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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2화 (2/125)

제2화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세우기 전, 확인할 게 있었다.

바로 지금의 몸 상태.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적에 대해서는 원작을 읽어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나를 아는 일뿐이었다.

라파엘 아이작의 표면적인 소개가 아니라 진짜 능력을 알아야 했다,

아이작 가문은 칼질 잘하는 걸 영주의 최고 덕목으로 삼는 데서 알 수 있듯 무예를 중시했다.

집안에 큼지막한 연무장이 있는 건 당연한 일. 난 연무장으로 나가 스트레칭하고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형님, 뭐합니까?”

그때 나타난 건 내 동생 놈. 정확히 표현하면 라파엘의 동생. 이름은 제리코고 성은 라파엘과 같은 아이작이었다. 제리코는 라파엘과 닮은 얼굴이었는데, 조금 더 거칠게 생겼다. 라파엘이 양아치 같은 얼굴이라면 제리코는 깡패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남자다워 보이고자, 더 강해 보이고자 외모를 가꿨는데, 근육을 기르는 건 그 방법 중 하나였다.

커다란 덩치에 대충 기른 머리카락은 귀족이라기보다는 어디 용병단의 단장 같은 인상이었다.

“뭐하기는, 운동하러 왔지.”

“하하, 형님이 말입니까?”

“어. 내가 영주인데 가끔 단련하기는 해야지.”

“이제야? 거, 별 의미 없을 거 같은데. 그냥 관두는 거 어떻습니까?”

제리코는 강하다. 라파엘과 싸워 이기면 영주 자리를 뺏을 수 있다는 셋째의 꼬임에 넘어가 온종일 검만 휘두르며 살았다.

그의 실력은 어림잡아도 보통의 기사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렇게 은근히 말을 놓으면서 날 낮잡아보아도 딱 잘라 한마디 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다 한 대 얻어맞으면 아프잖아. 지금은 사려야지.

제리코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턱을 까딱거렸다.

“뭐 됐습니다. 내감 참견할 일이 아니지. 열심히 해보슈.”

그는 이미 한 차례 훈련했던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었는데, 그것을 소매로 닦으며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걸 확인한 다음에야 속에 있던 숨을 내뱉었다.

“하아···.”

사람이 뭐 저리 험악하게 생겼냐.

일이 잘 풀리면은 몰라도 꼬이게 되면 저놈이랑 영주 자리를 놓고 한판 싸워야 했다.

어우. 이거 열심히 해야겠네.

우선은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연병장에 있는 철 덩이를 들었고, 몇 바퀴 뛰어보았다. 간단하게 근력이나 근지구력, 폐활량 따위를 검사했다.

“허억! 허억!”

턱을 하늘에 향한 채 가쁜 숨을 토했다. 숨 쉬는 게 힘들었다.

라파엘의 몸은 참담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에는 열심히 수련했다는 설정이라 얼마간은 기대했는데, 눈물이 글썽거리게도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무게를 드는 데도 놓칠 것만 같고,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폐가 터질 듯했다.

“그래도 미리 해놔야 한단 말이야.”

아카데미만 가면 여러모로 급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체력만은 예외였다.

이건 시간을 투자한 만큼, 땀 흘려 훈련한 날의 수만큼 발전했다. 여기서 열심히 하든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하든 효율은 엇비슷했다.

그러니 미리미리 해둬야지.

아카데미에서 보낼 시간은 이곳의 시간보다 소중했다.

나는 고통을 참고 버텼다.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해주는 여러 조언이 있다. 대표적인 게 쉬엄쉬엄 해라. 근신경계가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하고, 운동을 막 시작한 초기에는 근육통이 심하고 뭐 여러 근거가 있는 조언이었다.

“하악! 하악!”

나는 첫날부터 무리했다. 이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내가 아까 그놈이랑 싸워야 할 수도 있었다. 지면 영주 자리를 빼앗긴다. 근데 쉬엄쉬엄할 여유가 어디 있는가.

배에 풍선처럼 숨이 가득 차서 이대로라면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땀이 뚝뚝 떨어졌다. 푹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감각이 불쾌했다.

다 관두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고생해야 나중에 덜 고생하니까. 나는 한참을 달리고서야 멈췄다. 이제 더는 무리였다. 제리코의 얼굴을 보니 괜히 위기감이 들어 과하게 뛰었다.

내일도 똑같이 뛰어야 하는데, 여기서 더 뛰었다가는 지장이 생긴다. 이쯤에서 몸을 혹사하는 건 관두자.

신체 능력은 여기까지였다.

다음에 체크할 것은 이 몸뚱이로 어떻게 마나를 개발할 수 있는지였다.

나는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코로망에게 용량이 적은 마석 몇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

저택에 있는 마도구에 마나를 공급하는 건전지 같은 용도의 마석을 몇 받았다.

마나를 익혀야 한다. 아카데미에 가서 뭘 하든지 마나는 유용했다.

마나에 대한 재능은 총 3가지로 나뉘었다.

타고난 마나량.

마나에 대한 인지력.

보유한 마나의 제어력.

각기 타고난 재능에 따라 마나 사용자의 진로가 바뀌었는데, 마나를 발현하는 데 필요한 건 이 중에서도 인지력에 해당했다.

사실 마나량이야 마나 연단을 열심히 하면 무조건 증가했고, 제어력 또한 비슷했다. 마나를 단련한 시간과 정비례했다.

그러나 인지력만은 달랐다.

타고나는 거, 그러니까 재능이 중요했다. 즉, 노력으로는 어찌하기 힘든 분야였다.

보통은 인지력을 타고났느냐를 마나의 재능이라 판단했다. 흔히 마나를 익히길 포기하는 이유로 인지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걸 꺼내 들었다. 타고나지 못하면 끝이니까.

“지금 몸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지만.”

안타깝게도 누나는 소설에서 라파엘의 마나 인지력을 언급하지 않았다.

즉, 이 라파엘의 몸뚱이는 마법 재능조차 없다고 보면 됐다.

하지만 이 소설의 설정을 대강 알고 있는 나는 인지력을 키울 방법을 알고 있었다.

투두둑!

눈을 감은 채 손안의 마석을 공기놀이하듯 허공에 던졌다.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의 마석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런 다음 가만히 서 5초를 기다렸다.

흐읍 하. 흐읍 하.

내 숨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훈련을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로 마석의 극히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며 바닥을 더듬었다.

마나는 전신을 타고 흐르지만, 그중에서도 손끝이 으뜸으로 예민했다. 숨 죽인 채 가만히 손끝을 바닥에 가져다 대고 있으면 마석이 뿜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달팽이가 기어가는 듯 바닥을 따라 움직였다.

단순히 눈 감고 바닥을 더듬으며 마석을 찾는 게 아니라, 마석을 느끼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활동.

눈을 감은 채 마석을 찾았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마석을 감지하는 과정이었다.

아주 느릿하게 손가락의 위치를 옮겼다. 그 직후 손가락 끝에 뭔가가 닿았다. 눈을 뜨자 마석이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아?”

적어도 30분은 각오하고 첫 시도에 들어섰다. 어쩌면 2시간은 넘게 헛손질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설혹 마석을 감지하지조차 못해서 시도도 못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뭔 일인지 3분이 채 되기 전에 마석을 붙잡았다.

어쩌다 보니 마석을 가까이 던졌나 싶었으나 또 3분이 되기 전에 마석을 발견했다.

이건 이상했다. 마나를 발현도 못 한 초짜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게… 되네?”

전생에 나는 마법을 배우기는커녕 마나를 다루지도 못했다. 그야 현대에 살았으니까.

그렇게 일생을 보내다가 눈 떠 보니 라파엘의 몸을 차지했다. 그러니 남들도 다 이 정도 수준일 거라 간주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라파엘의 몸에는 제법 많은 양의 마나가 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 마석을 찾아냈다는 것은 마나 인지력도 타고났다는 뜻.

이놈이 마나 연단을 성실히 했을 리는 없으니 순전히 타고난 재능.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였다.

* * *

제리코 아이작은 가문의 둘째였다. 그리고 이 말은 가주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다는 걸 의미했다.

친부가 미리 유언이라도 남겼다면 재산이라도 분배받았겠으나, 그의 아버지는 어느 흑마법사의 손에 급사했다.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냥 빈털터리.

그때 제 동생, 이블린 아이작이 말했다.

“라파엘이랑 싸워서 이기면 다 네 거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같이 다 뺏어버리자.”

제리코가 보기에 이블린은 영특하면서도 게으른 아이였다. 불가능한 나무라면 팔조차 뻗지 않을 애였다.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해볼 만 하다는 뜻이었다.

가주의 자리는 제리코, 실권은 이블린이 갖기로 약속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달랐기에 가능한 일. 그렇게 가문의 힘을 나누기로 약속했고, 둘은 집안을 먹어 들었다. 제리코에게는 나름대로 칼질에 재능이 있었고, 이블린은 가문의 인사들과 친밀했다.

제리코는 검술 실력을 키웠다.

가문의 상당수는 이블린을 지지했다.

이제 제리코가 이블린과 손을 잡은 채 라파엘에게 가주 자리를 놓고 결투를 신청하더라도 커다란 반발이 생기지는 않을 듯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제리코는 금일 아침 연병장에서 라파엘과 마주쳤다.

연병장에서 그를 만난 건 아동기 시절이 지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는 자신도 라파엘도 열심히 훈련했다. 아버지께서 괴롭지 않을 정도로 훈련을 조절해주신 탓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버텨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하기 싫어도 해야 했고, 힘들어도 참아야 했다. 그때 라파엘은 도망쳤고, 제리코는 끝까지 남았다.

그때 뿌린 씨앗은 자라 나무가 되었다.

라파엘은 끽해봐야 삼류였다. 아니, 검술 실력만 따진다면 오히려 그때만도 못할 테니 삼류조차 안 될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이제 어엿한 기사라 할 법했다.

만약 당장 싸운다고 하면 채 5분이 걸리기도 전에 끝장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잠잠히 참고 있는 것은 이블린의 만류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사를 치르는 건 가신 모두를 끌어들인 다음이라 말했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라 당부했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넉넉히 잡아도 1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눈치라도 챈 건가.”

계획이 새어 나갔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나 제리코는 코웃음 쳤다. 라파엘 그 머저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심란한 건 그냥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참을성이 부족하다 못해 없다시피 했다.

조금만 힘들어도 검을 집어던졌고, 조금만 괴로워도 연병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런 놈이 하루 만에 달라졌다. 힘들고 괴로워도 몸을 단련했다.

“아니, 신경 쓸 거 없어. 얼마 안 가서 관두겠지.”

설령 진심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해도 너무 늦었다. 라파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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