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호16국 >
외부에 거대한 적이 존재한다면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일단 뭉치는 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습성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렇게 하는 게 옳다.
반면 외부에 강대한 적들이 위협을 가하는 와중에도 자신들끼리 싸우는 걸 멈추지 않는다면, 그 집단은 이미 망할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그런 나라들은 수없이 많았다.
자신들끼리 싸우는 걸 넘어 아예 외세를 끌어들여 경쟁자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례들도 넘쳐난다.
지금의 한나라가 딱 그런 모습이었다.
최고 권력자인 왕망은 나라가 쇠퇴해 가는 모든 책임을 천자에게 떠넘겼다.
로마에게 당했던 꼴사나운 대패도 천자의 그릇된 판단 때문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속전속결로 천자를 폐위시켜 버린 왕망은 자신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어린 태자를 천자로 올렸다.
그 폭거에 전국 각지에서 항의와 비판이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흉노의 위협 때문에 각 지방의 제후들은 상당한 수의 군사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역적 왕망을 규탄한다는 이유로 중앙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
왕망은 새로운 천자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야말로 역적이라 규정했다.
갑자기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중원을 지켜보는 흉노 입장에서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한을 조급하게 만들어 조금씩 전력을 갉아먹으려 했던 기존 작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물론 선우들은 이 모든 게 아킬레스의 계략이라 착각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 이유로 휴전 기간을 더 늘렸으면 좋겠다는 말인가?"
어이없다는 아킬레스의 물음에 한의 사신이 연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렇습니다. 태사께서는 현재 지방의 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사실 태사께서는 초원의 전사들과는 처음부터 싸울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쌓인 모든 오해는 그 반역도들이 원인이었습니다."
"오, 그런가? 그런 못된 자들이 있었다니 백 번을 죽어 마땅한 놈들이로다."
"바로 그렇습니다. 태사께서는 오히려 초원의 영웅들이 지닌 기상을 높이 평가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길 바라십니다."
멍청한 오랑캐가 입발린 소리에 넘어간다고 생각한 사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킬레스는 그런 사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태연스레 엄청난 요구사항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이쪽에 넘긴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인가?"
"예?"
"병주와 기주에 이어서 청주. 그리고 최북방에 있는 유주까지. 이 정도는 화친의 선물로 내어줘야 우리도 태사의 진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4개 주는 너무 많은······."
한나라가 가지고 있는 13개 주에서 4개나 떼어 달라는 말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게다가 저런 북방의 요지들을 다 떼어주면 흉노를 견제할 수단 자체가 없어진다.
"그럼 우리보고 순순히 물러나 달라는 소리인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건 안 될 말이지."
"당연히 그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병주와 유주, 아니면 유주와 기주 이렇게 2개 주를 드리겠습니다."
"으음······."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아킬레스에게는 최상의 결과였다.
지금 3개 주를 점령하고는 있다고 해도 원래 흉노는 점령지 안정화에 능숙한 이들이 아니었다.
강제로 찍어누르고 있어 봐야 군사를 물리는 즉시 반란이 우후죽순 일어날 게 뻔했다.
그러니 정식으로 2개 주를 받고 마무리를 짓는다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최고의 장점은 병주나 기주까지 내려온다면 자동으로 한의 장성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한에서 새로운 장성을 쌓는다면 또 모르겠으나, 지금 내분으로 스스로 망가지고 있는 한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전부 끝낸 아킬레스는 크게 선심을 쓴다는 듯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이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는 생각은 아니었으나 이번 한 번만 태사의 진심을 믿어보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그러면 휴전 협정의 기한은 역도들을 전부 토벌하고 3년이 지날 때까지는 엄격하게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거기에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해주게. 만약 협정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추가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아킬레스의 제안은 한의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희희낙락 협정문을 작성한 사신은 한 번 아킬레스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그들이 맺은 휴전 협정을 뜯어보면 사실상 흉노가 일방적으로 이득을 본 듯 보였다.
우선 유주와 병주를 흉노의 땅으로 인정하고 어떠한 탈환 시도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흉노는 한과 대등한 관계이며 당연히 책봉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걸 확실히 할 것.
한은 국경에 있는 병사들을 물리고 유주와 병주가 흉노의 영토로서 안정화될 때까지 어떤 도발도 삼갈 것.
이렇게 세 가지가 흉노가 얻어가는 이득이었다.
이 대가로 흉노는 왕망이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뒤로 3년간 무력도발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얼핏 보면 흉노가 꽁으로 이익을 본 듯했지만, 몇몇 선우들은 더 많은 걸 챙길 수 있지 않았겠냐는 의문을 보였다.
"중원 놈들은 우리가 더 강하게 나갔어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지방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데 어떻게 저희와 싸울 엄두를 내겠습니까."
"차라리 그냥 밀고 내려갔다면 한을 멸망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부하들의 당연한 의문에 아킬레스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담담하게 명령을 내렸다.
"한의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병력을 소집해라. 정확히 이틀 뒤 국경선의 병사들을 쓸어버리도록."
"예?"
상상도 못 한 천태선우의 명령에 선우들이 입을 떡 벌렸다.
"아······. 처음부터 협정을 지킬 마음이 없으셨습니까?"
"설마.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우리가 그렇게 신의를 모르는 자들은 아니지 않느냐."
"그럼 어째서······. 휴전 협정을 어기면 막대한 배상금을 추가로 물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천태선우님이 협정을 깬 걸로 간주되지 않을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협정을 깬 건 한나라 놈들인데."
선우들이 점점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킬레스가 피식 웃으며 협정서의 한 구절을 읊었다.
"한나라는 국경의 병사들을 전부 물리겠다고 약속했지. 하지만 잘 보아라. 언제까지 물러나겠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이틀 뒤 공격하더라도 명분은 충분하다.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놈들이니까."
아무리 빨라도 국경에 자리 잡고 있는 병사들이 이틀 만에 우르르 철수하는 건 불가능하다.
병사들을 통솔하는 장수에게 명령이 내려가는 시간과 장비와 군수품을 챙기는데도 여러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약에 조인하고 이틀 만에 공격해버리는 건 누가 봐도 억지였다.
그러나 이건 한의 사신이 허술하게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사실 군사들을 물리는데 기한을 정하는 건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에서 좀 더 능력 있는 자를 보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실수였다.
그런 수준밖에 안 되는 자를 보냈다는 것에서 한이 얼마나 상황이 좋지 않은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면 천태선우께서 배상금 조항을 추가하라고 하신 것도······?"
"물론 한나라 놈들에게 조약을 어긴 대가로 추가 배상금을 뜯어내기 위해서다. 추가로 유주와 병주에 이어서 기주까지 받아내는 걸로 타협을 보면 되겠지."
상상도 못 했던 수완에 선우들이 혀를 내둘렀다.
문명과는 그리 연이 없었던 선우들조차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명분은 이쪽에 있는 게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흉노는 철저하게 협정서에 의거해 움직이는 것인 까닭이다.
어쩌면 한의 사신은 오랑캐들이 조약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움을 보일 거라 상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국가 간의 외교 또한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에 임할 때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끊임없이 상식을 의심해 봐야 한다. 그게 불가능한 놈들은 가장 먼저 나자빠질 수밖에."
냉혹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저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다.
고대의 국제 사회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른다.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모든 역량을 총집중해야만 한다.
그게 불가능한 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선우들의 눈빛이 투지와 살의로 번뜩였다.
그들은 이제 시대가 완전히 변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토록 강대했던 한은 이제 없다.
눈앞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강대한 제국의 장병들이 아니었다.
이미 연전연승을 맛보고 있는 흉노의 전사들에게 그들은 이제 한낱 사냥감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흉노의 선우들은 아직 국경을 떠나지 않고 있던 한의 수비군을 공격해 궤멸시켰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사냥이 개최됐다.
※※※
흉노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은 한의 방어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당연한 일이다.
휴전 협정을 맺은 놈들이 이틀 만에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는데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거센 항의가 들어갔지만, 흉노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들은 영악하게도 협정서를 들이밀며 군을 물리지 않은 한이야말로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간악한 사기꾼들이라 욕했다.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으나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어떻게 이틀 만에 군대를 물리냐고 항변했으나 흉노의 답은 간결했다.
"우리였다면 하루도 안 걸려서 전부 군대를 물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흉노는 조약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조약이 유효하다는 주장을 앞세우며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이 황당한 사태는 삽시간에 중앙은 물론 지방까지도 퍼져나갔다.
신나게 서로 치고받고 있던 제후들은 더욱 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중원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단순히 저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은 흉노가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나와도 그들을 응징할 여력이 없었다.
분열해 있는 제후들의 힘을 합친다고 해도 초원의 유목민들을 감당할 수 있단 보장이 없어 보였다.
기세등등하게 북방을 유린하며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높이는 흉노의 모습은 새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게다가 흉노는 영악하게도 자신들 스스로 한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이건 아킬레스가 마르쿠스에게 들었던 철칙이었다.
중원의 통일왕조가 외부에서 들어온 유목민에게 완전히 무너진다면 그들은 저항의 의지를 불태운다.
중원인들의 드높은 자존심은 당장은 망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타올라 주도권을 되찾아오곤 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마르쿠스는 아킬레스와 소피아에게 다른 방식으로 중원을 무너뜨리라고 귀띔을 주었다.
아킬레스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랐다.
그는 한의 조정을 압박하는 동시에 지방의 반란 세력에는 이상할 정도로 후한 대우를 해주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군사도 빌려주었고, 제후들을 토벌하기 위해 오는 중앙의 군사들을 막아주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마침내 흉노를 이용해 자신의 권세를 드높이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 시작은 흉노의 세력권에 들어간 기주와 바로 접경하고 있는 연주였다.
연주자사 도균이 흉노의 지원하에 스스로 왕을 칭하며 그 국호를 서진이라 지었다.
아킬레스는 흉노 천태선우의 이름으로 서진의 왕을 정식 왕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흉노의 친우라 선포했다.
중원의 질서가 갈가리 찢겨나갔다.
대분열의 시작이었다.
< [외전] 2호16국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