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제리코 아이작이 마나를 발현한 건 12살 때의 일이었다.
또래보다 수년은 앞선 성장에 뿌듯해하면서 라파엘을 보았다. 그는 동생보다 늦은 게 아무렇지 않은 척, 개의치 않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열등감을 키웠다.
제리코는 라파엘보다 2살이 어렸다. 그 탓에 막상 목검을 들고 싸우면 라파엘이 이기고는 했지만, 제리코는 수년 내에 전세가 바뀌리라 확신했다. 라파엘은 저보다 키와 체격이 조금 더 컸을 뿐이었다. 검술이라면 자신이 우월했다. 나이가 차면 자신이 압도할 것이다.
부모님이 급사한 건 그로부터 고작해야 2년이 지나서였다.
라파엘은 영주의 자리를 이었다.
그때쯤 돼서는 제리코와의 대련을 피했고, 마나는 물론 발현하지 못했다. 그는 검을 놓았고, 마나는 포기했다.
‘저런 게 영주라니.’
제리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문의 규칙대로라면 영주가 되는 건 자신이었어야 한다.
라파엘이 영주가 된 건 돌발적인 사고였다. 영주가 된 이후에도 무능한 라파엘의 행보를 보고 반드시 자리를 빼앗겠다고 다짐했고, 동생과 손을 잡았다.
‘뒤늦게 바뀐다고 변할 건 없어.’
라파엘은 가문의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했고, 체력을 키웠고, 마나를 발현했다.
짧은 시간 동안의 변화였다.
그러나 그가 뒤늦게 가문의 사람들을 챙긴다고 해도 떠나간 마음을 되돌리기란 요원했다.
체력을 키우고, 마나를 발현했고, 아카데미에서 검술을 배운다고 쳐도 자신과의 역량 차이는 극심했다.
‘놀랍긴 하네.’
제리코는 탄식했다.
“아니, 이런 거 축하하는 건 어릴 때나 하는 거지. 내 나이에 무슨.”
“그런 게 어딨어요. 축하할 일은 해야죠! 빨리 와요!”
코로망은 가문의 주요 인사들을 호출했고, 자리를 마련했다.
라파엘이 마나를 발현했으니 이를 보고 축하하라는 뜻이었다.
라파엘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으나 얼굴을 숙인 채 코로망의 말을 따랐다. 그는 손에서 마나를 뿜어댔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다시금 뭉쳤다.
그 크기는 제법 컸다.
발현 자체야 늦었지만, 타고난 마나의 양은 질투가 날 만큼 훌륭했다,
제리코는 영주 자리를 빼앗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지금 사태를 위기라고 친다면 처음 맞이한 위기였다. 제리코는 불안해 뛰는 심장 탓에 옆에 위치한 이블린에게 속삭였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이블린은 제리코의 고민에 실소를 터트렸다.
“야, 너 겁먹었어? 싸우면 질 거 같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도….”
“됐어.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며칠 있으면 아카데미로 떠날 거야. 그러면 가문에 영향력을 키울 수도 없을 테니 너는 훈련이나 더 열심히 해. 네가 싸워서 이길 실력만 유지하면 절대 문제 안 생겨.”
“믿을게.”
“어. 원래 너 머리 쓰는 일은 안 했잖아. 이건 나한테 맡기라고.”
* * *
“좋은 아침입니다.”
“응. 너도.”
“마나 발현하신 거 축하합니다.”
“고마워.”
여기에 떨어진 첫날,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던 하인은 넉살 좋게 웃었다. 첫날과는 상반된 태도에 멋쩍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제 내일이면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새벽에 기상해 늘 하던 훈련을 했고, 아침을 먹었다.
뭔 일인지 코로망이 서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냉큼 서재로 가니 그녀는 지난밤을 뜬눈으로 보냈는지 핼쑥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오셨어요? 그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뭐길래 그렇게 분위기 잡는 거야?”
“그게요…. 이걸 말하는 건 조금 이른 거 같지만, 시간이 부족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말할게요. 아카데미는 안 가는 게 좋겠어요.”
“응?”
라파엘는 꽤 오래전부터 아카데미로 떠나겠다고 말하고는 했다. 이제 와서 반대하는 건 어딘가 이상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영지를 비우면 영주 자리가 위험해질 거예요. 작은 도련님이….”
“아. 그거? 알고 있어. 걱정 안 해도 괜찮아. 다 방법이 있으니까.”
제리코는 엄연히 실력자가 맞았다. 원작에서 비중의 없다시피 한 거에 비하면 그의 실력은 출중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원작의 흐름만 탄다면 그를 뛰어넘는 건 간단했다.
“흐하하.”
나는 바보 같이 웃었다.
필요 없는 조언이었지만, 조언을 해줬다는 건 코로망의 마음이 내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원작이 틀어지고 있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카데미의 입학시험 날, 코로망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아카데미를 가신다고 할 때만 해도 다 비숏 영애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그 영애 분이 가니까 따라간다는 거로 생각했죠. 그래서 부정적이었는데, 인제 보니 기우였나 봐요.”
“한동안은 얼굴 보기 힘들겠네. 그동안 챙겨줘서 고마웠어.”
“일이었는데요 뭘. 그럼 힘내고 돌아오세요. 힘들어도 관두지는 말고요.”
코로망의 배웅을 받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재능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린 교육을 펼치겠다는 교육 이념 아래 수많은 지원자가 시험장에 나와 있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시험장의 정문 아래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다.
그들은 저마다 무리를 이뤄 왁자지껄 떠들었는데, 수산물을 전문으로 하는 시장통의 열기에 버금갔다.
어우.
수많은 인파에 섞여들자니 벌써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도 검술학부는 그나마 나은 편이기야 했다.
검술은 각자 싸워서 자기 수준을 파악할 수 있으니 나름대로 자기 객관화가 가능했다.
이와 반대로 서로의 실력을 겨루기 어려운 순수 학문 쪽은 정말 사람이 꽉꽉 들어찼다.
저들을 통제할 시험관이 불쌍했다.
검술학부는 그래도 마나 유저만이 모였으니 조금 낫겠지 싶었는데, 사람들을 둘러보니 팔다리가 앙상한 지원자들이 눈에 띄었다.
대체 뭘까?
뭔가 특이한 걸 배운 걸까?
체격이 작고, 몸집이 마른 사람한테 특화된 검술이 있었던가? 그런 설정이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이 제자리에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는 모습을 보고서 애초에 검술을 배운 사람들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저들은 마법사였다. 그것도 수준이 무척 낮은 마법사.
마법학부에 비해서 검술학부 쪽이 입학시험의 최소 기준이 낮으니 어떻게든 검술학부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다음에 학부 이전을 통해 마법학부로 옮기려는 사람들이었다.
얕은꾀를 부리는 그들을 보고서 어느 정도는 날로 먹을 수 있겠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낮은 톤에다가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이 인파 속에서도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제프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내게 찾아왔다. 그는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로 이쪽을 노려봤다.
“백작위의 귀족 가문이라면 특례입학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입학시험을 보는 겁니까?”
“안 해도 될 거 같아서.”
“예?”
“그런 거 안 해도 입학이야 할 수 있으니까.”
제프린은 내 허리춤에 놓인 칼을 유심히 보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검술학부에 지원하신 겁니까?”
“왜? 뭐가 문제인데?”
“꽤 오랫동안 검에서 손을 놓으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놨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야지.”
“단순한 변덕이군요.”
제프린은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검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디 정정당당한 시험을 치르시길 바랍니다.”
안 봐줄 테니 뒤질 준비 하라는 뜻이었다
“하.”
멀어져가는 제프린을 두고 콧방귀를 뀌었다. 안 봐줘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 * *
아카데미 검술학부의 입학시험은 먼저 수험생이 마나를 발현했는지 확인한 후에 검술 실력을 시험했다.
마나 발현 여부를 보는 건 간단했다. 충전형 마석을 붙잡은 다음에 마나를 주입해서 그 색깔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시험장에는 검술학부뿐 아니라 마법학부 수험생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왜 마법사를 꿈꾸면서 몇 수험생이 검술학부에 지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법은 검술보다 마나 의존도가 높았다. 따라서 마나학부는 마나의 발현이 아니라 그 양과 제어력까지도 시험했다.
충전형 마석의 기본색은 파란색.
검술학부 수험생들은 마석에 빛이 들어오게 하면 통과, 마법학부는 붉은색을 만들어야 했다.
그냥 돌멩이만 쥐고 있음 되는 것만큼, 시험은 매우 지루했다.
파랗고, 덜 파랗고, 더 파랗고… 좀 새파랗고… 따분한 시험을 대기하던 사람들이 반쯤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앞줄에서 함성이 터졌다.
“마, 말도 안 돼.”
마석은 충전형이었다.
이는 마석이 담을 수 있는 마나의 양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마석의 색은 초록색. 마석이 담아낼 수 있는 마나가 한계치에 달했을 때 나오는 색이었다. 마석은 더 강렬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을 뿜으며 진동했다.
돌멩이를 잡고있는 사람은 역시.
‘이안 로드브레이커.’
훗날 마탑의 주인이 될 자이자, 날 죽일 후보 중 하나였다.
퍼엉!
마석은 최대치를 뛰어넘는 마나 폭격에 결국 폭발했다.
이안은 사람들의 반응 따윈 무관심하다는 듯이 손에 묻은 마석 가루를 탈탈 털고는 떠났다.
이야. 대단해라.
잠시 소란이 이어진 후, 내 차례가 되었다. 다들 앞 차례의 기적 같은 장면에 놀라, 내게는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안이 마석을 부숴 먹은 탓에 새것을 받았다. 마석에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었다.
“오오.”
마석은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내 힘이 다 빠질 때쯤엔 적당히 밝은 초록색으로 변했다.
“오오오, 저것 좀 봐!”
“이야, 쟤 하는 거 봤어? 대단한데?”
“어디 마탑에서 교육받은 애들이 왔나?”
하지만 앞에서 이안이 보여준 능력치가 너무 대단했기에 반응은 딱 거기까지였다.
“1차 시험은 통과입니까?”
나는 감독관에게 마석을 건네주며 물었다. 감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수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군요. 검술학부에 지원하셨다 하셨죠?”
“네.”
“마법 학부로 옮기실 생각이 없나요?”
“없습니다.”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감독관을 뒤로 한 채, 2차 시험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1차 시험은 이렇게 순식간에 끝났다.
* * *
2차 시험은 카타리나의 감독하에, 다른 지원생들과 대련을 펼치는 것이었다.
대련은 두 번씩 이루어졌고, 모두 손쉽게 이겼다.
처음 맞붙은 상대는 마법학부에 지원하려다 검술학부에 지원한 것 같은 남성이었는데, 대련장에 오르자마자 검을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칼질 한 번으로 승리했다.
그다음 상대는 근육이 잘 발달했고, 투지가 넘쳐났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혹시나 실력자인가 싶었으나 원작에서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패널티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칼을 몇 번 겨눈 다음에 손쉽게 승리했다.
“오후에 다시 와.”
경기에 승리하고 내려오자 카타리나는 내게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여타 지원생들의 대련을 보면서도 항상 제프린을 주시했다.
고개는 대련장 쪽을 향했으면서도 눈동자를 굴려서 제프린을 힐끗거렸다.
하기야 제프린은 나머지 다른 지원생들과 수준이 다르기야 했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1합 만에 시합을 끝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재능이었다.
내가 장담하건대, 역대 아카데미의 검술학부 졸업생 중 누구를 데려와도 제프린을 이기지는 못할 터였다. 그를 상대로 1합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박수받을 자격이 차고 넘쳤다.
“아, 배고파.”
몸을 움직였더니 배가 출출해져 아카데미에 식당은 어디에 있나 둘러보고 있는데, 또 무슨 볼일인지 제프린이 걸어왔다.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더군요.”
제프린은 상상력이 몹시 풍부했다.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자기 머릿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내가 당연히 이해할 거라 여기는 말본새였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제가 기억하기로 당신의 검술은 조잡했습니다.”
“아니, 너랑 비교하면 누구라도 그랬겠지. 지금 와서 뭐라는 거야? 칼질 잘한다고 자랑하냐?”
제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의 검술이 미숙했음을 지적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릴 적에 당신은 기본기를 무시한 채 어렵고, 화려한 기술만을 집착했습니다. 한데, 오늘 대련에서는 모두 기본기만을 쓰시더군요.”
제프린은 정말 보고 싶은 대로만 봤다.
내가 어렵고, 멋있는 기술을 쓰기 싫어서 안 쓴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못 쓴 거였다. 라파엘의 몸이 어색하고, 검술 교본을 끝까지 익히지 못한 까닭이었다.
제프린은 눈동자를 굴려 내 귀와 목, 손가락 따위에 차례차례 시선을 주었다. 그는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게다가 당신은 차고 있던 장신구를 모두 벗었습니다. 그건 검술에 방해되기 때문이겠죠.”
“아, 그래. 그런 거지.”
“대련에서 저를 만나면 바로 포기하라 조언했던 건 취소하겠습니다. 전력을 다해 임하십시오. 저 또한 제 모든 것을 보여 드릴 테니.”
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