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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7화 (7/125)

제7화

처음 이 계획을 짤 때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게임 속 잉그마이어의 검술은 왼쪽으로밖에 못 때려도 여기는 현실이지 않은가?

막말로 제프린이 손을 반대로 쥐고 휘두르면 그대로 멸망이었다.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져야만 했다.

나는 이번 작전을 끌고 가야 하는지 곰곰이 고민했다. 이게 될까?

그 끝에 결론을 내렸다. 제프린이 절대로 반대 손으로는 ‘초승달 베기’를 성공하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실제로 축구의 신, 호x두한테 왼발로 프리킥을 차라 하면 100번을 차도 1번을 넣지 못할 터였다.

갑작스레 자세를 반대로 잡는 건 무리한 일이라 판단했다.

나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정답이었다. 내 판단은 정확했다. 제프린은 초승달 베기를 쓰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는 허망하다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그대로 앞발을 내디디며 돌진했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검격이 휘둘러지기 직전, 자세만을 보고 기술을 알아차렸다.

이건 상단이다. 잉그마이어의 초승달 베기 다음으로 속도가 빠른 ‘상월참(上月斬)’이란 기술이었다.

실제로 게임에서 오류겐을 상대할 때는 검을 왼쪽에 둔 채 상단만을 방어하는 게 정공법이었다.

나는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역시나 무서울 만큼 빠른 공격이었지만, 상월참만을 기다린 덕에 제때 반응할 수 있었다. 온몸을 비틀며 제프린의 검을 꽝 때렸다.

째애애앵!

서로의 검에서 주홍빛 불빛이 튀었다. 충격에 손아귀가 욱신거렸다.

나는 손잡이를 꽉 쥐며 숨을 들이켰다.

난생처음 해보는 칼싸움에 숨이 차오르고, 손이 파르르 떨렸다. 검이 맞부딪친 충격에 순간 검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건 제프린도 매한가지.

칼날은 몸에서 멀수록 타격에 취약하다. 그래서 난 정확히 겉의 끄트머리 쪽을 쳐냈다. 일순 제프린의 몸이 휘청였다. 그는 금세 자세를 고쳤지만, 위태해 보였다.

-너 이거 시작하기 전에만 해도 1분 만에 끝난다고 했잖아! 이거 1분 넘었는데?

-그러게?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이거 누가 이길지 모르겠어! 이러다가 제프린이 지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만 보면 그럴 거 같아.

-그러면 완전 대박인데.

제프린은 이를 악물었다.

필시 제프린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위기였다. 폼이란 폼은 있는 대로 다 잡아 놓고 볼품없이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승리를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이긴다. 이긴다. 이겨야 한다. 이겨야만 한다.

굳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쉬이 예상이 갔다.

이게 그의 심리였다.

당장 이기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만을 찾을 거다. 그렇다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나는 반격을 한답시고 왼쪽 관자놀이를 비운 채였다.

내가 이번 대련에서 처음으로 제프린에게 초승달 베기를 사용할 기회를 주었다.

제프린의 시점에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는 반드시 초승달 베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난 물고기를 낚는 어부의 마음가짐으로 그가 먹이를 물기를 찬찬히 기다렸다.

“흡!”

제프린은 보란 듯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그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스쿼트를 하듯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머리 위로 새하얀 섬광이 지나쳤다.

“반사신경이 대단하군, 아니 마나에 대한 감각이 좋은 건가?”

관전하며 헛소리를 내뱉는 카타리나를 무시했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슴이 부풀며 심장 소리가 꽹과리를 치듯 꽝꽝 울렸고, 근육이 바짝 수축했다.

그 끝에 움직였다.

‘초승달 베기’ 이후에 잠시 생기는 딜레이. 제프린이 택할 수 있는 건 가드 혹은 회피였다.

몸을 크게 움직여야 하는 회피에 비한다면 가드 쪽이 보기 좋은 법이었다. 그러니 제프린은 가드를 택할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평소라면 나는 제프린이 가드를 택한다고 배팅했을 터나 이번만은 달랐다. 그는 지금 심리적으로 충분히 몰려 있었다.

나는 오른발로 가볍게 전진하며 제프린이 움직일 각도를 좁혔다. 제프린은 내게서 벗어나려 몸을 돌렸다. 일순간 그의 집중력이 풀렸고, 내 검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장해제.’

워리어즈 파이터에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용 기술.

쉬운 커맨드에 비해 상대방을 심리전에서 완벽히 찍어 눌러야만 사용할 수 있는 양학기였다.

검을 아래에서 위로 갈고리처럼 걸었고, 힘껏 잡아당겼다.

째애애앵!

불똥이 튀기며 서로의 칼날이 서로를 갈았다.

제프린의 손목이 반대 방향을 꺾이며 손잡이를 놓쳤다.

째애앵.

제프린은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거기에 발은 얹으며 검을 뻗어 제프린의 목을 겨눴다. 그리고 약속의 대사를 내뱉었다.

“왜 그래? 아카데미에서는 다를 거라 하지 않았냐?”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숨을 쉬는 게 괴로웠다. 그걸 억지로 참으며 그에게 말했다.

상상도 못 했던 패배였는지 제프린은 응답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분하다는 양 숨을 씨근덕거렸다. 제프린의 앞머리가 흐트러지며 그의 얼굴을 가렸는데, 나는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몸을 수그리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제프린은 잠깐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졌습니다.”

제프린은 순순히 승패를 인정했다.

눈빛에는 아직 나에 대한 적의가 남아있긴 했지만, 저건 비숏을 지키기 위한 충성심에 더 가까웠고, 예전 같은 불신까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이유로 나를 증오했다.

그 수많은 이유 중, 한 가지쯤은 줄어든 듯했다.

그렇게 서로 대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 카타리나가 나섰다. 그녀는 나와 제프린을 밀쳐 거리를 벌리게 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는데, 표정이 미묘했다. 어딘가 떨떠름해 보였다.

“네가 이겼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말을 더했다.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구나.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천재가 있는 법인데, 내가 그를 경시했다. 그래, 네 표현을 빌리자면 제프린의 검술이 예뻤구나. 거기에 내 눈이 현혹됐음을 인정한다.”

제프린을 이기고 가슴이 벌렁거려서 이제 주저앉아도 되는 건가, 갈등하고 있을 때 카타리나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확실히 너와 같이 기본기만을 이용해 방어적으로 싸움을 운영하며, 상대의 기술에 역공을 치는 방식은 지루한 데다 겨뤄보기 전까지는 실력을 체감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카타리나는 제멋대로 떠들었다.

하지만 반박할 기력이 없어 수긍하는 척 들은 후 답했다.

“아, 그런가요?”

“그래, 네가 아무라 실력에 자신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믿기 어려울 수 있었음을 받아들이마.”

카타리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주절주절했는데, 요점은 하나였다.

내가 수석이래.

코로망이 듣는다면 기절초풍할 소식이었다.

* * *

코로망은 라파엘을 걱정했다.

특례입학을 하지 않겠다는 라파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입학시험에서 탈락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그간 가문의 연무장에서 열심히 훈련했다는 걸 알지만 그 기간이 짧았다.

아카데미 입학생들의 평균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밤 잠들기 전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라파엘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혹시라도 라파엘이 아카데미 입학에 실패하고 가문으로 돌아온다면 무슨 말로 위로할까 고민하고는 했다. 그랬었다.

“뭐? 거짓말하지 마! 그놈이 어떻게!”

제리코가 신발 바닥으로 바닥을 쾅 찍었다. 흥분했는지 무게를 실은 발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고용인들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했다.

“라파엘이 제프린을 이겼다고?”

제리코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제법 괜찮은 재능을 쥔 채 태어나 나날이 노력했다. 또래 중에서는 자신을 따라올 놈이 없다고 자부했다.

한 놈만 빼고.

라파엘이 따라다니던 영애의 호위. 이름은 제프린이라 했다.

그놈만큼은 예외였다. 몇 번 우연히 검술을 감상한 게 전부였으나 확신했다.

그놈은 진짜였다. 제리코가 제 또래 중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천재였다.

자신도 수재는 된다고 여겼으나 어찌 노력해도 제프린 그놈만큼은 따라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라파엘이 제프린을 이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영주 자리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제리코는 급하게 이블린을 찾아갔다.

* * *

입학시험과 입학식까지는 일주일가량의 텀이 있었다.

이 기간에 영지까지 복귀하는 건 번거로워 아카데미 근처의 여관에 묵었다. 보통의 학생들은 다 나와 사정이 비슷해 근처의 여관에 꽉꽉 들이찼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사교활동에 열중인 학생들이 여럿 있었지만, 나는 예외였다. 눈에 띄게 단련하는 대신에 여관의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마나 연단을 하며 지냈다.

그리고 드디어 아카데미의 입학식 날.

아카데미에는 여러 학부가 있었고, 입학식에서는 각 학부마다 수석 입학생이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중 나는 검술학부 대표로 입학식에서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신데렐라 랩소디] 속 주요 인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단 저기서 입학을 축하한다며 연설을 하는 학장.

프란츠 로쿠스.

그는 드래곤을 제외한다면 마법만큼은 으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마족이나 엘프 따위를 포함해서도 그러했다.

그토록 무척이나 대단한 프란츠는 눈빛만으로 사람을 찢어버리겠다는 듯이 사나운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내 옆자리에 앉은 머리털이 기다란 마법사를 향했다.

입학시험 당일, 얼핏 본 적이 있었다. 마석으로 자기가 얼마나 마나가 풍부한지 자랑하던 놈이었다.

그가 마법학부 수석이었다.

이안 로드브레이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게 다 지겹다는 듯 침침한 눈으로 입이 찢어지지는 않을까 우려가 들 정도로 크게 하품했다.

프란츠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품 때문인가?

프란츠가 이안의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건가 고민했는데, 곧 둘 사이에 마력의 파장이 충돌했고, 그 여파가 사방으로 퍼지다가 거품처럼 흩어졌다. 프란츠는 쉬지 않고 연설을 하면서도 관객들이 보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이안을 공격했다.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었는데도 겨우 느꼈을 만큼이나 잔잔한 싸움이었다.

아마 마나를 제대로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 가까이서 싸움을 느껴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둘은 무형의 마나를 가공하지 않은 채 서로 공방을 주고받으며 실력을 겨루었다.

놀라운 건 프란츠는 방긋거리며 연설을 멈추지 않았고, 이안은 졸린 듯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기를 반복했다.

프란츠는 이안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이 일순간 안광을 뿜었다.

이안 로드브레이커.

서부에 위치한 마탑의 주인.

마나에 대한 지배력은 세계관 최강.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쯤엔 프란츠를 뛰어넘는 대마법사가 될 예정.

세상의 편애를 받는 남주들 중 하나였다.

‘거기다. 누나가 제일 좋아했었지.’

이안의 진짜 무서운 점은 세상의 편애뿐만 아니라 작가의 편애를 받는다는 점이었다.

이안 로드브레이커.

그는 감정이란 색채에 채도 자체가 낮은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여주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똑바로 봤다는 설정이었는데, 그 유치함에 나는 스크롤을 휙휙 내렸었다.

그는 감정을 느끼는 뇌의 땅콩이 작았는데, 늘 웃는 얼굴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그는 기쁨도 슬픔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특히 분노라는 감정에 유독 심했다.

그는 뭔 짓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다 비숏의 불행한 삶에 공감해서 격분하고 여차여차 엮이다가 사랑에 빠질 예정이었지만, 아직은 그러했다.

이거 하나만 놓고 봐도 누나를 한참 놀려먹을 유치한 설정이었는데, 이안은 여기에 병을 하나 추가로 앓았다. 그건 밤낮을 가리지 않는 심각한 불면증.

그는 수년째 한 번에 1시간 이상을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매일 쌓인 수면에 대한 채무는 고리대금처럼 쌓여 몸에 무시무시한 피로를 누적시켰다. 머리가 깨질 거 같은 두통, 무거운 팔다리 따위를 버텨야 했다.

이 지긋지긋한 불면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비숏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안은 주변에 비숏이 있을 때만 깊게 잠들 수 있었다.

왜?

왤까?

무슨 원리일까?

그건 나도 알지 못했다. 아마 누나도 모를 것이다. 그냥 적당히 집어넣은 걸 테니까. 하도 궁금해 내가 묻자 누나는 이걸 클리셰라 말하며 그만 좀 따지라 화를 냈었다.

어찌 됐건 간에 이러한 설정은 한 가지 결말을 낳았다.

비숏에게 있어 이안은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이안에게 있어 비숏은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유일한 수면제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 불가한 특별한 존재라는 뭐 그런 설정이었다.

둘이 만난다면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면 내 목숨은 또 간당간당해지는 거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이 둘을 막아야 했다. 제프린에 이어서 두 번째로 처리해야 할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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