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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8화 (8/125)

제8화

입학식이 끝나고 건물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같은 입학생이면서도 입학식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이 하나 있었다. 시작부터 무슨 심보인가 싶었는데, 그는 머리를 흔들더니 나를 보았다.

비숏의 호위, 제프린.

그는 초췌한 표정으로 내게 걸어왔다. 눈 밑에는 검은 기가 스멀스멀 올라왔고, 전에 봤을 때보다 체중이 빠졌는지 얼굴이 날카로웠다.

제프린은 나를 보자마자 말문을 열었다.

“그간 잘 지내신 듯합니다. 표정이 좋습니다. 아…. 수석을 하셨다면서요? 그거 축하합니다.”

“너는? 너도 잘 지내고 있고?”

딱 봐도 못 지낸 게 티가 났지만, 의례상 물었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프린은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그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접혔다. 체념이었다.

“잘 못 지냈습니다. 그렇게 져놓고 어떻게 잘 지냈겠습니까? 그때 진 이후로 많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졌을까? 무엇이 부족했을까?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평생 모를 거 같았습니다.”

“네가 기술도 속도도 힘도 나보다 뛰어난데 왜 졌는지?”

“예, 정확히 아시네요. 맞습니다. 제가 왜 졌을까요? 왜?”

“아아, 그거? 고민할 필요 없어.”

난 제프린에게 똑같이 웃어주며 말했다.

“영원히 모를 테니까.”

알고 보니 이곳이 소설 속 세상이고, 상대방이 자신의 설정을 알고 있어서 카운터 쳤다는 걸 어떻게 떠올리겠는가.

제프린이 평생 고민해봤자 답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프린은 다시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애가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 왜 이럴까?

“제가 아카데미에 왜 입학했는지 아십니까?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비숏 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아, 그래?”

“한데, 최근 2주 당신과 비숏 님의 접점은 전혀 없더군요. 당신은 그녀를 만나기는커녕 검술 수련에만 열중할 뿐이었습니다. 비숏 님과 만나려 하거나, 그녀의 뒤를 캐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프린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턱이 하늘을 향하게 목을 위로 꺾었다. 그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검술만큼은 제가 제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저보다야 강한 이들이 많다고 해도 나이가 차면 제가 앞지를 거라 여겼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가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으니 제프린은 이어서 말했다.

“착각이었더군요. 저는 당신한테 졌습니다. 저랑 같은 나이에, 저보다 검을 쥔 시간도 짧은 당신에게.”

“그래서?”

제프린은 다시금 머리를 숙여 나를 보았다.

“제가 오만했던 거죠. 같잖은 제 재능이 전부인 줄 알고 과신했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나 오랫동안 고민했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론? 뭘 어쩌게?”

“저는 아카데미를 떠날 겁니다.”

“아?”

“강해져서 돌아올 겁니다. 그 누구보다도. 그때야말로 이제까지와는 다를 테니 기대하십시오.”

이렇게 쉽게 꺼져준다고?

어떨떨한 기분이었다.

제프린의 주요 파워업 이벤트 중 여러 가지가 이 아카데미 내에 있었다. 카타리나의 가르침부터 시작해서 그걸 야금야금 가로채서 그를 약한 상태로 남게 할 생각이었는데 아예 꺼져주다니.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좋지만 그가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무슨 변수를 만들지는 미지수였다.

차라리 아카데미 내에 잡아두는 게 낫지 않을까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 결과는 이러했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잘 가! 다음에 보자!”

다시는 안 보면 더 좋고.

갑작스레 아카데미를 떠난다고 하니 떨떠름했지만, 일단은 경사인 듯했다.

뭐가 어찌 됐건 간에 제프린 또한 여러 남주 캐릭터 중 하나였다.

그가 알아서 제 발로 비숏의 어장을 걷어차고 나갔는데, 이건 내 생존 가능성이 커질 일이었다.

일단은 긍정적인 일로 봐야 했다.

“네, 강해져서 돌아올 겁니다.”

“기대할게.”

영영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배웅해줬다.

내 목숨을 위협할 머릿수 하나가 줄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아마도 일이 잘 풀린 듯했다.

아마도.

* * *

인간에게 여러 욕구가 있다지만, 수면욕보다 강한 게 있을까?

뭐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게 뭘까 상상도 못 할 노릇이었다. 그만큼이나 수면은 일상을 영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거기에 장애를 겪는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안 그래도 부족한 감수성 때문에 인간관계를 힘들어하고, 귀찮아하는데 불면증으로 인한 만성적으로 신경이 과민했다. 그야말로 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준비가 완료된 폭탄.

그게 바로 지금의 이안 로드브레이커였다.

수석 입학생들을 위한 개인 기숙사는 한 곳에 몰려 있었던 덕에 내 옆방에 바로 이안이 있었다.

나는 그를 내 방으로 호출했는데,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온 고등학생 같은 표정이었다.

싸가지를 상실했다는 소리.

바로 본론부터 말하라는 그의 태도에 준비해온 말을 내뱉었다.

“이번 입학생 중에 나비에라고 알아?”

나비에는 사교계의 마당발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이름이라면 어느 자리에서 팔더라도 자연스러웠다.

더군다나 이안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나비에가 절대 자기 이름을 팔았단 걸 알 수 없었다.

이안은 내가 기대했던 대로 반응했다.

“그게 누구지?”

“음, 걔도 신입생인데, 이런저런 정보가 많은 친구거든?”

나는 이안이 맞장구쳐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안은 예상과는 달리 자기 턱을 붙잡고 좌우로 꺾으며 목 관절을 풀었다. 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해. 빙빙 돌리지 말고.”

“음…. 네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내가 나비에한테 너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어.”

보통 같으면 불쾌할 소재에도 이안은 계속 떠들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네가 청색 마탑의 주인이란 걸 알아.”

“그래? 신기하네.”

“청색 마탑의 주인은 잠잘 줄을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걸 내가 고쳐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재밌네. 네까짓 게 뭐길래 내 병을 치료한다는 거지?”

“자신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내기해도 좋아.”

“네가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말인가?”

“그래, 내가 성공한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이안은 내가 뭐를 요구할지는 관심도 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기라, 그럼 실패할 경우 벌칙이 있어야지.”

“벌칙이라 하기엔 뭣하지만, 카테인 님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알려줄게.”

순간, 분위기가 정반대로 변했다.

정의 동요를 일으킨 이안이 마나를 풀어낸 것이었다.

마탑주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강력한 마나가 주변 일대를 장악하며 내 몸을 꽁꽁 감쌌다.

그는 순식간에 주변에 마나의 구체를 퍼트리며 언제라도 격발할 수 있게 진동시키며 장전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카테인 님이 왜 죽었는지 알려준다고. 네가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아? 병을 앓아 죽은 거라면 적어도 그 병이 무엇인지는 알렸겠지.”

이안이 장전한 마탄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말해. 카테인은 왜 죽었지? 말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

“화났어?”

“닥쳐. 그리고 대답해. 카테인은 왜 죽은 거지?”

희로애락이 희미한 이안이 저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졸일 것까지는 없었다. 그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범인을 찾기 곤란했다.

“일단 그것부터 치우고 말하면 안 돼? 나 죽으면 말할 사람 없는데? 너도 알잖아.”

혹시 몰라 사실을 일깨워주자 이안은 마나의 탄환을 거두었다.

나는 이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어째서 대부분의 교수보다도 마법에 능숙하면서 구태여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도 포함이었다.

이안은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더 그러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천장을 봤을 때가 그가 엉엉 울며 눈물을 흘린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는 울지 않았다.

아기라면 배가 고플 때 울고, 대소변을 봤을 때 울고, 조금만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도 우는 법이었다. 이안은 울지 않았다.

그는 웃지 않았다.

어머니가 암만 장난감을 흔들고, 아버지가 멋들어진 곳에 데려가고,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어도 웃는 법이 없었다. 이안은 웃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버려졌다. 그게 7살 때였다.

우연히 허공에 떠다니는 푸른 에너지를 만질 수 있었고, 그걸 뭉쳐 던질 수 있었던 덕에 살아남았다. 그러다 운 좋게 전대 청색 마탑의 마탑주로부터 거두어져 마탑에 들어갔다.

마탑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감정이야 학습할 수 없었어도,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과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암기했다.

이안은 마탑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건조하게나마 감정을 인지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탑주는 돌연사했고, 이안에게 유언을 남겼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것을 겪거라. 그리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이안은 ‘더 넓은 세상’을 아카데미라 간주했고, 이곳에 입학했다. 여기까지가 이안의 배경설정이었다.

“기한은 1달로 하자. 내가 네 불면증을 치료하면 내 승리. 실패하면 네 승리.”

“1달은 너무 길어. 2주로 하지.”

“그래, 그러면 2주로 하자.”

이안은 딱 잘라 절반으로 줄였는데도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어딘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떠났다. 나는 그가 떠난 직후 수면제의 레시피를 곰곰이 떠올렸다. 물론, 이것 또한 비숏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비숏은 연금술에 있어 천재였다. 그녀는 매학기마다 연금술의 판도를 바꾸거나, 크게 진보시키는 발견과 발명을 한 가지씩은 꼬박꼬박해내었다.

이번에 내가 제작하려 건 비숏이 2학년은 돼서야 시도하는 것.

바로 이안의 불면증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비숏에게 있어 이안은 제 맘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우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안은 불면증으로 크게 고통받으며 자신을 필요로 했다. 이건 부족했던 비숏의 자존감을 채워줬고, 자신이 택한 연금술이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비숏은 자기 자신이 없더라도 항상 이안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으면, 바라며 수면제를 만들었다.

이 에피소드의 결말은 수면제를 마시기만 하면 푹 잠드는 이안이 효력이 없다고 거짓말하며 비숏에게 다가가는 거로 끝나지만, 결론적으로 수면제의 효과는 굉장했었다.

“2주라….”

기간 내에 수면제를 만들어내야 할 뿐 아니라 이안이 그걸 사용하고 효과를 보고 인정하는 것까지 해내야 했다.

어찌 보면 빠듯했지만,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다.

원작에서 비숏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갖가지 변수에 시달리며 수면제를 만들어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는 분야였다.

손안에 정답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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