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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3화 (3/125)

제3화

체력을 키울 땐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들 한다. 며칠 땀 좀 흘렸다고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그 예시로 나는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비슷한 거리를 뛰고, 비슷한 무게를 드는 데도 몸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 좀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도 힘들었다.

“허억!”

앞쪽에는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제리코가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건 첫날뿐이었고, 그 이후로는 어쩌다 얼굴이 마주쳐도 무시하고 지나갔다.

제리코는 뒤돌아 나를 힐끗 보더니 보란 듯이 가속했다. 안 그래도 빨리 뛰던 놈이 이제는 날 듯이 파닥파닥 질주했다.

그는 어느새 내 앞에서 사라지더니 연병장을 빙글 돌아 다시금 나를 추월했다. 콧방귀를 끼며 옆으로 지나가는 걸 보니 숨이 차지도 않는 듯했다. 그래, 대단하네. 그런데 너는 너고 나는 나지.

속으로 손뼉을 쳐준 다음 멈춰 서며 숨을 골랐다. 제리코는 여기에 승부욕이라도 있었는지 나를 보며 히죽거리며 웃었다. 자기가 이겼다는 표정이 어딘가 우스웠다.

그를 무시하고, 연병장 밖으로 나왔다.

며칠 몸을 굴리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어디까지 해야 다음 날 지장 없이 운동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그대로 씻기 위해 자택으로 돌아왔다.

“무슨 바람이래, 열심히 하네요? 보기 좋아요.”

“그러게.”

“진작에 그랬으면 좋았잖아요. 이제부터라도 꾸준히 해요. 꼭.”

주먹을 꽉 쥐어 보이는 코로망의 자세가 재밌어 킥킥거리며 웃었다.

코로망은 죽은 라파엘의 친모, 디모네의 하녀였다. 그녀는 하녀로서 아이작 가문에 발을 들였으나 능력을 인정받았고, 가문의 살림꾼 자리까지 올라섰다.

그야말로 능력자.

코로망은 이곳에서 일하는 어느 하녀들보다 자그마한 체구에도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연차가 쌓인 하녀들도 코로망의 손짓 한 번에 깜빡 죽었다.

“씻으시고 바로 나와서 식사하세요. 배고프잖아요.”

“좀 오래 씻을 거 같으니까 준비는 천천히 해줘. 간단히 먹을게.”

“배고플 텐데 그거로 괜찮겠어요?”

“응. 괜찮아.”

“안 괜찮아요. 먹은 만큼 힘이 나는 법인데.”

코로망은 디모네가 남긴 모든 것을 소중하게 다뤘다. 디모네의 자식뿐만 아니라 가문과, 자택, 그곳에 남은 가구와 사람들까지 전부 말이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그녀는 든든한 아군이었으나 나로서는 여러모로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얼핏 보면 나를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지원을 해주는 듯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라파엘을 배신하고는 남동생에게 붙을 예정이었다.

어찌 보면 배신이 내정된 암세포였지만, 나는 그녀를 그리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배신할 만하니까 배신했겠지. 라파엘이 그 모양인데 어쩔 수가 있었겠나.

내가 읽은 원작의 라파엘은 쪼잔하고 성질머리가 더러울 뿐만 아니라 가문을 이끄는 능력 자체가 결여됐다.

아니, 차라리 가만히만 있으면 될 걸 괜히 나서서 가문을 적극적으로 말아먹었다.

“메뉴는 간소하게 준비할 텐데 양은 넉넉히 할게요. 배불리 먹어요. 그런데 혹시 새벽에 씻었던 거예요? 아니면 단련한다고?”

“아니, 왜? 뭣 때문에 그래?”

“씻으실 때를 제외하고는 반지를 안 빼잖아요?”

“아아.”

코로망의 말대로 나는 주렁주렁 찼던 장신구들을 벗어 주머니에 넣어둔 참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벌려 그 안에 꽉 찬 장신구를 보여주었다.

라파엘은 뭐가 어찌 된 놈인지 반지는 물론이고 브로치, 펜던트, 목걸이 따위를 주렁주렁 달았다.

그게 어울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불편해서 어찌 차고 있나 싶을 지경에 관절 마디마디가 뻐근했다.

“그냥, 이제 이것들 좀 불편해서 다 빼려고.”

말을 하면서 코로망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녀는 내 주머니 속 장신구 중에서 소지에 겨우 차고 있던 낡은 반지에서 눈동자를 정지시켰다.

반지는 푸른색 센터 스톤이 박힌 물건이었는데, 푸른 보석은 사파이어도 아니고 꼭 조잡한 큐빅 같았다.

거기다 호수가 너무 작아 소지에나 간신히 끼고 있던 데다가 싸구려 티까지 팍팍 나는 물건이었다.

“그, 반지도 빼셨네요?”

“응?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코로망은 급히 시선과 표정과 추스르며 응답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낌새였다. 반지에 박힌 시선이 집요했다. 눈알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거 갖고 싶어? 가지고 싶으면 말해. 줄게.”

내 말을 듣자마자 코로망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그녀는 잠시간 숨을 참더니 말했다.

“정말로 제가 이걸 받아도 되겠습니까?”

“어. 이제 안 찰 거니까 그냥 어디 넣어두기보다 새 주인 찾는 게 좋지. 그거 말고도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난 이제 필요 없는 것들인데. 아, 이거 다 줄까? 그래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반지 하나면 충분해요. 반지 하나면.”

코로망은 내게서 얼굴이 안 보이게 고개를 숙이더니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다루겠습니다.”

저택 내부 사정을 자세히는 몰라도 코로망의 봉급이 작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데 안 가고 그래도 여기 남아 있는 거 보면 꽤 받지 않을까? 아무리 의리니 뭐니 해도 일단 돈은 맞춰줬겠지.

그녀의 봉급이라면 이런 싸구려 반지야 몇 개고 살 수 있는데, 진심으로 고마워하니 의아했지만 넘어갔다.

선물을 받으면 기쁨의 리액션을 보이는 게 예의기도 하니까. 코로망은 사회성이 좋으니까 이거도 업무의 연장선이겠지.

* * *

코로망이 방에서 나간 후 후딱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식사 준비는 천천히 해달라고 말해둔 터였으니 시간이 약간 여유 있었다.

그럼 해볼까.

눈을 감고 마석을 던졌다.

체력의 발전은 미미했어도 눈을 감고 마석을 찾는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이대로 현대로 돌아간다면 눈 감고 돌 찾기의 달인 같은 걸 해도 될 정도였다.

마력이 가장 예민한 부위는 손. 그러면 가장 둔감한 부위는 어디일까? 바로 발이었다. 이제는 발끝으로도 마석을 찾아낼 만큼 며칠 사이에 실력이 발전했다.

발을 휘적휘적 움직이며 바닥에 뿌려둔 마석을 하나씩 짚었다.

이제는 마석을 찾는 데 난이도를 올렸다. 마석의 크기가 클수록 뿜는 마나가 조금씩 많았는데, 그 순서대로 마석을 찾아냈다.

한 가지만 빼면 만족스러운 성장이었다.

“원래 이 정도쯤이면 마나를 발현했어야 하는데.”

마석은 기막히게 찾으면서 마나를 쓰지는 못했다. 이게 다 연습이 부족한 탓.

인지력도 마력의 양도 뛰어난데, 이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까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거였다.

다시 말해 대기만성형이라 해야하나.

이 거대한 마력을 제대로 발현해 내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했다.

훈련법을 아는 나도 짜증이 나는데, 라파엘은 어떻겠는가.

나는 마석을 2번 더 찾은 다음에 식사 자리로 나갔다.

“잘 먹을게. 보기만 해도 맛있네.”

“네.”

“코로망은 이미 식사했고?”

“네. 아침에.”

코로망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듯했는데, 뭔가 사정이 있겠지 싶어 개의치 않았다.

밥 후딱 먹고 돌아가서 다시 마석 찾아야지, 다짐하며 입에 음식을 넣었다.

* * *

10대였을 시절에 코로망은 지금과는 영 다른 모습의 말괄량이였다.

디모네가 아니었다면 어느 영애도 하녀로 부리지 않았을 만큼 성정이 드셌다. 내면세계가 워낙 활발해서 걸핏하면 화를 냈고, 울었고, 소리를 질렀다.

코로망은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디모네가 보기에는 제가 친동생 같았을까? 그런 애를 왜 그렇게 감싸고 돌았을지 이따금 궁금증이 들었다.

‘고마운 분이셨지.’

디모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무럭무럭 잘 자라기란 불가했다. 이제는 자신이 보기에도 훌륭한 어른이었다. 그건 다 디모네의 덕이었다.

코로망은 그 은혜를 갚고자 디모네가 흑마법사의 저주로 인해 병에 걸려 방에서 골골댈 때 누구보다 극성으로 보필했고, 지금까지도 더 잘 해주지 못한 걸 후회했다.

이미 디모네가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받은 은혜라면 명백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갚고자 가문을 키우려 노력했다. 디모네가 남긴 많은 것들을 힘이 닿는 한 보존하려 열을 다했다.

가주에 대한 간섭도 그중에 하나.

라파엘이 아이작 가문의 장남으로 작위를 승계한 지 1년이 다 되어갔으나 그간 그가 제대로 한 일이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저지른 사고 명단을 읊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다. 라파엘은 그저 여자에 눈이 멀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작 가문에서는 말이 나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문이 망하는 게 아니냐고.

코로망은 그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서 들은 인물이었고, 가문을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라파엘을 내쳐야 하는 게 아닌가.

당장 결론을 내리기에는 섣불렀지만, 언제까지나 라파엘이 이대로라면,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치는 있나 보네.”

코로망은 라파엘이 넘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쉥크는 녹슬었고, 암은 휘었으나 자그마한 보석은 흠집도 없이 은은한 푸른빛을 발광했다. 뿜는 빛이 옅어 얼핏 보면 장난감 같았지만,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청광석이라는 걸 알아볼 것이다.

청광석이 박힌 반지.

디모네가 남긴 유산으로 라파엘이 무척이나 애착했던 물건이었다.

라파엘은 오랫동안 아껴왔던 반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제게 선물했다. 라파엘이라고 해서 반지를 포기하고 싶을 리도 없는데, 어째서?

라파엘이 가문에서 자신을 향한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감지했다.

어떻게?

코로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문 내에서의 정보라면 그녀의 귀를 통하지 않는 일이 없는데, 누가 라파엘에게 붙은 거지?

‘나도 모르게 자기 사람을 만들었어.’

라파엘은 아끼던 반지를 선물함으로써 정보력을 과시했고, 상황 개선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코로망은 조금쯤은 안심해도 좋겠다며 시시덕거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블린 아이작에게 찾았다. 이블린은 라파엘의 두 동생 중 하나였는데, 근래에 들어 그를 갈아야 한다고 더욱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블린은 라파엘을 닮아 장신구를 좋아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찰 수 있는 장신구라면 일단 몸에 더하고 봤다.

머리핀을 시작으로 목걸이를 차고도 스카프를 둘렀고, 손가락이 무겁지 않을까 우려가 들 만큼 많은 반지를 끼웠다.

그런 사치스러운 모습과는 별개로 이블린은 아이작 가문의 세 남매 중 가장 똑부러진 편이었다. 코로망은 차라리 이블린이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녀를 지지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을 정도.

“무슨 일인가요?”

코로망은 라파엘로부터 받은 반지를 꺼냈다. 라파엘이 선물했다고는 하나 제가 갖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그걸 어떻게?”

이블린은 눈을 깜빡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라파엘 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걸··· 알아차린 듯합니다.”

“그 머저리가?”

“아주 머저리는 아닌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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