 아그리파의 시선에 문득 조각조각 난 요강 파편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기병대장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자세히 알아보니 이건 오줌을 담아두는 요강이 맞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요강을 왜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그리파는 아까 전 화포가 떨어질 때 한나라군이 보인 행동을 떠올려보았다.

  그때 그들은 분명 저 요강을 앞으로 내밀었다.

  "설마···저 요강으로 화포를 막아보려고 한 건 아니겠지?"

  "······."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병대장은 물론 그를 따라온 백인대장들도 아무런 말 없이 박살 난 요강 파편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겠지요.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방패로 막으려고 했다면 모를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군단장님께서 너무 적들의 지능 수준을 낮게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하들의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자 아그리파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추론을 도로 물렸다.

  "역시 그렇겠지? 저들이 하도 어이없는 모습을 보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나 보군. 어쩌면 지금 온 저들은 그저 우리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탐색부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4만이나 되는 대군을 탐색용으로 던져준다는 말입니까?"

  "그건 그렇지만 이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거참···적의 속내를 모르니 전투에 이겨놓고도 찝찝하군. 일단 북인도 주둔군에 연락해서 추가로 1개 군단을 더 배치해야겠다. 한의 동향에도 더 주의를 기울이라고 전해라."

  "예!"

  고작 이걸로 적의 공세가 끝났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아그리파와 그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분명히 한나라 측도 추가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그렇게 확신한 로마군은 토하라인들과 함께 부지런히 방어선을 구축하고 정찰부대를 내보냈다.

  몇 달 뒤, 예상대로 충격적인 보고가 아그리파의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내용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번 전쟁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이 격화된 끝에 천자가 폐위당하고, 내전에 준하는 싸움이 일어났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보고서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결국 이 말도 안 되는 보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아그리파는 2달이나 되는 시간을 추가로 썼다.

  몇 번이나 확인을 거친 뒤에도 똑같은 결과를 확인한 그는 그때가 돼서야 마르코 폴리스로 보고를 보냈다.

  '소피아 님. 동방은 정말 알 수 없는 마경인 것 같습니다.'

  아그리파는 보고가 늦어진 걸 사죄로 서신을 마무리하며 짤막하게 자신의 감상을 적어 두었다.

  <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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