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에필로그(후기) >
외전.
로마에는 새로운 기념일이 생겼다.
마르쿠스가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은 걸 기리기 위한 축제의 날.
마르쿠스의 이름을 딴 콜로세움에서는 여느 때보다도 수준 높은 경기들이 치러지고 있었다.
건강상의 문제로 원로원 의원직을 내려놓는 스파르타쿠스를 기념하기 위한 경기였다.
원래 종신직에 가까운 원로원이었지만, 카이사르의 은퇴 이후로는 아름다운 은퇴를 하는 게 오히려 관습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를 위해 손수 행사를 주관했다.
"저 검투사들··· 전부 트라키아 출신입니까?"
스파르타쿠스는 육신은 노화했어도 보는 눈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평상시에도 동향 출신 검투사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그는 손쉽게 검투사들의 내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실력이 아주 좋지? 네가 완전히 은퇴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저들이 제발 자신들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더군."
스파르타쿠스 이후로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들에 대한 선호도는 굉장히 높았다.
트라키아 검투사들은 동방이든 로마든 가리지 않고 활약했고. 덕분에 검투사 업계 최고 명가로 군림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노예가 아니었으며, 현대의 스포츠 스타에 비견되는 인기를 누렸다.
스파르타쿠스는 경기를 마치고 자신들을 향해 인사하는 선수들을 지켜보았다.
언제나처럼 관객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갈채가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건강상의 문제로 몇 년 전부터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강철 같았던 육체는 이제 원로원 회당과 집을 왕복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갈 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검을 처음 쥐었던 그 날부터 죽음이란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는 공기와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건 죽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수만이 넘는 적군보다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었던 친우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게 더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미련은 없었다.
지금까지 길고 길었던 인생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부잣집 도련님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동향 출신이라 내심 행복하길 바랐던 노예 소녀는 이제 누구보다 기품있는 귀부인으로 자랐다.
'그 녀석도 잘 지내고 있겠지······.'
말년에 남은 한 가지 걱정거리였던 제자도 이제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륭히 자립했다.
저 머나먼 동방에서는 이미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인사라 하지 않던가.
이 모든 위대한 여정은 자신이 그를 따라가기로 선택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선을 느낀 마르쿠스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왜, 혹시 어디 불편한 거라도 있어? 사람을 불러줄까?"
"아닙니다. 그냥··· 역시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서요."
"새삼스럽게 무슨."
그 말이 맞다.
정말로 새삼스러운 감상이지만 이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모든 검투사와 노예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절망에서 벗어나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친우가 죽어가며 남겼던 유언처럼, 스파르타쿠스는 목숨을 바쳐 저항했던 수많은 동료의 희망을 짊어지고 나아갔다.
단순히 희망을 떠맡는 걸 넘어 스스로 희망이 되었다.
'그래, 이 정도면 나름대로 힘냈어.'
눈을 감은 스파르타쿠스는 귓전에 울리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귀를 기울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는 내 의무를 다한 거겠지, 크릭수스? 이 정도면 웃으면서 널 만나러 가도 되는 건가?'
단순한 환청이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솟아난 영혼의 울림이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했던 추억 속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와 속삭였다.
'가슴을 펴고 오게. 지금까지 수고했네, 친구.'
※※※
시간이 흐르며 로마의 전성기를 열었던 영웅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갔다.
마르쿠스는 아버지 크라수스와 장인 카이사르의 임종을 모두 지켰다.
카이사르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소피아와 트라야누스에게 축복을 내려준 그는 마르쿠스와 율리아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 뒤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임종을 앞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호쾌함이었다.
그렇게 웃으며 잠든 카이사르를 배웅한 마르쿠스는 본격적으로 후계 승계작업을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마르쿠스의 이후 행적은 어느 역사서를 봐도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다.
후계자인 소피아와 장남 트라야누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한 임종을 맞이했다는 설도 있고, 모든 걸 내려놓고 율리아와 함께 세계를 둘러보기 위해 떠났다는 설도 있었다.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로 명성 높은 로마답지 않게 유독 마르쿠스의 마지막에 대한 서술만이 이러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마르쿠스의 뒤를 이은 소피아가 아버지의 신성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고대 로마의 시민들은 진지하게 마르쿠스가 죽은 게 아니라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었다.
마르쿠스 사후에도 속속들이 사실로 밝혀진 그의 예언 덕분이기도 했다.
훗날 신황으로 불리게 되는 마르쿠스의 뒤를 이은 소피아는 마르쿠스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행동으로 증명해나갔다.
그녀는 인도가 힘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3개로 나누고 토하라 세력을 흉노와의 완충지대로 삼았다.
그렇게 로마를 중흥으로 이끌던 와중 그녀는 돌연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한 가지 내렸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비우고 도시의 기반시설을 전부 다른 곳으로 옮겨라. 수십 년 뒤에 이곳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그로부터 17년 뒤에는 화산이 폭발할 것이다."
이런 사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미 마르쿠스가 안티오키아의 대지진을 예견하고 마르코 폴리스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전적이 있긴 했다.
일단 지엄한 아우구스타의 명령이 내려졌으니 사람들은 의심 없이 따랐다.
소피아가 화산이 터지는 시기까지 정확히 짚었으니 의심하는 이들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한 예언은 로마 황제들의 신성성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사건이 될 터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소피아가 예언한 바로 그 해.
폼페이에 발생한 대규모 지진으로 도시의 여러 시설이 붕괴했다.
이미 공도가 된 지 오래라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이 믿을 수 없는 사태에 경악했다.
로마 황족들의 예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운명의 날.
돈 냄새를 맡은 몇몇 대상인들은 아예 거대한 배를 띄워 저 멀리서 안전하게 화산 폭발을 관람할 수 있는 상품까지 팔아댔다.
놀랍게도 예약은 삽시간에 매진되어 수많은 사람이 바다 위에서 망원경으로 베수비오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목격했다.
그리고 예언대로 화산 분출이 시작되자 그걸 구경하던 사람들은 귀족과 평민을 불문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로마의 전성기는 이후로도 계속됐다.
물론 시대가 흐르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나왔다.
대규모 함대를 꾸린 로마는 대서양을 건너가 신대륙에서 막대한 자원을 수탈해 국고를 채웠다.
이미 기술 수준 차이가 너무 벌어진 상태라 신대륙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동방의 나라들 역시 저항할 수 없었다.
만약 신황 마르쿠스가 남긴 말들이 없었다면 로마야말로 전 세계를 상대로 수탈을 일삼은 제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세계는 언제나 그랬듯 점차 균형을 찾아가며 안정을 이루었다.
그 어떤 암흑기를 거치더라도, 시대의 격변이 오더라도 그것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땅에 사람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한 조금씩이라도 세상은 발전하고 사람들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떠나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자신들의 앞길에 남겨진 수많은 것들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국가도, 사람도 커다란 틀에서 보면 다르지 않다.
백 년, 그리고 천 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쌓여갔고 앞으로도 쌓여갈 것이다.
이 땅 위에 사람이 살아가고 역사가 계속되는 한.
※※※
"아··· 씁, 이번 학기도 망했구나."
처참한 성적이 적혀있는 답안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애초에 이딴 수업을 듣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게 매주도 아니고 매시간 새로운 과제가 추가될 수 있단 말인가.
x플릭스도 이렇게 컨텐츠 추가 속도가 빠르진 않은데.
"어, 뭐야. 김재훈. 너도 망했냐? 기말 때 아무리 잘 나와봐야 b+_도 받기 힘들겠네."
"아 진짜 빡치네. 야, 솔직히 이번 과제는 주제가 너무 모호하지 않았냐? 아니 서양사의 이해라는 과목 이름답게 사료가 남아 있는 걸 주제로 줘야지. 솔직히 이건 그냥 망상을 끄적이는 거밖에 안 되잖아. 그래놓고 근거가 부실하다고 점수를 이렇게 깎아대니······."
"그러게. 나도 필생의 역작을 써서 냈는데 점수가 c더라. 이건 그냥 재이수 각 잡혔다고 봐야지."
나는 친구 놈이 보란 듯이 책상 위에 던진 시험지를 가져가 대충 읽어보았다.
이번 서양사의 이해 중간고사에서 다룬 주제는 로마의 신황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사실 서양사야 마르쿠스를 제외하면 설명이 안 되니까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이번 시험의 주제는 마루크스의 업적을 서술하고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추론하는 것이었다.
업적 서술이야 그냥 암기의 영역이니 그렇다 치지만 후자는 솔직히 좀 문제가 있지 않나?
내가 그 인간이 저렇게 말도 안 되는 행적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를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친구놈은 내 시험지를 보더니 가소롭다며 코웃음을 쳤다.
"넌 진짜 재미없게도 썼다. 마르쿠스의 존재는 이 세상에 신이 실존한다는 증거이며, 마르쿠스는 그 신이 세상에 내려온 모습인 게 확실하다? 너 혹시 마르쿠스교 신자냐?"
"아니 솔직히 설명이 안 되잖아.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그 시대 사람이 어떻게 정확한 원리가 뒷받침된 지동설을 주장하냐고. 그리고 안티오키아에 지진이 일어난 것도 맞췄잖아. 연도까지 특정해서."
"그거야 그냥 후대 사람들이 남긴 구라겠지."
"그게 구라면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겠냐. 학자들이 뭔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 검증도 못 하려고."
날 비웃는 저놈은 어디 얼마나 훌륭한 논리를 끄적였길래 c라는 처참한 점수를 한 번 받았나 보자.
친구의 답안지를 보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혀를 내둘렀다.
뭐지? 미친놈인가?
"마르쿠스는 미래에서 회귀한 빙의자가 분명하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행적은 전부 설명이 가능··· 너 미쳤냐? 교수님이 뭐라고 안 하시든?"
"안 그래도 불려가서 회귀랑 빙의가 뭔지 물어보시더라. 그래서 알려드리고 왔지."
와 그런데도 c나 되는 점수를 받았다는 건가.
새삼 얘보다 조금밖에 점수를 더 못 받은 내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나였으면 진짜 보자마자 F였다. 요새 웹소만 왕창 보더니 진짜 맛이 갔냐? 그런 걸 왜 답안지에 써."
"아니 솔직히 요새 역사 커뮤니티에서 이 설이 대세인 거 모르냐? 마르쿠스는 사실상 그냥 회귀자 취급한다니까? 그리고 마르쿠스가 알게 모르게 부여 쪽에도 좀 편의를 봐줬다잖아. 그걸 보면 사실 회귀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는 마르쿠스도 꽤나 막 나가는 망나니였다는데? 그거 딱 요새 소설이랑 비슷하잖아."
"아오 병신아, 그거야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이 사람 업적이 말이 안 되니까 그런 드립이 나오는 거고. 그리고 요새 소설이랑 비슷한 게 아니고 지금 나오는 소설들이 거기에 끼워 맞춘 거겠지."
나라고 역사 커뮤니티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역사 전공한다고 하면 솔직히 가장 많이 듣는 질문도 그거다.
학계에서는 마르쿠스를 뭐라고 함? 진짜 신임?
그런 질문을 받으면 솔직히 나도 모른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가 요새 웹소설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인터넷에서는 회귀자가 실존한다는 증거.JPG>같은 형식으로 마르쿠스의 자료가 많이 떠돌아다녔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도 환생 빙의 같은 거 하면 끝내주게 잘할 수 있겠다는 망상은 몇 번 해보았다.
그래도 망상은 망상이지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가끔 진지하게 그게 진짜라고 믿는 인간들도 있었지만 난 그 정도는 아니다.
"아니, 드립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만약 마르쿠스가 살아 있었으면, '어, 어떻게 알았지?'하고 놀랄걸?"
"헛소리 그만하고 기말고사 잘 칠 생각이나 하자. 안 그래도 사학과는 취업도 안 되는데 학점 관리라도 잘해놔야지."
"그래도 우리 졸업할 때쯤이면 좀 더 사정이 나아지지 않겠냐. 뉴스에서 엄청 떠들잖아. 아시아 연합이니 뭐니."
"그래봐야 문돌이는 취업이 힘들어."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마침 스크랩해놓은 신문에서 친구놈이 말한 주제가 눈에 띄었다.
요새 들어 특히 로마 합중국처럼 아시아도 일치단결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동북아시아에서 인구가 8천만을 넘는 나라는 우리나라나 일본 정도다.
대륙 쪽은 인구가 가장 많은 중화인민국이 6천만이 간신히 되는 정도고, 그쪽 주변은 허구한 날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해서 지금까지는 힙을 합치지 못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엄청나게 이득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아, 그러고 보니 대륙을 찢어버린 것도 결국 로마의 입김이 컸었구나.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건 우리나라도 로마의 덕을 상당히 많이 봤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교수님에게 다음 발표 주제 정했다고 말씀드려야겠다."
"진짜? 어제까지만 해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징징거렸잖아."
"지금 막 갑자기 생각났어. 그러면 이따 보자."
순간적으로 번뜩인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급한 대로 일단 제목을 노트에 적어두고 강의실을 나왔다.
따지고 보면 내가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어렸을 적 마르쿠스의 전기를 몇 번이나 탐독했을 정도로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천년도 더 전의 사람이 남긴 영향력이 지금까지도 남아 누군가의 삶을 방향을 결정한다.
이것이 역사가 가진 힘이고 수많은 사람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한 줄이라도 남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만이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같은 감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과거란 단절된 시간이 아니다.
현재와 연결되어 있고 그 현재는 앞으로 뻗어나가 미래가 된다.
이번 발표에서는 마르쿠스의 업적을 설명하며 이 사실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보기로 하자.
어렵사리 정한 발표 주제의 제목은 친구가 한창 빠져 있는 웹소설과 비슷하게 보이기도 했다.
[마르쿠스. 로마 재벌가의 망나니.]
< [외전] 에필로그(후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