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다는 속담을 아는가?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뜻인데, 로맨스 판타지에서 종종 이에 부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괜히 남주 옆에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끼워두는 것이었다.
제프린 옆의 카타리나가 딱 그러했다. 스승과 제자인지라 둘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고, 붙어 다니다 보면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프린을 응원하는 독자 중에는 혹시나 제프린이 카타리나와 이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생길 터였다.
누나는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면 독자들을 배려해서 절대로 그 둘이 이어질 수 없는 설정을 여럿 차용했는데, 여성 캐릭터를 동성애자로 만들거나 다른 약혼자가 있다는 게 보통이었다.
카타리나는 후자에 해당했다. 연금술학부의 교수인 길버트가 그 상대였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주 작은 여지라도 주지 않도록 길버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거의 광인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한 마디로 길버트란 캐릭터의 존재는 카타리나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녀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선 길버트를 구워삶아야 했다.
길버트는 작고 보잘것없는 약초들이 모여서 드라마틱한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연금술에 반해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제프린의 가장 큰 기연 중 하나인 ‘카타리나의 가르침’을 빼앗기 위해서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그 안전장치가 길버트였다.
2차 시험 중에 주어지는 잠깐의 쉬는 시간을 틈타 나는 식당에 있을 그에게 찾아가 대뜸 말을 걸었다.
“혹시, 흙뿌리망초가 뭔지 아십니까?”
내가 연금술에 관해서 언급하며 말을 걸자 그는 히죽이며 대답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혹시 신입생이야? 벌써 열정이 대단한데? 흙뿌리망초? 그야 당연히 알지, 계면활성제 만들 때 쓰는 거잖아.”
길버트는 놀이공원에 들어선 아이처럼 싱글거렸다.
“기존에 알려진 정보는 그러한데, 그에 대한 새로운 사용법이 있습니다. 트롤의 피를 이용해 만든 포션은 피부에 대한 착색 때문에 얼굴이나 광범위한 상처에는 못 쓰지 않습니까?”
“그야 자국이 남으면 흉하다고 교회의 포션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기야 하지.”
“흙뿌리망초를 이용하면 그 착색 자국을 지울 수 있습니다.”
길버트는 수프를 뜨던 수저를 그대로 내려놓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예.”
“진짜?”
“진짜입니다.”
“으아아!”
길버트는 고함을 질렀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식기를 치우던 모두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도 있었다.
길버트는 제가 저지르고도 창피한지 후드를 뒤집어쓰며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내가 한 말에 눈을 똘망똘망 빛냈다.
“진짜? 친구야, 너 이름이 뭐지? 아, 연금술학부면 여기 서류철에 있을 텐데…. 아니다. 너한테 바로 들으면 되겠네. 친구야 이름이 뭐야?”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걸 잠자코 듣고 있으니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축지법을 쓰듯이 걸어왔다.
바로 카타리나였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는지 보폭은 작았는데, 다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치타를 방불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접근해서는 입을 열었다.
“야, 수험생….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카타리나의 눈에는 차가운 불이 깃들었다.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노려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대답했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이곳 밥이 무척 맛있더군요.”
“내 말에 대답부터 하지 그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제가 검술 말고 연금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우연히 연금술학부 교수님을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카타리나는 내 말이 사실이냐는 양 길버트에게 눈짓했는데, 길버트는 카타리나를 무시하고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흙뿌리망초가 트롤 포션의 착색을 지운다는 게 진짜냐니까? 그게 진짜라면 정말,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는데. 아니, 아니다. 지금 바로 돌아가서 실험해봐야겠어. 친구야, 이름이 뭐라고?”
“라파엘이라 합니다. 라파엘 아이작.”
“라파엘, 나중에 입학식이 끝나면 꼭 나를 찾아와. 네가 말해준 정보를 절대 날로 먹지 않을 테니까.”
“네, 꼭 그러죠.”
길버트는 카타리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흙뿌리망초를 연신 중얼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카타리나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아까 설명해 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제가 연금술에도 관심이 많아서요.”
뿌드득.
카타리나의 주먹 관절이 꿈틀거리며 마찰음을 울렸다.
순간 주변의 기온이 하강했고, 사방에서 압력이 가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카타리나가 의도적으로 마나를 풀어서 나를 압박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똑똑한 편은 아니거든? 그래서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거나, 뒤에서 더러운 술수 부리는 걸 존나게 싫어해. 똑바로 말해. 너 뭐 하자는 거야?”
카타리나는 내가 순수한 의도로 길버트에게 접근한 건 아니라는 걸 아는 듯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킨 다음 대답했다.
“카타리나 님으로부터 검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코웃음을 치더니 내 멱살을 쥐었다.
고릴라 같은 악력에 옷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혀 헛기침이 나오는 걸 참았다.
“그랬으면 이딴 뒷공작이 아니라 재능을 증명했어야지. 사람이 역겹게 왜 그러냐?”
“재능을 증명한다고 해도 당신이 절 거부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프린을 아십니까?”
“칼질 빠르던 걔? 너랑은 수준이 다르더라. 무슨 내 어릴 적 보는 줄 알았어.”
“설령 제가 그를 꺾더라도 그의 검술이 더 예쁘니 그를 택할 거라 여겼습니다.”
카타리나는 나를 허공에 던지듯이 밀치며 멱살을 풀었다.
“길버트 교수님은 순수하게 실력만을 봐주시는 분인데, 그분의 연인이신 카타리나 교수님께선 그렇지 않다니 마음이 좋질 않군요. 제가 그를 이기고도 교수님께 선택받지 못한다면 연금술 학부로 진로를 틀려 합니다. 제 재능을 알아봐 주시는 분에게 가야죠.”
카타리나가 기함을 했다.
“너, 미쳤냐? 돌았어? 내가 그딴 짓을 하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난 절대 그딴 짓 안 하니까. 네가 걔를 이기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가르칠 거야. 턱도 없겠지만.”
“약속하신 겁니다.”
“닥쳐, 멍청아. 약속이랄 것도 없는 거니까. 이건 내 신념이야.”
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 웃었다.
그녀가 저런 식으로 말한다면 가르침을 받을 자는 누구인지 결정된 것이었다.
나는 제프린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 *
나와 누나는 둘 다 격투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마이너 장르 게임 유저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제대로 즐기려면 여러 장비가 필요한 주제 익혀야 할 것, 외워야 할 건 어찌나 많은지 유저가 가뭄이었다.
그런 잔혹한 상황 때문에 게임을 같이 할 사람을 구하지 못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경쟁 상대가 되어 실력을 겨뤘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격투 게임을 즐겼는데, 그중에는 무기를 쓰는 장르도 있었다.
게임 이름은 워리어즈 파이터. 창과 검, 방패 등 중세 유럽의 무기를 배경으로 만든 게임이었다. 제프린은 거기서 ‘앙그마이어’란 영웅에서 모티브를 따온 캐릭터였다.
장르가 로맨스 판타지인지라 전투씬이 자주 나오는 건 아니었어도 남주가 얼마나 강한지, 멋있는지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여러모로 필요했다.
그게 캐릭터의 매력 포인트를 가산하기도 했고, 독자들이 VS 놀이를 할 수 있을 바탕이 되기도 했다.
각기 캐릭터마다 뚜렷한 특징과 장점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프린의 검술에 특징은 속도였다.
나와 누나가 했던 워리어즈 파이터의 캐릭터 ‘앙그마이어’가 그러하듯 제프린은 일격의 데미지는 부족한 대신에 상대가 반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공격 속도를 자랑했다.
단점으로는 데미지가 부족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여기는 현실이었다.
게임에서야 데미지가 약한 공격을 맞아봤자 체력이 깎일 뿐이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팔에 칼을 맞으면, 팔이 썰리고, 목에 칼을 맞으면 목이 썰렸다.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에 해당했고, 심하면 죽음까지 달했다. 제프린은 게임 속 앙그마이어보다 몇 배는 강력했다.
하지만 암만 빠른 공격이라고 해도 대처 방법이야 있었다.
게임사가 쓰면 무조건 맞는 기술을 격투 게임에 넣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였다.
게임 속에서 앙그마이어를 상대하는 해법이야 간단했다.
공격을 꼭 보고 막을 필요는 없으므로 기술 자체를 쓰지 못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현실에서도 쓸 법한 방식이었다.
“아.”
나는 잠시 후 이어질 제프린과의 대련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상상 속의 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애가 왜 이런데?
제프린은 늘 화가 나 있었다.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더 그러했다.
헌데, 오늘은 무슨 영문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표정을 숨긴답시고 입에 힘을 꾹 주고 다물었는데, 눈가가 휘었다.
거기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이 높았다.
“지금의 당신이라면 여기까지 올 줄 알았습니다. 동작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았으니까요. 지루했지만, 정갈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해온 대련에 감상평인 듯했다.
여기에는 여러 오해가 쌓여 있었다. 내가 동작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아? 웃기는 소리였다,
그렇게 열심히 싸운 건, 쉬운 동작이라 해도 집중을 안 하면 펼치지 못하는 탓이었다.
뭣 모르고 떠들어대는 제프린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말을 삼갔다.
지금은 제프린과 싸우기 직전이었다.
굳이 싸울 상대에게 내 약점을 알리며, 고백할 필요는 없었다. 진실을 내색해서 좋을 건 없으니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이기겠습니다. 제 검술을 그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아으.
구태여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되는데.
난 오그라든 손을 억지로 펴면서 경기장 위에 올랐고, 검을 뽑았다.
이미 패배해 학부 입학의 당락이 결정된 여타 지망생들도 귀가하는 대신에 관람석에 앉아 나와 제프린을 구경했다.
얼씨구.
군것질거리까지 챙겨온 놈들도 보였다.
-당연히 제프린이 이길 텐데, 시간 낭비 그만하고 가자. 지금까지 봤으면 대충 둘의 수준 차이를 알잖아.
-둘 다 결승까지 왔는데? 모르는 거 아니야?
-1분. 길어도 제프린이 1분 안에 끝낼 거야. 내가 장담할게.
-그럼 네 말대로 제프린이 무조건 이긴다고 치고, 그냥 보자. 1분이면 끝난다며?
다들 이미 승패가 정해졌다는 듯 심드렁한 태도였다.
하기야 나라도 누가 돈을 걸라고 한다면 제프린에게 올인이었다.
실제로 관객들의 말대로 나와 제프린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수준 차이가 있었다.
“준비.”
그러니 꼼수가 없다면 이기는 건 불가했다.
“시작해!”
카티라나가 개전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검을 당겨 왼쪽 관자놀이를 보호했다.
앙그마이어의 필살기 ‘초승달 베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왼쪽을 향해 쇄도했다.
그걸 보고 피할 수는 없으니 미리 검을 가져다 대 봉쇄하는 작전이었다.
제프린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