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1화 (11/125)

제11화

“나는 말이야 사람한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개성이라고 생각해. 생각해봐. 강해지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서 모두가 똑같은 길을 걷는 꼴을. 그런 놈들끼리 싸우면 얼마나 지루하겠어?”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너한테 뭘 가르칠까, 뭐를 가르쳐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네 장단점을 정리해봤거든?”

그녀는 순간적인 판단력과 동체 시력 따위를 장점으로 가리켰고, 검의 파괴력, 속도와 같은 피지컬 적인 요소를 단점으로 지적했다.

“나는 백사자 할배랑은 다르게 열린 사람이란 말이야? 그래서 굳이 네 스타일을 바꾸고 싶지는 않아. 지금 그대로 가자. 지금 그대로도 괜찮으니까.”

방어 이후 역습을 통한 카운터.

그게 카타리나가 주장한 내 싸움 방식이었다.

일단 카타리나는 세계관에서 알아주는 천재이니 그녀가 시키는 대로 수련하면 분명 강해질 터였다.

그러나 이대로 고분고분 지도를 따르기에는 불안 요소가 많았다.

우선, 지금 카타리나는 내가 실력으로 제프린을 이긴 줄 알고 있었다.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싸우기 전 제프린의 검술의 특징과 기술 따위를 모조리 암기했고, 원작을 통해 제프린의 성격을 안 탓에 심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져 우격다짐으로, 억지로 따낸 승리였다.

진짜로 내게 필요한 건 황태자 같은 먼치킨이 기분이 상했답시고 던지는 주먹 한 방을 막아낼 힘과 기술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도저히 막아내지 못할 공격을 받게 되면 어떡합니까?”

“당연히 죽는 거지. 우리가 수련하는 게 그럴 일을 없게 하기 위한 거니까 열심히 해.’

“예, 저도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전 그럴 일이 생길 거 같아서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과 제프린을 이긴 실력이 가짜라는 걸 어떻게 감추고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방법이 마뜩잖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바보같이 우기는 것뿐이었다.

“그냥 훈련 열심히 하기나 하라니까?”

“네, 물론 열심히 하죠. 그런데, 저한테는 그럴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반드시 싸워야 하는 일이요.”

“싸우기 전에 열심히 수련해서 강해져.”

“그 상대는 저랑 재능부터가 다릅니다. 평생 노력한다고 해도 따라가지 못할 차이가 있습니다.”

빡!

카티라나가 내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이건 보통 딱밤이 아니었다. 딱밤을 날릴 때 중지에 손톱 부분을 장전한 게 아니라 관절이 접히는 부분을 잡아당겨다가 반동과 함께 튕겼다. 일반적인 딱밤이 아니라 그야말로 파워풀 딱밤!

무시무시한 딱밤에 이마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카타리나는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닥치고 열심히 하기나 해. 내가 약속해줄 수 있는 건 딱 하나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존나 열심히 해. 그러면 내가 널 존나 세게 만들어 줄 거야. 드래곤이랑 싸워도 이길 수 있게.”

그 말에 피식 웃을 뻔한 걸 참았다.

지도 드래곤 못 이기면서.

그래도 위안이라면 됐다. 세계관 최고의 검술 선생이 자기만 믿으라면서 격려해주는데, 의욕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나는 카타리나로부터 기초 동작을 몇 가지 교정받았다. 그녀의 교정은 세심했고, 간결했다.

‘흠, 나쁘지는 않은데….’

카타리나의 가르침이 시작된 지 약, 일주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카데미 입학 전에 휘두르던 검과 지금이 검이 완전히 달라진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 * *

비숏 퓨어문은 아카데미에 입학과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연달아 겪었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라파엘이 검술학부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것이었다.

라파엘은 아이작 가문의 뛰어난 핏줄을 이었다고는 하나, 그게 전부인 남자였다.

그는 일찍이 제프린의 재능에 절망했고 길을 꺾었다.

그는 검을 놓았다. 그런 라파엘이 검술학부에 입학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는데, 그가 수석을 차지했단다.

말도 안 돼!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건, 대련으로 제프린한테서 승리했다는 걸 뜻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비숏은 까만 머리털이 좌우로 들썩일 만치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검술에 문외한인 비숏이었으나 제프린이 천재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그를 가르쳤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며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어쩌면 언젠가 소드마스터에 오를지도 모를 초신성, 그게 제프린이었다.

거기에 더해 제프린은 노력했다.

어릴 적 자신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붙잡았고, 휘둘렀다.

손에는 굳은살이 붙고, 그 굳은살이 갈라져 떨어지고, 다시 굳은살이 붙기를 반복해 손바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검술을 연마했다.

독하다고 소문난 가문의 기사들도 기함해댔다.

그런 제프린을 이겨? 라파엘이?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비숏은 곧바로 제프린에게 찾아가 라파엘에게 패배한 것이 진실인지 물었다. 제프린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예, 제가 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지키기엔 제가 너무 나약하다는 걸 깨달았죠. 강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그간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입학과 동시에 제프린은 휴학했고, 아카데미를 떠났다. 그의 표정에는 어딘가 후련한 구석마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비숏은 생각했다.

‘그간 내가 너무 연금술에만 치중했나?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모르는 건가?’

얼마 전 연금술에 있어서 큰 성과를 얻었다. 제법 대단한 발견이어서 이걸 잘 정리해 발표한다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듯했다. 덕분에 학기 초부터 시작했던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공부에만 치중했다.

그건 흙뿌리망초에 관해서였다.

기존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포션은 트롤의 혈액을 이용했는데, 포획한 소수의 트롤로도 많은 포션을 만들 수 있어 기회비용 대비 효율이 높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기사와 용병들이 트롤의 혈액으로 만든 포션을 애용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걸 사용한 건 아니었다.

트롤의 혈액으로 만든 포션은 종종 피부를 착색시켜 꺼리는 이들이 많았다. 한 번 착색 자국이 남으면 무슨 수를 써도 지워지지 않아 얼굴이나 손 따위의 피부가 드러나는 곳에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비숏은 미소를 지었다.

포션이 일으키는 착색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찾았다. 흙뿌리망초를 이용하면 착색된 피부가 본래에 색으로 회복했다. 그녀는 이를 논문으로 정리했고, 첨삭을 받고자 길버트에게 찾아갔다.

“응? 이거 이미 내가 발표했는데?”

길버트는 난감한 상황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카타리나의 검술 지도는 의외로 정석적이었다.

막 돼 먹은 성품이나 다혈질인 성격 따위를 고려하면 무식하게 근력 운동이나 시킬 줄 알았는데, 내가 웨이트 하는 모습을 보더니 메카닉은 알아서 키우라 시키고는 검술의 디테일에만 집중했다.

“어차피 네 몸에 성능은 정해져 있어. 나는 사람이 자기 한계 이상의 실력을 발휘한다는 개소리는 무시하거든. 그러니까 네가 연습할 건 네 몸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거야.”

검을 휘두를 때, 찌를 때 사용해야 할 근육과 사용하지 말아야 할 근육을 배웠다.

몸의 무게 중심과 축의 이동, 부족한 완력으로도 힘 싸움에서 이기는 법 따위를 암기했다. 카타리나의 검술 수련은 다분히 이론적이었다.

“의외입니다.”

“뭐가?”

“칼 하나 냅다 던져주고, 무작정 덤비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설명도 조리 있게 잘하시고, 훈련도 체계적이라 말입니다.”

“야, 뒤질래?”

“하하하하.

확실히 카타리나에게 배울 때마다 몸이 최적화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검술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서 동작이 훨씬 매끄러워졌다. 각기 기술을 쓸 때마다 근육의 자극을 느꼈고, 관절의 움직임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러나 기대에는 못 미쳤다.

카타리나가 대단한 선생인 건 맞았지만, 원작에서는 선생보다는 마치 RPG 게임의 전직관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원작에서 제프린을 가르칠 때는 RPG 게임에서 전직관이 내주는 퀘스트를 깨면 단번에 성장 한계치를 늘려주듯이 진화시켰다.

제프린은 그녀에게서 수업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배로 강해졌다.

“좀 더 빠르게 강해질 수는 없는 겁니까?”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원작에서 제프린의 경우 카타리나에게 검의 위력을 단번에 키워주는 무언가를 배웠다. 나에게도 그걸 토해내라는 의미였다.

카타리나는 발뒤꿈칠 땅을 쿡쿡 찍었다.

의뭉을 떠는 건지, 아니면 그건 제프린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인 건지 그녀는 콧방귀를 끼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냐? 당연히 없지.”

카타리나는 검지로 내 등을 콕콕 찔렀다.

“대체 누구길래 그러는 거야? 누구랑 싸워야 하는데? 어디랑 척을 졌는데? 아, 너 귀족가였지? 가문 문제냐? 가문에서 뭐 힘든 거 시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야, 그러고 보니까 말인데.”

카타리나는 갑작스럽게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야, 너 여기 입학한 다음에 길버트한테 찾아간다고 약속하지 않았냐? 걔가 너 찾던데?”

아.

맞다.

제프린과의 대련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길버트에게 한 번 만나러 찾아간다고 약속했었다.

그때 당시, 카타리나는 원작의 흐름대로 제프린의 검술에 매혹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내가 제프린과의 대련에서 승리하더라도 카타리나가 제프린을 뽑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경우를 막고자 길버트를 찾아갔고, 카타리나를 도발했다.

그렇게 카타리나한테서 내가 제프린을 이긴다면 제자로 삼아주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백작이란 지위를 지키고, 내 호신을 위해서라면 무력은 필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뒤에 이안에게 수면제를 만들어준답시고, 연금소를 사용해 마주쳤으나 제대로 대화를 한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길버트는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너, 동아리는 연금술로 넣었으니까, 오늘 수업 끝나면 찾아가 봐.”

“예?”

“애초에 연금술에 관심이 많다며?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담당 교관 권리로 그렇게 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이거 끝나면 바로 가봐. 길버트가 찾더라.”

“아니, 그걸 왜 마음대로 하십니까?”

“야. 내가 너한테 가르쳐주는 이게 얼마나 귀한 건지 알고 따지는 거야? 스승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연금술 동아리에 가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비숏을 만나게 되었다.

언젠가는 치러야 할 일이었지만, 완벽을 기리기 위해 최대한 뒤로 미뤄두었던 게 뛰쳐나왔다.

이제 그걸 직면해야 한다.

“오늘 동아리 4시부터니까, 그때까지 출석 찍어. 길버트가 또 안 왔다고 하면, 너 죽는다.”

“알겠습니다.”

이날 동아리방에서 내가 생각보다 원작을 무지막지하게 비틀었다는 걸 깨달았다.

원작에서의 비숏은 연금술 학부였으나, 학문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을 향한 괴롭힘에서 벗어나는 데 애썼다.

하지만 원작에서 라파엘의 집착과 괴롭힘은 집요했고, 결국 비숏은 초반부엔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괴롭힘이 없었던 탓에 그녀에겐 연금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거기다 본래라면 괴롭힘을 피하고자 제프린과 함께 다니다가 여러 사건에 휘말리고, 이안과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며 썸을 탔을 텐데, 그런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녀가 본래라면 중간고사 이후에나 착상했을 흙뿌리망초에 관한 걸 이미 알아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