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꼼지락 꼼지락.
눈을 감은 채 발가락으로 마석을 붙잡은 다음 허공으로 던졌다. 떨어지는 마석을 발등으로 받았고, 이를 위로 튕겨 올렸다.
타악!
마석은 낙하하며 정확히 이마에 착 달라붙었다. 기가 막힌 묘기.
매일 같이 마석을 들고 씨름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 거리가 약간은 떨어져 있어도 마석을 탐지할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석이 있을 법한 곳을 특정한다면 마석이 내 몸속 마나에 반응했다.
이제는 몸속에 마나가 있다는 게 예민하게 느껴졌다.
이거를 외부로 뿜지 못해도 내 몸속에 있기는 하다는 걸 인지하니 그래도 나아지고 있구나 싶었다.
훈련의 마지막으로 이마에 마석을 튕겨 뒷목에 위치시켰다.
스스로의 성취에 감탄하고 있는데, 방안으로 코로망이 입장했다.
점심은 먹었고, 시간대를 고려하면 저녁은 아닌데, 뭐지? 당황스러워 순간 정지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코로망은 두 눈 멀뚱멀뚱 뜨고 날 보더니 말했다.
“손님 왔어요.”
“어. 응. 나가볼게.”
코로망은 배려심 넘치게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주었다. 그녀에게 감사하며 목의 마석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손님이라. 라파엘을 찾아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이제 올 게 왔구나.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잡고, 저택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사람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아, 애구나.
여주를 보자마자 5500글자의 주인공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신데렐라 랩소디>의 주인공, 비숏 퓨어문.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세상에 이런 얼굴이 둘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외모일 뿐인데, 자기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걸 적극적으로 광고했다.
'칠흑' 같은 머릿결부터 '루비'를 박은 듯한 눈동자에 '오밀조밀' 이목구비와 '백옥'같은 피부까지 글에서 읽은 설명 그대로였다.
이게 같은 인간인가 싶은 미모에 혀를 내둘렀다.
입에 담는 것만으로 쪽팔려 죽을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 본인은 턱을 살짝 치켜들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녀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치니 일순간 숨이 멎었다.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아무리 가문의 힘을 뒤에 입었다고 한들 아카데미 내에서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저를 따라오셔도 원하시는 바는 영원히 얻지 못할 겁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당혹스럽기도 했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원작의 프롤로그 직후의 도입부였다.
라파엘은 자기도 아카데미에 간다고 떠들어댔는데, 이에 주인공인 비숏이 찾아와 일침을 놓았다. 그녀는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라파엘을 설득했는데, 라파엘은 귀를 닫고 생떼를 부렸다.
너 따라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러 가는 거라 박박 우겨댔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간 놀고먹기만 반복했던 라파엘이 공부라니, 퍽이나 그렇겠다.
그러나 하필이면 나는 진짜 수학하러 가는 게 맞았다. 아카데미를 가야 일단은 내 영주 자리를 지킬 수도 있었다.
“어. 그래? 그렇구나.”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지 않을 노릇에 바보같이 반응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멍청하니 수긍하고 있자 비숏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자기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태도였다.
여기까지 찾아오며 라파엘이 무슨 개지랄을 떨어댈까 걱정한 듯했다. 그간 라파엘이 걸어온 행보를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비숏은 별문제 없이 대화를 끝마친 데 만족해하며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까만 머리털이 스르륵 흩어졌다.
“제 말을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주홍 머리 하녀 쪽으로 걸어갔다. 하녀는 이대로 끝난 게 안심이라는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반면에 옆에 호위로 붙은 기사가 눈코입으로 '나는 불만 있소이다.'를 외쳤다. 그의 부릅뜬 눈동자에서 레이저가 나와 날 콕콕 쑤셨다.
역시나.
그대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기사는 스포츠에서 다음 선수에게 바톤을 넘겨주듯 비숏과 교대했다. 그가 비숏 대신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큰 키에 무뚝뚝한 인상. 기가 막히게 잘생긴 남자.
남주의 외모에 대한 칭송을 주렁주렁 늘어놓는 걸 흔히 주접이라고 했다.
누나는 주접을 잘 떨어댔는데.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그가 비현실적인 얼굴이기는 했다.
비숏의 호위.
천재기사 제프린.
나를 죽일 여러 후보 중 하나.
글로만 보다 얼굴을 마주하니 눈동자가 퍽 인상적이었다.
누나는 커피를 달고 살았는데, 우유가 들어간 제품군을 고집했다.
그의 눈알이 딱 그 색깔.
누나는 참 이곳저곳 골고루 제 취향을 입힌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프린은 이걸 비웃는다고 여긴 걸까?
그는 꾹 다문 입술을 잘근 씹더니 말했다.
“아카데미에서는 여태까지와는 다를 겁니다. 비숏 님에게 다시 접근한다면, 각오를 톡톡히 해야 할 테니. 명심하십시오. 아카데미에서는 다르다는 걸.”
이건 그 장면이었다.
내가 누나에게 몇 번이고 따졌지만, 제프린의 간지를 위해서 아득바득 강행해서 넣은 장면.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라파엘은 제프린한테 검술로 개 발린다.
밀렸다, 패배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처참하게 발려버린다.
그러고서 제프린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라파엘의 목에 검을 겨눈 채 ‘그때 다를 거라 했지 않습니까.’를 내뱉으며 조소한다.
라파엘을 혐오하는 독자로서는 사이다를 목에 때려다 붓는 장면. 지금 상황은 그때를 위한 복선이었다.
원작의 라파엘은 제프린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어디 평민 따위가!’ 라고 연호하며 역정을 냈다.
나중에 제프린에게 된통 고욕을 치렀던 건 그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잘 대처하면 애가 좀 봐주지 않을까?
설령 때리더라도 주먹에 힘은 좀 빼주겠지.
“응. 알았어. 눈치 있게 잘 살피면서 지낼게.”
“한 번만 더 비숏 님을…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제프린은 혀를 찼다.
그는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내가 자기 말에 분노하기를 바란 듯했다. 내게 복수하기 위해 복수 거리를 만들어두는 느낌이었다. 그렇게는 안 될 일이지.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응. 너도 갈 거지? 잘 가. 안녕”
제프린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해줬다. 그는 비숏의 뒤를 따라 저택에서 나가면서도 나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흘깃흘깃 쏘아봤다. 그의 시선이 따끔했다.
* * *
누나한테서 이것저것 얻어먹는다고 여러 로맨스 판타지를 섭렵한 결과 몇 가지 법칙을 깨달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름의 중요성이었다.
소설 내에서 이름의 등장 여부는 많은 것을 시사했다.
예를 들면, 아카데미의 검술학부에서 이름이 등장한 인물은 제프린뿐이었다.
이는 검술학부에 제대로 된 실력자는 제프린 하나라는 소리였다. 그 외에 나머지는 다 들러리 같은 존재였다
라파엘은 백작위의 귀족으로 아카데미에 특례입학이 가능한 사례에 해당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귀찮게 시험을 보는 대신 특례입학을 했었다. 특례입학은 굳이 안 쓸 이유가 없는 특권이었다.
아카데미를 어떻게 입학하는지 따위는 아카데미 내부에서의 대우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는 달랐다.
특례 입학자들은 실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런 남들 시선이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하필이면 검성, 카타리나마저도 그런다는 게 말썽거리였다.
그녀는 입학시험에서 마나를 발현했는지만을 1차 거름망으로 삼았고, 남은 인원들을 서로 대련시켰다.
그다음 대련에서 우승자를 뽑아 제자 삼아 가르쳤는데, 원작에서는 그게 제프린이었다.
카타리나는 수년 동안 눈에 차는 놈이 없다는 이유로 제자를 두기 거부했다. 하지만 이번에 제프린의 재능에 놀라 그를 거둘 예정이었다.
제프린은 검술에 있어 천재라지만, 다른 남주들에 비해 밀리는 구석이 있었다.
황태자나 북부대공, 마탑주들은 무력은 기본에다 멋들어진 배경이 있는 데 반해, 제프린은 검술뿐이었다.
그런 만큼 제프린은 다른 남주에 비해 파워업 이벤트를 자주 겪었다.
검성, 카타리나의 가르침도 그중 하나였다. 제프린은 카타리나에게 검술을 배우며 쑥쑥 자라 이른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
“이걸 뺏어야 해.”
죽고 죽이는 암투로 험난한 세상에 빠진 이상 무력은 필수 중에서도 필수였다.
나는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 중, 제일 그럴듯하고 빠른 방법이 카타리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입학시험에서 제프린만 싸워 이긴다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제프린은 강했다.
육체 능력이야 아쉬운 부분이 있어도 검술 하나만 놓고 본다면 세계 최고의 재능이었다.
거기에 어려서부터 노력해 그의 검술은 완성되기 직전. 평범하게 싸운다면 필패였다.
하지만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라면, 방법이 하나 있었다.
누나가 제프린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나 다음으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잘 이용하면 성공할 일이었다.
“아! 됐다!”
평소에 마석을 찾을 때는 그것에만 몰두했다.
이번에는 딴생각하며 마음을 놓고 습관처럼 마석을 더듬었을 뿐이었는데, 손에서 푸른 빛을 뿜어댔다. 마석은 이에 반응하며 손에 착 달라붙었다.
마나를 발현하는 데 성공했다.
손 밖으로 푸른 마나를 뽑아내며 지금 감각을 기억에 새겨 넣었다.
마나를 뿜어낸 손에만 혈액이 쏠리는 듯했다. 그 외 나머지 신체는 감각이 무뎌졌는데, 반대로 마나를 뿜어낸 손은 한없이 예민했다.
느껴본 적 없는 신기한 감각에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대로 까딱거렸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마나가 움직였다. 마나는 장갑을 손 위에 얹은 듯한 형태였다.
여기에 마나를 더 뿜었다. 마나 덩어리의 덩치를 키웠다. 마나를 뭉쳐 주먹만 한 크기의 구체를 만들었다. 이를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렸다.
“이제야 한시름 놓았네.”
아카데미의 입학시험까지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다.
끽해야 10일 남짓. 2차 시험인 대련은 그렇다고 쳐도 1차인 마나 발현 여부가 마음에 걸렸는데, 이를 무사히 넘길 듯했다. 마나를 사용하는 거야 다들 어려서부터 뗐을 텐데 게으른 라파엘 탓에 피땀 흘렸다.
“한시름 놓다니요? 뭘 말이에요?”
때마침 코로망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계를 확인하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악! 악! 마나 발현한 거예요? 정말요?”
코로망의 눈동자가 사방으로 통통 튀었다.
굳이 숨길 일도 아니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말해 주려 했다. 이렇게 된 거 담담하게 사실을 고했다.
“나 이제 마나 쓸 수 있어.”
귀족쯤 되면 여러 마도구를 다루기 위해서라도 마나를 발현하고는 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나 코로망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내가 마나를 다룬다는 사실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저택 사람 모두가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