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재밌어. 재미는 있어. 근데, 이런 게 진짜 팔리는 거야?”
“멍청아, 그걸 지금 어떻게 알아? 일단 내놔봐야 결과가 나오지. 근데 내 감에는 100퍼 대박.”
나랑 누나는 치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떠들었다. 말을 하면서도 서로의 눈동자는 닭다리에 하나씩 꽂혔다.
오늘의 메뉴는 반반.
우리 둘 다 양념을 좋아하는데, 양념 닭다리는 단 하나였다. 누가 그걸 손에 쥘까 서로 눈치를 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평소라면 나이도 많고, 치킨 값도 내고, 나보다 식탐도 강한 누나에게 양보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당당하게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불그스름한 닭다리를 쥐었다.
“소설이라 해도 무슨 17살짜리 애들이 그렇게 발랑 까졌어? 누나는 그런 거 쓰면 창피하지 않아?”
“야, 요즘 것들은 다 그래.”
공무원을 준비한다던 누나는 어느 날 독서실을 때려치우더니 로맨스 소설을 출판했다.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제법인 듯했다. 이따금 내게 옷이나 신발 따위를 사줬고, 매주 토요일, 그러니까 치맥데이 날이면 꼭 자기가 돈을 냈다.
대신에 그 대가로 신작이나 기괴한 에피소드를 쓸 때면 내게 감상을 요구했는데, 대충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골든올리브가 두 마리 치킨으로 메뉴가 바뀌니 감상은 아주 구체적이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누나의 소설을 음절 단위로 꼼꼼히 읽은 나는 불평을 쏟아냈다.
“이런 걸 읽는 사람이 진짜 있다고?”
소설의 주인공, 비숏은 17세로 몰락했지만 유서 깊은 공작 가문의 막내 영애인데, 주인공답게 어마어마하게 예쁘다는 설정이었다.
이걸 시작부터 사자성어를 12개나 써가며 5500자로 설명했다.
온갖 보석과 갖가지 비유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런 거? 이런 거라니, 야, 그게 요즘 최신 유행이야.”
“이젠 진짜 별의별 걸 다 유행 따지네.
그 긴 설명을 읽고 나면 비숏이 불행한 이유를 11,000자로 설명한다. 부모님은 무관심하고, 언니는 질투하고, 아카데미에서는 악역 영애가 괴롭힌다.
이렇게 독보적으로 불쌍한 포지션임을 각인해둬야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공감하며 글을 따라간다는데, 나로서는 전혀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마지막으로는 화룡점정으로 누나가 평소 입에 달고 사는 똥차가 등장했다. 내가 로맨스 판타지 감수성이 부족한 건지 이런 캐릭터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 의아했다.
라파엘 아이작.
비숏한테 집착하고 제 욕구를 강제로 들이미는 스토커 캐릭터.
비숏은 라파엘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가문의 위세가 미치지 못하는 아카데미로 도망치는데, 라파엘은 거기까지도 추격했다.
“그 새끼를 어떻게 쳐 죽여야 할까?”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쳐 죽여?”
나는 누나의 과격한 단어 선택에 킥킥거렸다. 그러자 누나는 후라이드 닭다리로 내 손등을 톡 때리더니 말했다.
“야, 넌 내 글을 몇 개나 봤는데 그걸 몰라? 그게 포인트라니까. 라파엘을 얼마나 처참하게 죽이는지가 재미의 요건이라고. 거기서 독자들이 만족해.”
“고문이나 뭐 그런 거 하면 되잖아. 마법도 있는데.”
“이 멍충아.”
뜯던 닭다리마저도 내려놓은 채 누나는 한참을 떠들어댔다. 라파엘을 단순히 죽이는 게 아니라 누가 죽이는지가 중요하다고. 그 후보로는 황태자, 북부대공, 천재기사, 마탑주, 등등이 있단다.
남주들에 대해서 침을 튀기며 설명하는데, 치킨은 서서히 식어갔다. 일단은 먹자. 그 좋아하는 치킨마저도 내버려 둔 채 설정 보따리를 풀어내는 누나를 뒷전으로 미뤄뒀다.
* * *
“그때 조금만 잘 들어둘걸.”
후회라는 건 암만 빨리해도 늦는 법이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속이 쓰렸다.
난 덥수룩하던 곱슬머리가 하루아침에 찰랑거리니, 그게 어색해 머리털을 뒤로 쓸었다.
“그래서 누가 날 죽인다는 건데.”
황태자랑 북부대공에 천재기사에다가 마탑주까지.
후보가 너무 많았다.
제1화
“일어나세요. 기상 시간이에요.”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확실한 건 우리 엄마는 아니었다.
대뜸 모르는 사람이 기상하라고 말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소보다 개운하고 피로가 풀린 몸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아?”
탈색을 3번쯤 한 금발에 눈알에 파란색 서클 렌즈를 낀 여자였다. 나이는 30은 넘었는데, 50은 안 될듯했다.
누구지? 뭐 하는 사람이지?
여자의 신원을 파악할 단서가 없나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내 입에서 자연스레 여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코···. 코로망···?”
코로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은근히 힘을 써가며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빼앗아 갔다. 그녀는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 일로 한 번에 일어나시네요? 씻고, 정신부터 차리세요. 오늘도 아무 일정 없지만, 일어나기는 제시간에 해야죠.”
“어···. 어어···.”
“깨운 다음에 보고 있으면 재촉하는 거 같으니까 나가달라고 하셨죠?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끝나면 말하세요.”
코로망은 내가 진짜로 잠에서 깬 게 맞는지 눈을 몇 번 맞춰보더니 방에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다음에야 머리를 붙잡았다.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들어 있었다.
“라파엘 아이작.”
이건 내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차지한 몸의 본래 주인의 이름이자, 누나가 쓴 <신데렐라 랩소디>의 악역 캐릭터.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캐릭터가 왜 있어야 하냐고 누나랑 따졌는데, 그 캐릭터 속에 들어왔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에 당황하기도 전에 불안감에 털이 곤두섰다. 어제 누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야, 넌 내 글을 몇 개나 봤는데 그걸 몰라? 그게 포인트라니까. 라파엘을 얼마나 처참하게 죽이는지가 재미의 요건이라고. 거기서 독자들이 만족해.”
누나는 이 몸의 주인을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라 쳐 죽인다고 했다. 라파엘을 얼마나 호쾌하고 시원하게 죽이는지가 독자들의 만족 포인트랍시고,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던 걸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말이 되는 거냐고 따지는 건 명줄부터 단단히 붙잡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일단은 살기부터 해야 할 거 아닌가? 뭔가 뾰족한 수가 없는지 원작의 내용을 곰곰이 더듬어볼 때였다. 코로망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 왔다.
코로망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또 졸았죠? 벌써 해가 다 떴으니까 빨리 일어나요. 씻기라도 하란 말이에요.”
“어어….”
쿠웅!
코로망은 전보다는 강한 세기로 문을 닫았다. 영주의 혈족을 제외하면 저택에서 입김이 제일 셌으니 저 정도는 하는 거겠지. 게다가 라파엘의 친모를 모셨다는 설정 때문에 원작에 라파엘도 코로망을 어려워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 직후, 어느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느닷없이 날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어어, 안녕···? 좋은 아침···?”
“예···. 좋은 아침입니다.”
내게 인사하는 시종에게 적당히 답을 해주며 손을 흔들었다. 시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발을 움직였다.
원작의 라파엘은 싸가지가 없는 탓에 시종이 인사를 하면 무시했는데, 그러면서도 또 시종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험한 말을 지껄였다.
그걸 보고는 인사 좀 받아주면 안 되나 싶었지. 이게 뭐라고.
흔들었던 손을 떨구면서 잠시 고민했다.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다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 게 아닌가?
아니, 아마 아닐 거다.
으레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니 너무 주변 시선 신경 쓰지 말라는 건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여기 시종들도 라파엘이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보다 하고 넘어가겠지.
다른 사람이 몸을 차지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곳 저택의 시종들은 라파엘을 아주 무서워 했다. 마치 5살 어린애를 바라보듯 라파엘을 두려워했다.
라파엘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떼쓰지는 않을까 걱정했고, 어떤 멍청한 짓을 벌여 사고를 칠까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다.
그래도 라파엘이 영주였는데, 라파엘이 바른 통치를 하길 바라는 이가 하나 없었다.
그냥 문제 만들지 말고, 귀찮은 일 만들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분위기에 안심했다. 성실하고 능력 있는 영주한테 빙의했다면, 그야말로 큰일 날 뻔했지 않은가?
그랬다가는 내가 한 영지를 말아먹을 뻔했다. 내가 손대지 않아도 잘 돌아가는 영지라니, 운이 좋았다.
그래도 조심하기는 해야지.
하지만 또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라파엘이 이제껏 무능했다고, 앞으로도 무능해도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래서야 동생들한테 영지를 뺏겨도 할 말이 없었다.
“흐음.”
옷을 벗고 샤워 부스에 들어왔다. 마법으로 만들었다는 설정인데, 편의성이 참 잘 갖춰져 있어 안심했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은 없어도 샤워기는 있어야지. 호스의 물을 튼 다음 거울에 시선을 향했다.
어색하기만 한 얼굴이 나를 마주 봤다.
한눈에 봐도 성깔 더러워 보이는 인상. 길 가다가 눈 마주치면 아무 이유 없이 눈을 깔아야 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거기다 소심하게 중지를 올려줬다.
라파엘 아이작.
누나가 쓴 로맨스 판타지 소설, <신데렐라 랩소디> 등장하는 똥차.
메인 남주를 빛내기 위한 그림자.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한 장치.
막판에 메인 남주한테 얻어터질 계획.
그게 나였다.
내가 읽은 건 원작의 4권까지.
망나니였던 라파엘은 남동생과의 예상하지 못한 결투로 허무하게 가주 자리를 빼앗겼다. 영지를 빼앗기 위해 동생은 어려서부터 꾸준히 검술을 연마했는데, 바보같이 그도 모르다가 된통 당했다.
라파엘이 하도 멍청해서 가문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 줄도 모른 탓이었다. 마음 맞는 부하라도 하나 있으면 귀띔이라도 해줬을 텐데, 무능한 놈.
라파엘은 가주 자리를 잃은 후 그에 머리가 돌아버렸는지 여주를 납치하려다 어느 남주에게 발각당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누나가 절묘한 부분에서 장면을 끊은 탓에 밝혀지지 않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라파엘의 운명은?
라파엘의 납치 장면을 발견한 캐릭터가 누구인지에 따라 경우의 수가 달라졌다.
황태자한테 맞아 죽거나, 마탑주가 난사한 마법에 폭발하거나, 북부대공에게 붙잡혀 악마의 힘에 찢기거나, 제프린의 검에 목이 썰리거나 하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난 살고 싶었다.
가능하면 풍족하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 위험이 도사리는 험난한 곳은 피하고 싶었다. 마물이 득실거리는 북부라든가, 소설의 주요 무대인 아카데미 같은 곳은 눈길도 주기 싫었다.
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아플까?
안전하고, 편안한 내 영지에 꼭꼭 숨어서 호의호식하고 싶었다.
빙의 자체는 괜찮았다. 윤택한 환경에서 하인들 부려 먹으며 놀고먹을 수 있으니까. 취업 안 해도 되니까.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이 삶을 영위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여주가 어느 남주와 이어진 후에 나랑 있었던 일을 발설한다면?
끔찍한 결말이 나를 기다렸다.
라파엘은 여주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척 접근했지만, 사실 그녀의 뒤에 있는 배경이 목적이었다. 본인의 능력치가 달리니 그녀의 집안을 집어삼켜 제 세력을 더 키우려는 것. 그녀를 감정적으로 농락한 것이다.
누나가 쓴 소설의 오랜 독자로서 말해보자면 이건 사형감이었다.
여주가 남주와 이어진 후, 날 죽여달라고 부탁한다면 난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순순히 목을 내놓으며 깔끔한 죽음을 애원해야 한다.
이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아카데미는 가야 했다.
이곳에 있다가는 남주가 날 죽이러 찾아오기도 전에 굶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생 놈이 영주 자리를 빼앗은 다음에는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원작에서는 라파엘을 가문에서 쫓아냈다. 보통 영주 자리를 뺏은 다음에는 후환을 지우기 위해 목을 친다는 걸 감안하면 너그러운 처사였지만, 나는 잘 살고 싶었다.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러려면 영주 자리는 지켜야 했다.
이를 위해서라도 아카데미는 가야 한다. 영주 자리가 위태위태한 상황에 영지를 비운다는 게 멍청한 짓 같기도 했지만, 이곳에 남아 있는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지식부터가 그랬다. 아카데미 안에 있어야지만 써먹을 수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카데미만 가면 된다. 원작의 배경이었던 아카데미. 그곳이라면 써먹을 수가 몇이나 있었다. 돈을 쓸어 담을 수도 있고, 내 몸을 지킬 무력을 키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살아남을 길을 개척할 수가 있었다.
가장 위험한 건 원작의 남주들.
그들 중 하나가 여주와 이어진 후, 나를 죽이러 오는 일만큼은 꼭 피하고 싶었다. 이걸 막기 위해서는 여주가 다른 남주와 이어지지 못하게 봉쇄해야 했다. 가능할까?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걸까?
여주가 남주들이랑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
원작의 여주 맞춤형 설정의 남주들을 떠올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차라리 일부일처제 세계관이 일처다부제로 바뀌는 게 더 그럴듯했다.
여주와 남주가 이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여주 맞춤형 설정. 이건 지나치게 강력한 무기였다. 현실적으로 여주가 남주들이랑 엮이지 않는 건 어려울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기어코 여주는 남주와 이어질 듯했다.
“그래도 포기는 못 하는데.”
이거 말고도 방법은 하나 더 있기는 했다. 이것도 만만하지 않게 어려워서 그렇지. 여주랑 만나서 화해하고, 과거에 벌였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빌면 됐다. 그러면 여주가 남주와 이어지고도 생존할 수 있었다.
가능할까?
내가 여주라도 라파엘 같은 놈이랑 친구를 할 거 같지는 않았다. 이놈이 과거에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그러겠는가.
결론은 뭐가 됐건 간에 내가 살아남기란 힘들다는 것.
그렇다고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시도라도 해보자.
여주가 남주들이랑 이어지지 말던가.
내가 여주랑 친구 먹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