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평이한 어조였다.
대개 한 번에 많은 말을 토해낼 때면 따발총처럼 쏘아내기 마련인데, 비숏은 평상시와 똑같은 속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바뀐 건 목소리뿐이었다.
그녀가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잠겼다.
비숏은 울었다.
루비였던가? 사파이어였던가? 아마 빨간 걸 보아하니 루비였던 듯했다.
큼지막한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에서 눈물을 줄줄 쏟아냈다.
비숏은 그게 분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하하, 아카데미라는 환경이 좋다는 걸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곳이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당신한테 불만을 쏟겠습니까? 다시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내 어리석었던 판단을 원망했다.
언제라도 비숏이 폭발할 수 있다는 걸 예측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원작만 믿고 행동했다.
비숏은 나를 노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 해야 하지? 멍청한 나라도 여기서 무작정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건 역효과를 불러온다는 건 알았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아, 미치겠네.
나도 울고 싶었다.
* * *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이유는 보통 학습을 위해서였다.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며 새로운 혹은 더 발전된 학문을 배우고, 성장하는 게 목표였다.
그를 위해서 아카데미는 학생들을 압박했고, 등을 떠밀었다.
만인에게 열린 배움의 장, 그게 아카데미의 설립 이념이었다.
“잠깐 시간 있으신가요?”
방긋거리며 웃는 이 여자는 그런 이념 따위를 비웃는 듯한 외관이었다. 생김새와 옷차림이 무지막지하게 화려했다.
머리카락만 해도 태양을 반사하리만치 밝은 금발이라 눈에 띄었는데, 귀와 목, 손가락 따위에는 여러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나는 공부 같은 거 관심 없어요.’
를 외치는 듯한 인상.
그게 나비에 러브원이었다.
그녀는 <신데렐라 랩소디>의 악녀 역할이었는데, 누나의 국룰 악역 3호 타입이었다.
누나는 악녀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었다.
하나는 주인공 타입의 악역이었다.
이런 경우 해당 캐릭터가 그대로 악역으로 남아 주변에 사이다를 때려꼽거나, 혹은 개과천선을 하여 달라진 주인공에 대한 주변의 평판을 통해 대리만족을 주는 식으로 전개했다.
이와 반대로 다소 평면적이고, 극의 장치로서 기능하는 악역 타입이 있었다. 대게 조연 혹은 엑스트라에 해당하는 캐릭터들이었다.
즉, ‘나 양아치요’를 주장하며 초반에 주인공을 갈구고 괴롭히거나, 남주들이 주인공에게 도움을 줄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이었다.
남주 캐릭터들이 독자들로부터 호감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 역할.
또 그 중에서도 음흉하게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해 주인공을 괴롭히는 흑막 유형이 있었다.
언제나 스스로 유행을 선도한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나의 누나는 로맨스 판타지의 악역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새로운 유형을 만들었다.
기가 막히게도 전자와 후자를 합쳤다. 타고난 신분에서 벗어나 높이 오르려는 욕망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뼈대와 이를 위해 주인공인 비숏을 괴롭힌다는 장치로서 역할을 엮었다.
나비에 러브원은 황태자비에 오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비숏을 아카데미에서 쫓아버리기 위해 괴롭히는 것이 그중 하나.
그녀는 비숏을 면전에서 거리낌 없이 모욕하고, 괴롭히면서 뒤에서도 엉큼하게 평판을 낮추고, 무리에서 겉돌게 조작했다. 그야말로 악역 중에서도 악역.
“잠시 시간 있으시냐니까요?”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내게 눈웃음을 쳤다.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건 3초.
고작해야 3초였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이 결정되고, 이는 꽤 오랫동안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3초였다.
그녀는 3초 안에 사람을 홀리기 위해 혹독하게 눈웃음을 연마했다. 15살이란 나이에 거식증을 앓게 한 식단보다도 웃음을 연기하는 게 더 괴로웠다고 할 만큼.
나비에 러브원에게 있어서 눈웃음을 필살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미소를 무시했다.
오히려 눈웃음 기저에 깔린 속내를 파악한 채 그걸 보고 있으니까 소름이 돋았다. 속이 메스껍고, 솜털이 곤두섰다.
만악의 근원이 나에게 친한 척을 했다. 이게 꼭 동반 자살을 권유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웃지 마. 못생겨 보이니까.”
애랑 길게 엮이는 건 죽어도 피하고 싶었다.
애도 나랑 마찬가지로 악역다운 최후를 맞이한다. 우리 둘이 같이 있어 봤자 마이너스에 마이너스였다.
“예?”
나비에는 친모의 엄격하고도 냉정한 교육으로 어느 영애보다도 잘 꾸몄고, 외모에 집착했다.
말투, 표정, 행동거지는 기본이었고, 장신구 하나도 대충 고르는 법이 없었다. 언제, 어느 순간 누구 봐도 아름다울 수 있게 준비했다.
농구의 신, 마이x 조던이 경기를 치르는 태도와도 비슷했다.
그녀에게 있어 ‘못생겼다’는 더할 나위가 없는 모욕이었다.
잠시나마 처세술마저도 있고, 말을 더듬을 만큼.
“못생겨요? 제가요?”
“그래.”
“구체적으로, 어디가 마음에 안 드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음, 내 말을 진짜로 믿었나 보다.
동공에 지진 났고, 시체 같은 숨소리가 인간답게 변했다.
아니, 어쩌면 여기까지도 연기일 수도 있었다. 적당히 허점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매력적이라고 배웠을 줄 누가 알겠나?
나는 나비에와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눈이 너무 커서 개구리 같네. 입꼬리 올라가는 것도 가식적이고 시뻘게서 무서워. 거기다 콧볼도 너무 좁고···.”
“네?”
개소리였다.
그냥 기분 나쁘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 지적이 예상보다 자세한 게 충격이었는지 나비에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얼굴을 붉혔다.
애는 가진 게 외모밖에 없는 애였다.
남아선호가 극심한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는 무관심을, 어머니로부터는 미움을 샀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 로니아는 나비에가 태어난 직후부터 그녀를 증오했다.
로니아는 임신을 꺼렸다.
임신 중에는 거동이 불편한 탓에 살이 찔 게 뻔했다. 피부가 늘어질 게 확실했다. 동년배 중에는 임신 후에 탈모가 온 귀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살이 찌고, 피부가 탄력을 잃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빈 자신을 상상했다.
끔찍했다.
그렇게 변한다면, 남편의 사랑의 불꽃도 움츠러들 테고, 자신의 입지는 줄어들 터였다.
출산의 무서움도 한몫했다. 로니아에게 있어 임신이란 재앙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니아는 임신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치가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낳는 데 있음을 명확히 인지했다.
어차피 해야 할 임신.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잘 넘기기라도 해야 하는 법. 로니아는 반드시 원샷 원킬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불행하게도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염원했던 아들 대신에 나비에를 낳았다. 로니아는 다시금 임신해야만 했다.
나비에는 그렇게 태어난 아이였다.
사랑해줄 사람은 자기 자신뿐인 애였다. 그래서 자기애가 강한데, 그 원천이 외모였다.
나름대로 사정 있고, 불쌍한 애한테 심한 말을 하려니 찜찜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디 이게 나 혼자 잘 살자고 하는 일인가? 모두를 위한 일이다.
‘이거도 다 애를 위한 거지.’
나비에가 나한테 접근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자기가 비숏을 엿 먹일 테니, 도와달라는 거.
원작에서 그랬다.
그래야 자기가 황태자랑 이어질 공산이 커지니까.
벌써 이렇게 견제에 들어가는 걸 보면 나비에의 눈에도 비숏의 외모는 비범했나 보다.
라파엘은 멍청했다.
비숏을 압박하고 괴롭힐 놈이라고는 누구일지 뻔한데, 나비에의 뒤에서 숨어 공작을 벌이면 들키지 않을 거라 여기며 거리낌 없이 나비에게 협력했다.
라파엘 하나만 해도 마이너스인데, 똑같은 나비에를 더했다.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다.
그렇게 라파엘과 나비에는 서로 손발을 맞추다가 황태자한테 들켜 펑 얻어터졌다.
“사람 취향은 다양한 법이니까요. 전 이해해요.”
풉.
침이 튀길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나비에는 피드백에 대한 수용이 잽쌌다. 내가 내뱉은 모욕 때문인지 나비에는 웃는 방법을 고쳤다. 눈을 최대한 가늘게 뜨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비웃으신 건가요? 조언해주신 대로 했는데. 너무하시네요.”
“미안. 그러려던 건 아닌데.”
나비에는 손목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러면서 됐다는 양 눈을 감은 채 입가를 가볍게 당겼다.
“괜찮아요. 예쁘고, 못났고는 다 주관적이고 사람 취향은 다양하니까요.”
그녀의 처세술에 내심 감탄했다.
그녀는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몇 가지 경우를 상정했을 것이다.
제 물음에 내 대답을 상상하며 대화를 조립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호감을 살지,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지 계획했을 것이다.
그게 완전히 틀어졌는데도 스스로를 그럭저럭 괜찮은 인간으로 포장했다.
“그래서 시간 괜찮으세요? 10분이면 되는데.”
“여기서 말해도 되는 거라면.”
“커피 좋아하시죠? 가끔 드시는 걸 봤는데. 여기서 5분이면 되는 카페 있어요. 거기서 5분만 떠들어요.”
콧볼이 넓어 보이고자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말하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근처 카페에 들렸다.
“뭐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찬 거로 아무거나.”
너한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는 1도 없다는 걸 어필했다. 대놓고 관계를 망치고 싶다고 외쳤다.
신사도, 기사도가 강한 세계관.
100중 99는 나비에가 산다는 말에 누구나 제가 내겠다고 말할 거다. 커피가 비싼 기호품도 아니었고, 그게 모양새가 좋았으니까.
나는 이를 무시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아무거나를 주문했다.
사주겠다는 사람이 들으면 불쾌할 대답을 순위 매기면 ‘너 돈 없잖아.’ 뒤를 이어 당당히 2등을 차지할 답변.
“아메리카노로 두 잔 할게요. 그거 아세요? 요즘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아아라고 한데요. 재밌지 않아요? 네?”
“재밌네.”
“그럼 갔다 올게요.”
그녀가 내게 서늘한 커피잔을 내밀자마자 말했다.
“10분 된 거 같은데, 이만 가볼게. 커피 고마워.”
이야. 나도 모르게 탄복했다.
나비에는 프로그래밍 된 기계처럼 반응했다.
표정을 구길 법도 한데, 바로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목소리 톤을 낮췄다.
“죄송해요.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뺐었네요. 대화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그랬어요.”
어렵지 않게 나비에를 패퇴시켰다. 만난 직후의 첫인상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 비호감일 수가 없을 정도로 잘 해냈다. 이제 한동안은 얼굴 볼 없겠지.
그런 내 예상을 곧바로 뒤엎으며 나비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잘 부탁할게요.”
이 녀석, 고단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