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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호16국 (325/326)

  < [외전] 2호16국 >

  서진의 등장은 바야흐로 중원 질서의 몰락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다른 제후들과 한족에 편입되었던 타민족들은 서진의 동향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만약 한왕조가 서진을 초전박살 내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훤하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왕망은 전력을 집중해 연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서진의 왕 도균을 친우라고 공표한 흉노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왕망이 보낸 5만의 병사는 천태선우 아킬레스가 직접 이끄는 전사들의 말발굽에 그대로 짓밟혔다.

  아킬레스의 이름이 중원에 알려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은 그를 사람들은 중원지겁이라 불렀다.

  한자로 음차해 읽은 아카리우스(阿喀琉斯)라는 이름은 몇 번의 전투를 거쳐 한족의 악몽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으, 으아아악! 아객류사(阿喀琉斯)다! 이번에도 저자가 직접 왔다!"

  "도망가! 여기 있으면 다 죽는다!"

  "가, 같이 가! 난 개죽음 당하기 싫어!"

  토벌군이 연달아 격파당하자 이제 중원 각지의 모두가 황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은 아킬레스가 두려워 토벌군에 편성되면 탈영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한의 지방통제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가운데 아킬레스는 차근차근 새로운 나라를 독립시켰다.

  특히 그는 한족이 자신들에게 동화시키려고 한 다른 민족들의 독립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한의 최남단에 위치한 교주였다.

  이곳에 살고 있는 건 현대에는 좡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는데 지금은 낙월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아킬레스에게 포섭된 낙월의 청년들은 교주의 중심은 물론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궐기를 종용했다.

  "한족들의 압제에서 벗어날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천태선우는 우리가 자리를 잡고 자신들을 지킬 힘을 기를 때까지는 원조해주기로 약속하였다! 동포들이여 지금이야말로 일어날 때다!"

  이 시대의 타민족들은 한에게 점령당한지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지난 상태는 아니었다.

  민족주의라는 게 태동하지 않은 시대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민족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아킬레스는 의도적으로 다른 민족들을 한족에게서 떨어트리고, 철저하게 서로 반목하도록 유도했다.

  "한족은 우리를 그저 착취할 노예로만 보고 있다! 우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보라. 동물을 의미하는 낙(駱)자를 쓴 낙월이다. 한족 놈들은 우리를 문자 그대로 동물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예 들개를 닮았다고 하여 동족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는 판이다!"

  "옳소! 이 간악한 새끼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우리만의 나라를 만듭시다!"

  "일어나라 동포들이여.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문화와 자긍심을 되찾을 때다!"

  교주의 민족들은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관아를 습격하고 불태웠다.

  교주에 내려와 있던 한족 관리들은 대다수가 죽거나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외부로 쫓겨났다.

  이런 움직임은 당연히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주에서 낙월이 봉기하고 바로 다음은 서쪽 끝 량주에서 강족이 들고 일어났다.

  원래부터 한족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강족은 기회가 오자마자 얼씨구나 하며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다만, 원 역사와는 달리 로마와 흉노가 열심히 바람을 넣은 덕분에 이민족들은 한족에게 훨씬 더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한족의 문화를 멀리하고, 한족을 배격하는 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이 민족 단위로 공유됐다.

  중원의 왕조들이 그렇게나 공을 들였던 한족을 중심으로 한 천조질서가 실시간으로 끝장나고 있었다.

  왕망의 능력으로는 무너져가는 제국을 수습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제 누가 와도 제국의 몰락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왕망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오늘 예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면 내일은 양주, 모래는 익주다.

  같은 날에 연달아서 전령이 들이닥칠 때도 있었다.

  그냥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잔혹한 시대는 그마저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겨우겨우 장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주변의 수많은 세력이 일제히 장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동서남북 그 어디로도 도망갈 길이 없다.

  반한의 기치를 걸고 일어난 나라들은 구시대의 상징인 장안을 밀어버릴 때까지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합의를 마친 상태였다.

  공통의 적은 일단 한족이다.

  심지어 도균처럼 한족이면서도 반한을 부르짖으며 나라를 세운 이도 있는 지경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시대는 한족이라는 정체성이 완전히 굳어진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민족이 중원 지역으로 내려오며 자연스럽게 한족과 섞이고 동화되었다.

  당장 초나라를 세운 묘족도 한때는 한족 이상의 강세를 자랑했다.

  엄밀히 말하면 유방이나 한신도 초나라 출신이었다.

  하지만 초나라를 세운 묘족들은 한족들과 섞이며 자연스럽게 한족에 동화되었다.

  그렇게 현재 진행 중인 한족 동화 과정이 갑작스러운 암초를 만난 셈이다.

  당장 도균만 하더라도 자신은 원래 한족이 아닌 묘족이며 초나라의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탈 한족의 바람은 이미 중원 전 지역을 뒤덮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중원 해체 계획의 핵심이 완벽하게 먹혀들어 가는 순간이었다.

  역사상 수많은 이민족이 중원을 침략했으나 결국 통일왕조로 돌아갔던 건 그들이 한족의 문화에 역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변방의 이민족들은 중원의 고풍스럽고 발전된 문명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다.

  문화의 힘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마르쿠스가 아킬레스에게 절대로 천자를 칭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 역시 흉노가 중원의 질서에 동화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분간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로마는 아주 교묘하게 토하라인들을 통해 한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계속 퍼트렸고, 흉노도 아킬레스의 주도로 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지속적으로 그런 정보가 주입되니 당연히 중원에 대한 반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보들은 그냥 막연한 선동성 문구가 아니라 확실한 사례까지 동반하고 있어 더욱 신빙성이 높았다.

  "한족은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은 전부 오랑캐라고 부르며 대우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동화되지 않은 이민족들은 전부 철저히 짓밟고, 그들의 문화를 자신들의 것이라 우기며 찬탈하는 데 여념이 없다.

  강족을 보아라. 주나라를 도와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한족의 왕조 밑으로 들어간 이민족 중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이가 누가 있는가?

  "

  "서방으로 건너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로마는 다르다고 하더라. 현 로마 황제의 최고 심복 두 명은 로마에서 태어난 로마인이 아닌 외부 출신이다. 그들은 이민족들임에도 로마의 최고 권력기관의 일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황제의 측근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국의 풍습과 문화, 종교도 인정해준다고 한다. 이들은 다른 누구처럼 타민족의 문화를 무조건 자기들 것이라 우기지도 않는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학대를 당해왔는지 알 수 있다.

  "

  명확한 의도를 품었지만 그럴듯한 근거가 있으니 설득력도 남다르다.

  고작 몇 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들이 변하고 사라졌다.

  드넓은 중원의 지역은 이제 12개나 되는 국가로 분열되었고, 지금도 건국을 준비하고 있는 지역들이 남아 있었다.

  흉노는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새롭게 들어선 신생국들을 계속 지켜주었다.

  그 명목으로 조공을 받은 건 물론 당연했다.

  사태가 이토록 커지다 보니 당연히 남방과 북방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구군의 지배를 받던 월남은 이미 완벽하게 독립해 중원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만주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동과 한반도 북방에 있던 한사군은 부여를 앞세운 현지 국가들에게 밀려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축출당했다.

  권위와 힘을 잃은 한왕조의 위상은 이제 어디에서도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왕망은 완전히 폭주하기 시작했다.

  장안에서 쫓겨난 그는 낙양에서 근근이 세력의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허수아비 천자마저 쫓아낸 그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한에서 신으로 바꾸었다.

  아킬레스는 이 소식을 듣고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기뻐했다.

  이건 오히려 그를 도와주는 일이다.

  "보아라. 천자라는 이름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이름이었다. 그저 권력을 탐하는 한족의 무리가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그럴싸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아킬레스는 당장 군대를 일으켜 낙양까지 밀고 들어갔다.

  왕망에게는 이 진군을 막아낼 힘이 당연히 없었다.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하고 포로가 된 왕망은 한 달간의 감금 끝에 공개처형을 당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아킬레스는 외부인들도 모두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시간을 들여 처형식을 준비했다.

  각지에서 여러 이민족이 이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왔다.

  비참하게 끌려 나와 무릎을 꿇은 왕망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욕과 조롱을 듣지 않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외면하십니까! 저런 악도들이 황좌를 욕보이고 득세하나니! 이 혼란스러운 천도를 바로잡을 영웅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킬레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타깝지만 그 영웅은 자네가 아니었던 모양일세."

  이미 정신을 반쯤 놓은 왕망은 아킬레스를 쏘아보며 외쳤다.

  "그럼 무엇이냐? 너 같은 색목인 오랑캐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후대가 알아서 판단하겠지. 그래도 내가 영웅으로 불릴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자네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대강 짐작이 가는데?"

  "천도를 어그러뜨리는 짐승들······. 너희들의 야만적인 행보에 언젠가 반드시 천벌이······!"

  왕망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입에 재갈이 물린 그는 몸부림을 치며 저항하려 했지만, 곧바로 서슬 퍼런 칼날이 그의 몸 위로 쏟아졌다.

  왕망의 몸에 어깨부터 허리까지 붉은 혈선이 그어졌다.

  검에 베인 그대로 왕망의 몸이 쓰러져 저 먼발치에 나뒹굴었다.

  그는 비록 적법한 천자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스스로 한족의 천자를 칭한 이였다.

  그런 사람이 수많은 제후와 이민족 부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숨이 끊어졌다.

  이 모습이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컸다.

  어느 특정 민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

  천자는 만인의 외경을 받는 이름이 아니라 그릇된 탐욕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전락했다.

  동시에 토하라인들을 통해 로마의 문물들이 중원으로 전파되었다.

  한나라보다 훨씬 더 우수한 문물을 접한 이들은 지금까지 한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알았다.

  그렇게 쪼개지고 합쳐지는 과정을 반복하던 중원의 국가들은 결국 16개의 소국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북방의 거대세력인 흉노나 동쪽에서 로마의 비호를 받는 토하라에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다.

  토하라 자체의 힘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으나 이들의 뒤에 있는 로마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이 모든 과정을 마무리하는 화룡정점은 한자를 시대에 뒤쳐진 문자라고 몰아가는 것이었다.

  로마의 영향을 받은 토하라는 한자를 시대에 뒤쳐진 상형문자라고 하며 이런 상형문자는 서양에서 이제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코웃음쳤다.

  토하라의 지배층은 라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고급화 전략이 통해 중원에서도 점차 상형문자를 버리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라틴어를 그대로 쓰기보다는 여러 표음문자를 참고하거나 변형하기도 했고, 한자와 합쳐서 자신들만의 글자를 만들려는 민족들도 나타났다.

  한 가지 공통점은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

  완전히 쪼그라든 한족은 그마저도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된 상태라 16국의 주도권조차 쥘 수 없었다.

  그들은 토하라(로마)와 흉노를 2호라 칭하며 두려워했다.

  바야흐로 2호 16국 시대의 개막이다.

  이 16개의 국가는 시대가 흐르며 흥망성쇠를 거듭했으나, 결코 하나로 합쳐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새롭게 개편된 질서 속에서.

  한족의 통일왕조가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외전] 2호16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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