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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0화 (10/125)

제10화

나는 날이 밝은 대로 이안의 기숙사를 찾았다.

어차피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일어났어야 할 시간이라 민폐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불면증을 앓는 이안이 잠에 들었을 리도 없고.

내가 문을 두드리자마자 안에서 이안이 벌컥 문을 열었다. 아침이라 신경이 더 예민한 걸까? 그는 나를 찌릿 노려보더니 말했다.

“뭐야? 아침부터.”

“내기했잖아. 너 잠자는 거로 말이야. 그거 이겨주러 왔지.”

이안을 향해 수면제를 담은 포션을 내밀었다.

반쯤 차 있는 병을 거꾸로 뒤집은 다음 손목 스냅과 함께 위로 흔들었다. 포션의 내용물이 출렁이며 안에 회오리가 생기더니 서서히 풀려갔다.

“이거 수면제. 먹어. 잠 잘 와.”

“흥.”

이안은 보란 듯이 콧방귀를 끼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포션을 단번에 마셔댔다.

감미료를 넣지 않아 떫거나 아주 실 텐데 싫은 기색 하나 내지 않았다.

“내일까지 카테인에 대한 정보를 모두 가져와.”

“어. 그거 효과 없으면.”

나는 포션만 전해 준 뒤에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로 향했다. 이날, 마법학부 수석이 수업에 불참했다는 걸 들은 건 나중에 일이었다.

효과 한 번 직빵이네.

* * *

약속했던 대로 다음 날 아침에 이안의 기숙사를 찾았다.

고작해야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애가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싶을 만큼 변해 있었다. 축 처졌던 다크서클이 위로 쏙 들어갔고, 항상 기운이 없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얼굴에 뭘 한 것도 아니고, 잠만 푹 자고 왔는데 인상이 훤해졌다. 그건 목소리부터 티가 났다.

“무슨 일이야?”

이안은 내가 왜 찾아왔는지 뻔히 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었다.

수면제 효능이 톡톡했기 때문이겠지. 먼저 나서서 아무 효과 없었다고 거짓말하는 건 부담스러웠나 보다.

“내기했잖아. 그거 때문이지. 어제 내가 준 수면제, 그거 어땠는데?”

“아, 그거.”

이안은 뭔가를 떠올린다는 듯 눈동자를 위로 치우쳤다가 한 박자 느리게 말했다.

그게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순간 믿을 뻔했다. 그는 연이어 말했다.

“아무 효과 없더라.”

그는 입학식 때 했던 것처럼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했다.

워낙 능숙한 연기에 잠깐이지만, 내가 수면제를 만들면서 뭔가 실수하거나 잘못한 건 없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없었다. 이건 확실했다. 어딘가 잘못되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더 내놔. 용량을 너무 적게 준 거 아니야?”

“…….”

새끼, 구라치기는.

비숏한테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할 때와 똑같은 태도였다.

나는 그가 거짓을 지껄인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증명할 방법은 내게 없었다.

대신 이안에게 보란 듯 킥킥거렸다. 그는 내 반응에 움찔거렸다.

괜찮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다 예상한 일이었다. 이안이 이렇게 무리수를 둬가며 강압적으로 나오는 건, 그와 연관된 일이 워낙 심각해서였다.

카테인의 죽음에 대한 비사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야 할 테니.

“그냥 네가 이긴 거로 쳐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어제 진짜 못 잤어? 응?”

이안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네 수면제는 아무 효과 없었어.”

“네가 이긴 거로 쳐준다고 해도 고집을 부리네. 그래, 말해줄게. 카테인을 죽인 건, 디마겐이야. 이거면 된 거지?”

디마겐은 아직은 등장하지 않은 북부의 흑마법사였다. 필시 이안이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일 터였다.

“그게 누구인지 설명해줘야 할 거 아니냐!”

그러니까, 이안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오는 건 뻔한 일이었다.

“알았어. 자세히 알려줄게. 근데, 이건 순전히 내 호의잖아? 너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

순순히 호응해주는 걸 보면 구태여 내기를 걸 필요도 없었던 듯했다.

아니, 그건 또 아닌가?

뭐가 어찌 됐건 간에 비숏과 남주 한 명의 연관점을 잘랐다. 나름대로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였으니 헛수고는 아니었다.

“디마겐이란 자는…”

나는 이안에게 디마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카테인을 죽였는지.

* * *

디마겐은 제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흑마법사였다. 어디에도 없을 규모의 거대한 던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했다.

그는 힘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는 전형적인 타입의 악역이었는데, 제법 규모가 큰 악행을 여럿 벌였다.

디마겐은 수많은 마물을 제 사역마로 삼으며 인간을 납치했고, 그들을 실험체로 삼았다. 서부에 마탑을 세운 카테인은 디마겐의 표적 중 하나였다.

카테인은 오랜 수행으로 육체에 많은 마나를 쌓았고, 다양한 마법을 익혔지만, 전투 경험은 다소 부족했다.

디마겐은 카테인의 약점을 찔렀다. 카테인의 주특기인 광역 마법을 펼치지 못하게 민간인들을 끌어들였고, 포섭해둔 저주술사와 함께 협공했다. 카테인은 놀라울 정도로 분발하며 제 역량을 발휘해 싸웠지만, 수적 우위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카테인은 패배했다.

제 영혼의 일부를 디마겐에게 빼앗겼다. 그 영혼에는 상당한 양의 마나와 마법 지식이 담겨있었다.

카테인은 마지막 기지를 발휘해 어찌어찌 자신의 마탑으로 도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한 번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기란 어려웠다.

그는 서서히 죽어갔고, 혹시라도 이안이 제 복수를 한답시고 디마겐에게 찾아갈까봐 이 사실을 은폐했다. 마탑의 제자들에게는 그저 병을 앓은 것으로 둘러댔다. 카테인은 그렇게 죽었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 * *

“…하게 된 거야. 이제 알겠지?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이안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섰다.

붉게 달아오른 목과 얼굴을 보아하니 제대로 화가 난 듯했다.

꽉 쥔 주먹은 부르르 떨렸고, 피부 위로 돋아난 혈관이 꿈틀거렸다. 마나가 감정에 반응해 주변을 짓눌렀다.

나는 이안의 팔뚝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야, 일단은 진정하고 도와줄 테니까 들어봐.”

아카데미에도 보통의 학교와 마찬가지로 학기 사이마다 방학이 있었다.

본래 디마겐을 처리하는 건 원작에선 2학기 이후의 겨울 방학.

현재 디마겐은 더 많은 마물을 부리기 위해 북부로 터를 옮긴 채였다. 놈을 잡는 건, 안 그래도 추운 북부가 더더욱 추운 계절에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북부대공과 비숏이 얽히다가 어쩌다 보니 디마겐이 비숏을 납치하는데, 이때 북부대공과 이안이 힘을 합쳐 그녀를 구출했고, 디마겐을 쓰러트렸다.

이 과정에서 디마겐의 은신처가 공개됐는데, 북부의 최극단 지하였다. 이안은 북부대공과 함께 그곳에 쳐들어갔다가 고전 끝에 승리했다.

디마겐 자체의 능력이야 남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다 쳐도 그곳에 쌓인 함정과 사역마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만약에 이안이 단신으로 쳐들어간다면 패배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게 내게 이득일까? 내 생존에 도움이 될까?

나는 제국의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디마겐의 은신처가 있을 곳을 가리켰다.

“여기야. 디마겐은 여기 있어.”

“그래.”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믿었다.

왜? 내가 디마겐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 뭔가 어색하지 않나?

내가 디마겐과 합심해서 이안을 속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야, 내가 이걸 어떻게 아는지 안 궁금해? 내가 너를 속일 수도 있잖아.”

“알고 있다.”

“뭘? 주어 생략하지 말고 똑바로 좀 말해봐.”

이안은 답지않게 말하기를 주춤거렸다. 꼭 목구멍까지 퍼올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 고민하는 듯했다.

“야, 뭔데? 걍 말해.”

내가 그를 부추긴 후에야 그는 크흠,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네 부모도 흑마법사의 손에 죽었지 않나?”

“응?”

“내가 마탑 밖의 일에 무관심하더라도, 한 탑의 주인이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아.”

그게 그런 설정이기는 했다.

라파엘의 부모가 살아 있으면, 라파엘이 작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그러면 또 비숏을 괴롭히는 데 여러 곳에서 걸림돌이 생겼다.

그래서 누나는 라파엘의 부모를 죽였다.

내 머리털이 까만 것처럼, 요즘은 나쁜 놈들은 까만색인 게 유행이니 범인은 당연히 흑마법사였고. 그건 오로지 작가인 누나의 편의를 위해 꼽은 설정에 불과했다.

“너라면 믿을 수 있다.”

그러니 이안의 이런 반응은 부담스러웠다. 또 그렇다고 이걸 설명하자니 눈앞이 막막했다. 나는 그냥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래? 그러면, 그런 거로 치자. 주먹 쥔 것 좀 풀고.”

이안은 흥분해 있었다. 내가 정보를 조금만 더 준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디마겐을 잡으러 떠날 태세였다.

이걸 잘 유도하면 이안을 죽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작금의 이안은 홀로 던전에 숨은 디마겐을 쓰러트리기엔 버거웠다. 다룰 수 있는 마법의 숫자나 그 운용이야 이미 정상이라 해도 나이가 어렸다.

마나의 질과 양은 마법을 익힌 세월과 비례하니 한 방의 위력은 빈약했다. 원작에서는 이를 메꾸어주려고 이안에게 화가 날수록 마력이 강해진다는 설정을 붙여줬지만, 아직은 그 특성을 얻기 전이었다.

굳이 승산을 따져보자면 절반 미만.

내가 함정 몇 가지를 거짓으로 가르쳐 준다면 이안은 디마겐에게 죽을 것이다.

여러 남주중에서 하나가 죽는 일이니 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선택.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이걸 당연히 택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이안이야 비숏이랑 잘 될 가능성이 밑바닥까지 떨어졌는데, 차라리 끝까지 이용해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이안의 마법 재능은 세계관 제일. 어쩌면 위기의 상황에 날 도와줄 수도 있었다.

마음을 정한 나는 디마겐을 잡기 위한 준비물을 몇 가지 언급하며 그를 설득했다. 지금은 위험하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 * *

아카데미에 들어오려 애썼던 이유 중 가장 컸던 건 바로 카타리나였다. 제국에 몇 없는 소드마스터이자 훌륭한 검술 스승인 그녀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원작의 제프린은 카타리나에게 검술을 배우고 눈부신 속도로 발전했다.

원작의 제프린은 서브 남주의 클리세나 다름 없는 캐릭터였다. 아둔할 정도로 곧은 소나무 성격을 제외하고도 그러했다.

그가 독자들에게 매력을 호소할 포인트를 꼽아본다면 밀당 없는 직진 순애보와 뛰어난 검술 실력뿐이었다. 다른 남주 캐릭터들이 빵빵한 가문과 재력, 권력 따위를 자랑하는 데 비하면 퍽 수수했다.

원래대로라면 과감하게 최종 남주 목록에서 제외했을 캐릭터였지만, 누나가 제프린의 장점을 내게 하나하나 각인시켜준 것 때문에 완전히 제하기에는 불안요소가 너무 컸다.

- 순애보, 순애보가 핵심인 거야.

- 네가 뭘 알아. 이건 아둔한 게 아니라 충성을 넘어선 사랑이라니까.

- 이런 캐릭터들이 막 치고 올라와야 해. 여주 옆에 딱 붙어있어야 그림이 산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비중을 늘려주고, 그럴듯한 에피소드를 몰아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우선 으뜸가는 문제를 꼬집자면 바로 전투력이었다. 제프린의 성격적인 면을 제외한다면 남는 건 검술뿐이었는데, 막상 전투력도 여타 남주들에 비해 크게 밀렸다.

특히 아카데미 입학 파트를 기준으로 한다면 제프린으로 한 소대를 만들어도 다른 남주에 비비지 못했다. 그럴 만큼이나 제프린은 약했다.

그 원인은 제프린 고유의 빈약한 파괴력.

아카데미 입학 직후의 제프린은 이안의 배리어 하나 부수지 못한다.

검을 암만 빠르게 휘두르더라도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아무짝이 쓸모없었다.

이렇게 연약한 제프린을 위한 파워업 이벤트가 있었으니 바로 카타리나의 가르침이었다.

검성, 카타리나.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과 함께 제국 제일의 검객으로 꼽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검술을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데도 재능이 철철 넘쳤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가 성장할 수 있을까 정확히 판단하며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감추었다.

카타리나는 제프린에게 색다른 기술을 가르치며 그의 파괴력을 증가시켰다.

오늘은 카타리나의 첫 수업.

무엇을 배울까 두근거리며 연무장을 찾았다. 그녀는 방긋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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