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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9화 (9/125)

제9화

이안에게 먹일 수면제를 만드는 데 여러 재료가 필요했다.

웬만한 것들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다 구할 수 있었는데,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북부에서만 자라는 희귀 약초, 아르바니아가 바로 그러했다.

오늘은 아카데미의 수업이 텅텅 빈 주말. 아르바니아를 사기 위해 시간을 내 경매장에 방문했다. 다른 물건을 구경하는 건 겸사겸사였고.

지금 낙찰자를 가리는 품목은 인챈트 마법이 걸린 자물쇠였다.

“1000골드!”

“1100골드!”

“1200골드!”

경매의 참가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호가 금액을 찔끔찔끔 올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누가 확 거액을 질러주지는 않을까 기대감이 서렸다. 나랑은 연관도 없는 물건들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걸 보고 있자니 지루했다.

그, 왜 그거 있지 않은가?

그거.

그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클리셰였다.

경매장에서 다들 찔끔찔끔 금액을 올릴 때 통 크게 자릿수가 다른 금액을 부르는 장면.

누나는 그게 퍽이나 멋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쓸 때마다 반응이 좋았는지 작품을 쓸 때마다 그런 장면을 넣었었다.

주인공이나 혹은 그에 버금가는 캐릭터가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듯 특정 품목에 상상 이상의 가격을 입찰하는 장면. 그 뒤에 딸려오는 나머지 엑스트라와 조연들의 반응은 덤이었다.

그런데, 그거 돈 아깝지 않나?

왜 그러는 걸까?

이게 한국인의 종족 특성 때문인 걸까? 여기 사람들은 핏줄이 다르니까 한순간의 멋을 위해서 큰돈을 포기할 수 있는 건가?

경매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끽해도 2천 골드면 살 수 있을 품목을 20만 골드씩 질러대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골드를 질러대면 다른 경매 참가자들은 그게 누구인지 호들갑을 떨어대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는데, 그게 맞는 반응일까도 의심스러웠다.

나 같으면 멍청하다고 비웃었을 거 같은데.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요컨대 나는 경매장에 나와 있었다.

오늘은 수업이 비는 주말. 제국의 수도에 방문했고, 대형 경매에 참석했다.

“흐아아암.”

고가의 품목만을 거래하는 경매라 그런지 조용했다. 뭔가 신기하다 싶은 물건들이 나오기는 했어도 딱 거기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찾아온 아르바리아는 나오지 않았다.

아르바리아는 수면제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품목이었다.

경매장에 들어온 것도 이를 위함.

다른 물건들을 구경하는 건 겸사겸사였고.

물론, 혹시나 하고 기대하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나만 알고 있는 뭔가 특별한 물건. 그런 게 경매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게 단순히 망상이 아니고, 실제로 누나가 쓴 글에는 그런 장면이 꼬박꼬박 나왔다.

[신데렐라 랩소디]를 쓰기 전에 누나는 어느 견습 마법사가 그 탑의 주인과 밀당하는 빙의물을 썼는데, 거기서나 그 전작에서나 글에서 경매장이 나오면 꼭 그런 게 나왔었다.

주인공만이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는 뭔가를 싼값에 구매하는 장면.

대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장하는 그런 물건이거나, 나중에 가서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그런 물건이었다.

내심 내게도 그런 행운이 있기를 기대했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특별하다 싶은 건 없었다.

이대로 기다렸다가 아르바리아를 사는 게 최선. 난 지루함을 참으며 경매를 기다렸다.

“흐아아암.”

경매 행사의 진행자가 보온 기능이 있는 컵을 설명하는 걸 듣고 있자니 하품이 절로 나온다.

나름대로 실용적인 물건이니까 아무나 사가겠지.

역시나.

내 예상대로 꽤 많은 사람이 입찰했다. 호가는 1000골드, 1100골드로 점층 상승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10만 골드.”

쩌억 벌어지는 입을 합 다물었다.

어떤 미친놈이 고작해야 보온 기능이 달린 컵에 10만 골드를 불러?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나와 비슷했다. 기겁하며 10만 골드를 외친 얼간이가 누구인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시선 끝에는 대충 봐도 기가 막히게 비싼 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큰 키에 밝은 황금빛 머리카락과 시뻘건 눈알.

황태자네.

나는 속으로 조용하게 결론을 내렸다.

머리털과 눈알 색만 봐도, 황태자 아니야? 의심할 텐데 이딴 데에 10만 골드씩 질러댈 놈은 황태자뿐이었다.

카르테아 사비 이니에스피.

그는 제국의 황태자이자 명실상부 작금의 천하제일인이었다.

황가에는 대대로 용혈(龍血)이 흘렀다. 그들의 조상 중에 드래곤이 있었다는 설정 덕이었다.

용혈, 용의 피.

이는 사람을 초인으로 만들었다. 웬만한 공격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도록 몸이 튼튼해졌고, 무병장수했으며 완력이 강해졌다.

현재 황태자, 카르테아는 초대 황제에 버금갈 만큼 용혈이 짙었다.

그는 날 때부터 신력을 타고났다. 마나를 익히고 수행하기 전부터 바위를 들어 올렸고, 어릴 적 말을 타다 낙마했을 때도 멀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카르테아는 다른 남주들이 파워업 이벤트를 몇 번씩 겪으면서 성장할 때 수련조차 하지 않고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건 내가 읽은 4권까지도 매한가지였다.

나머지 남주 셋이 계속해서 성장했다고 묘사가 됨에도 황태자의 강함은 압권이었다.

그는 10만 골드란 거금을 쓰고서도 권태롭다는 듯 턱에 손을 걘 채 담담하게 다음 경매품을 기다렸다.

“아!”

경매의 진행자는 아르바니아를 들고 나왔다. 도라지꽃을 닮은 색감과 생김새였는데, 색이 조금 더 푸르렀다.

“120골드!”

“130골드!”

약초치고는 과할 정도로 비싼 금액이었지만, 앞서 나왔던 아티팩트들에 비하면 거저였다. 나는 괜히 돈지랄을 하는 대신에 다른 입찰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호가를 올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꽃이 이쁘군. 누이에게 주면 좋아하겠어.”

카르테아는 그리 말하더니 다시금 지껄였다.

“1천 골드.”

아.

망할.

미친놈이 여기에 참전했다.

나는 1천10골드를 불렀다.

“1만 골드.”

카르테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입찰한 다음에 상회입찰을 했다는 게 불만인 듯했다. 아니, 어쩌라고. 나도 저거 필요한데.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저놈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1만 골드 나왔습니다!”

진행자는 당장이라도 아르바니아에 대한 입찰을 종료시키려는 듯했다.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이걸 포기해야 하나?

그건 곤란했다.

이안과의 내기에는 2주라는 기한을 걸었다. 벌써 4일이 지났는데, 북부까지 직접 가서 아르바니아를 구하라고? 사실상 불가했다.

“1만 10골드….”

내 소심한 입찰에 진행자는 잠시 멈칫거렸고, 카르테아는 푸핫 웃었다.

이게 뭐가 웃기다는 건지 카르테아는 턱이 하늘을 향할 정도로 머리를 쳐들고 웃어댔다.

“그래 저 꽃은 네가 갖거라. 간절해 보이니.”

“예. 감사합니다.”

상회입찰자가 물건을 얻는 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심 쓴다는 듯 말하는 태도가 아니꼬왔지만, 참았다. 신분이 깡패였다.

* * *

경매장에서 큰돈 써가며 아르바니아를 구해왔다. 얼추 수면제를 만들 재료는 다 모았으니 남은 건 연금이었다.

누나는 자기가 하던 RPG 게임의 시스템에 영향을 받아 설정을 짰는데, 그 덕에 연금술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왜 있지 않은가? 재료들을 한 데 다 넣고 잘 섞어주면 정해진 아이템이 나오는 거.

특히 연금하려는 게 포션 종류였으면 더 그러했다.

그래도 현실이랍시고, 최소한의 개연성은 갖췄으나 딱 그 정도. 초심자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었다.

나는 큼지막한 솥에 마나 증류수를 콸콸 넣고 끓였다.

솥은 동화 속의 마녀가 어린아이를 잡아먹을 때 쓸 것처럼 컸다. 연금술 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는데, 여기에 온갖 재료들을 넣고 휘저었다.

사람도 넣을 수 있는 크기의 솥에 아르바니아와 잡다한 재료들을 넣었고, 나무판자를 꺼냈다.

나무판자는 재료들을 섞어주는 역할이었는데, 이게 또 판자의 종류가 다양했다. 겉보기에는 다 그게 그거였지만,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에 따라 연금술 성공률을 달리했다.

그중에서 내가 구해온 건 최상급.

미니 세계수라는 바오바오 나무로 만든 물건이었다.

바오바오는 마나 전도율이 높아 마법사들의 지팡이로도 만들어질 만큼 귀한 재료였다.

그걸 통째로 가져와 판자로 쓰니 과한 사치였지만, 돈이라면 여유가 있었다.

휘익휘익!

팔팔 끓기 시작한 증류수는 여러 재료들을 머금으며 색깔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투명했던 물이 사파이어 빛깔의 옅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이제 이게 채도가 최대한 높아질 때까지 잘 저어주면 성공이었다.

“쓰읍.”

파도처럼 찰랑이는 푸른 증류수를 보니 현대에 있을 때 즐겨 마셨던 이온 음료가 떠올랐다. 왠지 증류수가 맛있어 보이기도 했다.

이건, 먹는 거 아니야.

스스로를 타이르며 다시금 연금술에 집중했다.

휘이익, 휘이익.

판자로 내용물을 잘 섞었다. 꼭 국 끓이는 기분이었다.

연금술이란 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연금을 위한 재료를 구하는 것, 제조법을 알아내는 것 따위는 고달파도 그 두 가지만 해결하면 연금 자체야 누가 하더라도 비슷했다.

나 같은 초심자가 하더라도 완성만 해낸다면 크게 질이 떨어지지 않다는 뜻.

완성만 해낸다면.

“으악!”

뭐가 잘못된 걸까? 뭐를 잘못한 걸까?

원작의 비숏이 알아낸 제조법 그대로 증류수와 재료의 양을 맞췄는데, 보글보글 끓더니 그대로 솥 밖으로 흘러넘쳤다.

불의 온도가 문제였나? 원작에서는 단순히 표준 크기의 장작 셋에 점화했다고 묘사한 게 끝이었다. 그걸 지켰는데?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괜히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연금소가 비었을 새벽을 이용했는데, 불청객이 있었다.

연금학부 담당 교수 길버트.

아니 교수씩이나 되는 분이 왜 이 시간에 찾아오는 건데? 잠 안 자? 내일 수업 없어?

그는 다급하게 마법을 부려 솥에서 넘쳐난 액체를 증발시켰다. 아니,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를 보면 아마 아티펙트를 이용한 듯했다.

길버트는 바닥에 물이 넘친 걸 보고 눈에 쌍심지를 켰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양 눈치를 살폈다.

그는 휴대폰 대리점의 호객꾼처럼 웃으며 말했다.

“아아, 실수했구나. 여태 연구 쪽만 공부하고, 직접 뭔가를 만드는 건 처음인가 봐? 처음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소리 질러서 미안해. 괜찮아?”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나무라려던 게 아니고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래. 누구나 처음은 실수하니까. 불 조절 같은 것도 말이지. 나도 그랬어.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괜찮습니다.”

길버트는 다시 말했다.

“도와줄게. 같이 하자. 뭘 만들려던 거야?”

“어. 음. 그게….”

“비밀이야? 말 못 해줘? 아, 뭐 또 대단한 걸 생각해냈나 봐?”

“그런 건 아니긴 한데, 죄송합니다.”

길버트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차더니 말했다.

“뭘 만들 건지 몰라도 불 조절이야 할 수 있어. 이것까지만 해주고 갈게. 이게 뭔지 알아?”

길버트는 투명한 구슬을 하나 내밀었다. 내가 그걸 요모조모 살피고 있으니 길버트가 설명했다.

“열옥(熱玉)이라 하는 건데, 튀김 튀겨봤어?”

아. 들어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맞네. 이게 그거였네.

비숏도 나와 같은 실수를 했었다.

연금술 천재라는 설정이기는 해도 처음에는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랍시고, 나와 똑같이 불 조절에 실패했다.

그리고 똑같이 길버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때와 거의 상황이 같았는데, 딱 한 가지가 달랐다.

바로 길버트의 태도.

사람 좋은 길버트라지만, 연금술에 있어서 만큼은 혹독했다.

온화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철저한 실력주의.

아무리 잘난 가문 출신이라도 연금술에 재능이 없다 싶으면 가차 없이 굴었다. 어쩌다 불 조절이라도 실패하면 난리가 나는 것은 다반사.

하지만 내 앞에서는 다소곳했다. 그에게 흙뿌리망초의 사용법을 알려준 나는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일명 ‘재능충’인데다가, 그에게 큰 돈줄을 쥐어 줄 것이었으니까.

아카데미의 교수라고 해도 월급쟁이였다.

여러 곳에서 혜택을 받고 명예와 사람들의 존중이 따르는 직업이지만, 많은 돈을 만질 수는 없었다. 거기에 연금술은 돈이 많이 드는 분야였다.

기발한 발명품으로 사업을 대박 치지 않는 한 늘 돈에 쫓겨야 했다.

그런 점에서 나 정도면 길버트가 굽실거릴 만도 했다.

“튀김이요? 요리를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 음, 그래 보이네.”

길버트는 내가 귀족이라는 걸 상기한 듯 피식 웃었다.

내가 이곳에 물을 쏟았다는 것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원작에서 비숏에게 단호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상반된 태도.

“튀김을 튀길 때도 불조절, 그러니까 기름의 온도가 중요하단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까?”

“저야 모르죠.”

“하하. 그렇겠네. 그게 튀김을 넣기 전에 반죽만 조금 떼서 넣어보면 알 수 있거든. 이 열옥도 그걸 이용한 건데. 열옥을 넣으면 이게 아지랑이처럼 풀어지는데 그 속도를 보고 온도를 알 수 있어.”

“그게 연금에 무슨 영향을 끼치지는 않나요?”

“에이, 그러면 이런 걸 안 쓰지. 괜찮아.”

나는 길버트의 조언을 받으며 연금을 진행했다.

혹시나 내가 사용하는 재료들을 보고, 그가 암기해 나중에 만들어보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기우였던 듯했다. 길버트는 온도를 맞추는 데까지만 봐주고는, 자리를 떴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

멍하니 서서 판자로 저어주기만 하면 끝이었다.

“어우….”

길버트의 도움 덕에 연금은 성공적으로 끝냈다. 채로 재료의 건더기들을 건져냈고, 절반도 채 남지 않은 파란 액체를 병에다 담았다.

이제 이걸 이안에게 먹이기만 하면 될 일.

수면제 제조는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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