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비숏 퓨어문의 아카데미 생활은 예상과는 다르게 평탄했다.
라파엘이 자신을 따라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그때의 불안이 싹 가셨다. 어찌 된 일인지 그간 지독했던 라파엘과의 연이 끊겼다.
그 덕분에 그토록 바랬던 대로 연금술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연금술에 매진했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아카데미의 도서관에서 온종일 연금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다양한 약초와 연금 방법 따위를 배웠다.
공부 중에 오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길 몇 번.
눈이 뜨였다. 연금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각각 멀리 떨어졌었던 약초와 기술들이 선으로 이어졌다.
그 끝에 흙뿌리망초의 새로운 사용법을 발견했다.
학부생의 성과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발견이어서 온종일 이에 대해서만 탐구했고,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순조로웠는데,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걸까?
길버트가 자신의 성과를 먼저 발표했다고 한다.
우연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게다가 길버트의 말로는 자신에게 핵심적인 힌트를 준 자가 바로 라파엘이라고 했다.
라파엘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빼돌려 길버트에게 가져다 바친 게 분명했다.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꺼졌다. 역시나 세상에 믿을 만한 인간은 몇 되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상기했다.
하기야 우스운 일이었다.
라파엘이 제프린을 검술로 이기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비숏은 둘의 대련에 카타리나의 개입이 있었다고 확신했다. 길버트와 카타리나의 약혼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소문에 어두운 자신도 알 정도였다.
라파엘이라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이를 먼저 접했을 것이고, 길버트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라파엘은 길버트에게 흙뿌리망초에 대한 착상을 전달했고, 길버트는 그 대가로 카타리나를 매수하도록 도왔다.
카타리나 또한 라파엘로부터 뭔가를 받고는 대련에서 편파 했겠지.
의도적으로 라파엘에게 유리하도록 대련을 유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검술 대련에서 라파엘이 제프린을 이기는 것도 가능했다.
비숏이 보기에도 고지식한 구석이 있는 제프린은 그것도 모르고, 승부 결과에 승복했고, 아카데미를 떠났다.
아니, 어쩌면 거기까지도 라파엘이 계획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금 떠올리면 제프린이 아카데미를 떠난 배경에는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휴학을 선택한다고 해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라파엘이 제프린을 유도한 게 명백했다.
라파엘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과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씩 멀어지게 공작하고 있었다.
아주 그럴듯한 추리해 비숏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라파엘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겠구나, 낙담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라파엘이 정보를 훔쳐간 방법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연구는 철저하게 개인 공간에서 했다. 이따금 도서관 따위에 들락거리기는 했어도 누가 엿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단 말인가? 그 수법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라파엘한테 뭐라고 따져야 할까? 그가 잘못을 인정하기는 할까?
비숏은 고개를 저었다.
그와 얽혀봤자 스트레스만 더 받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참고 넘어가자. 그와 마주치더라도 이를 악물고 무시하자.
길버트에게 따르면 라파엘 또한 동아리로 연금술을 택했고, 금일 오후에 출석한다고 들었다. 여기서도 그를 마주 봐야 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래도 망한 것만 같은 상황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시계를 확인하니 지금 시각은 15시.
1시간 후에는 연금술 동아리 방으로 찾아가 길버트를 만나야 했다.
에휴.
그때 왜 그런 말을 해서 일을 이렇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카타리나로부터 검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후회가 들었다.
연금술 동아리.
그곳에는 비숏도 자리할 게 뻔했는데,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슴이 꽉 막혀왔다.
모르는 척할까?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다. 이게 가장 마음이 편한 방법이기도 했다. 비숏도 나를 꺼리고 있을 테니, 내가 못 본 척 무시하고 지나간다면 구태여 말을 걸지는 않을 터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쪽으로 가고 싶었다.
마음이 크게 기울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거는 꼭 내가 흙뿌리망초를 훔쳐 간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꼴이 아닐까?
그렇다고 말을 걸고 평소처럼 대하자니 그건 그거대로 불편했다. 비숏은 반드시 나를 의심하고 있을 텐데, 그걸 피해갈 수 있을까? 불가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둥거리기만 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이제는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동아리 방을 향해 발을 옮겼다. 걸어서 족히 10분은 가야 할 거리였는데, 눈을 깜빡이니 코앞이었다.
연금술 동아리에서 만난 길버트는 나를 환대했다.
동아리 방의 문을 열자마자 교수씩이나 되시는 분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벌떡 일으키며 마중 나왔다.
“왔어? 한참 기다렸잖아. 너, 식당에서는 그렇게 친하게 굴더니 입학 후에는 연락이 없더라? 내가 일부러 너 약 만드는 것도 도와줬는데… 어떻게 됐는지 말도 없고, 그간 잘 지냈고?”
“예, 무탈하니 잘 지냈습니다. 입학 초기라 그런지 생각보다 일이 많더군요. 한 번 찾아뵈려 했는데,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 그래. 맞아. 입학 직후에는 여기저기 들릴 데도 많고 바쁘다고 하다더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몸을 숙이더니 서랍을 뒤적거렸다. 거기서 서류를 몇 장 꺼내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거 좀 봐줄래?”
그가 흙뿌리망초의 새로운 사용법을 발표한 논문과 그와 관련된 사업 방안, 계약서 따위였다.
이야, 행동력도 좋네.
그 짧은 기간 동안 언제 이걸 다 한 건지 놀라웠다. 추진력이 무슨 로켓이라도 달린 듯했다.
길버트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내가 이거 그냥 혼자 먹지 않을 거라 했잖아. 사실 꼬치꼬치 따지면 다 네가 해낸 거나 다름이 없는데.”
그는 수익금 배분이나 공동 저자 따위의 여러 가지를 언급하며 떠들었는데, 나는 각 물음마다 좋다고 하거나 마음에 든다고 동의했다.
대충 요약하면 나는 가만히만 있어도 돈 들어온다는 거였다.
한데, 내게는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요소가 있었다.
비숏은 우리의 대화를 안 듣는 척, 구석에 앉아 시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제 딴에는 연기를 하고 있었겠지만, 시약을 잡은 손이 멈춰 있었다. 나와 길버트의 대화를 엿듣는 거겠지.
때마침, 길버트가 피해왔던 소재를 입에 담았다.
“그런데, 흙뿌리망초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는 연이어 말했다.
“사실 요즘 유행하는 품목은 아니잖아? 그런 쪽으로 접근하기도 어려웠는데, 어떻게 안 거야?”
슬쩍 눈알을 돌려보니 비숏은 이제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대놓고 이쪽을 구경했다.
내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다는 태도였다. 그녀의 시선이 내 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그에 준비해놓은 말을 뱉었다.
“저는 아이작 가문의 장남입니다. 아이작 가문에는 검가(劍家)를 칭하지만, 역사가 깊은 덕에 여러 학문에 능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연금술도 그중 하나고요.”
내가 알고 있는 건 흙뿌리망초 하나가 아니었다.
작가 공인 연금술 천재 비숏은 매 권마다 기가 막히게 대단한 발견을 1개씩은 꼬박꼬박 해내었다.
글을 읽은 나는 그 전부를 알고 있었고, 그를 풀어낸다면 비숏의 의심을 뿌리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증명하고자 말했다.
“흙뿌리망초를 제하고도 몇 가지를 더 알고 있습니다.”
길버트는 입을 쩍 벌리며 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내가 알고 있다는 게 뭔지 궁금해하는 듯했는데, 억지로 참는 기색이 강했다. 이건 길버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숏한테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탈모약에 대한 비밀을 하나 풀었고, 길버트에게 이로 얻을 수익금의 절반을 약속받았다.
* * *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비숏한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웃으면서도 내가 제대로 웃고 있는 걸까 걱정이 들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살짝 접고는 있는데,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우스꽝스러울 것만 같았다.
비숏은 머리를 살짝 숙이더니 대답했다.
“네, 오래간만입니다. 저야 라파엘 님의 배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간 무탈했으니까요.”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나를 만날 일 없어서 좋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렇게 만나게 돼서 이제는 문제가 생길 거 같다는 말이기도 했다.
비숏은 그 말을 하고는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다는 듯 입을 다문 채 바닥에 눈을 내리깔고 내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애가 왜 이럴까?
내가 비숏이었다면, 내가 흙뿌리망초 정보를 훔쳐 간 게 사실인지 아닌지 떠보기 위해서 온갖 말을 주워섬겼을 터였다.
애는 왜 이렇게 담담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알 법했다.
단단히 화가 난 걸 보니 그녀는 추궁, 의심 따위를 넘어서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어떤 증거를 보여주고, 또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에 대한 불신이 내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품게 했다. 그걸 마주하니 의지가 무너져내렸다.
‘그냥 포기할까?’
일이 꼬였다.
처음 내가 이곳에 빙의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떠올린 방법을 두 가지였다.
비숏이 강력한 남주와 이어지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혹은 비숏과 사이를 회복하는 것.
전자의 경우라면 꽤 순조로웠다.
안 그래도 스펙이 부족한 제프린의 경우 아카데미에서 아예 아웃시켜버렸고, 이안이라면 연결점을 지워버렸다.
남은 후보는 둘.
황태자와 북부대공. 이 둘은 제프린과 이안에 비해 몇 배는 까다로웠지만, 여태까지 잘 해온 걸 보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비숏이랑 친해져서 라파엘이 벌인 일을 무마하는 쪽보다야 훨씬 그럴듯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다 양쪽 모두 놓칠지도 모를 일. 이제라도 길을 정할까?
‘정말로 그냥 포기할까?’
비숏한테 세상에 다시는 없을 개새끼로 남아도 그녀가 어느 남주와도 이어지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괜찮은 일이었다.
그녀가 공작가의 자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도,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를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어떤 해도 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도 괜찮지 않은가?
‘아니야, 북부대공은 몰라도 황태자를 밀어내는 건 너무 어려워.’
나는 다시금 웃었다.
표정을 재정비했다. 눈을 살포시 깜빡이고는 살짝 접으며 입가를 당겼다. 자포자기랍시고, 판을 엎는 건 멍청한 짓.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다.
“길버트 교수님으로부터 너도 흙뿌리망초를 공부했다고 들었어. 그거 대단한데?”
“네. 그렇습니다.”
“내가 너를 방해한 꼴이 됐네. 미안해. 대신에 다른 거를 알려 줄게. 이거도 충분히 돈벌이가 될 거야.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내가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괜찮습니다.”
“내가 미안해서 그래. 그냥 받아 주면 안 될까?”
비숏은 한숨을 쉬더니 내리깔았던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감정을 참다못해 넘쳐난 듯 안구에 물방울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게 눈동자의 붉은 빛을 반사해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라파엘 님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 상황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당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당신이 그를 빌미로 무엇을 요구할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