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비숏은 사교성이 부족했고, 주변의 시선에 무덤덤했다. 그리고 이건 그녀의 약점이 되기에 적당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무리를 이루면 그 안에서 서열이 발생한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이 서열에서 위와 아래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해졌다. 타고난 신분, 다른 학생들과의 사교 관계, 여러 가지가 붙었다.
우둔하게도 비숏은 이를 무시하려 했다. 만인에게 열린 교육을 펼친다는 아카데미의 교육 이념에 기대 머리를 뻣뻣하게 들었다.
그녀의 가문이 몰락했다는 것을 주변 모두가 알았고, 교우 관계가 좁다는 걸 모두가 인지했다.
서열에서 가장 윗줄에 선 나비에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비숏을 처다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녀의 서열은 밑바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저보다 서열이 높은 영애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지 않았고, 수업에서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쳐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고, 눈빛은 오만했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상당수의 영애는 아카데미를 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사교의 장으로 삼았다.
그야 직접 무언가를 배우고 익혀, 성공하는 것보다는 성공할 사람을 배우자로 삼는 게 편한 길이었으니까.
영애들은 무언가를 학습보다도 어디 괜찮은 놈 없나 찾는 게 본업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비숏은 공공의 적이 되기에 딱 적합했다. 남성의 시점으로 본다면, 그녀는 더할 나위가 없을 만큼 매력적인 배우자였다.
비숏은 갖가지 이유로 주변의 미움을 샀다.
누가 등을 떠밀어주기만 해도 움직일 준비를 마친 학생이 여럿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비에는 결단을 내렸다. 비숏이 황태자의 눈에 띄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쫓아내야 했다.
그게 자신이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길이었다.
하기 싫은 일, 평소 제가 혐오하던 짓이었지만 나비에는 마음을 다잡았다.
황태자는 여자를 밝힌다.
사교계에 귀가 달린 귀족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들은 소문이었다.
날마다 여자를 갈아치운다는 염문도 돌았는데, 이러한 질 나쁜 추문과는 달리 의외로 황태자의 여성 편력은 깨끗했다.
그의 눈이 굉장히 높은 까닭이었다.
어지간한 귀족 영애쯤이야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나비에는 외관만 충분하다면 신분과는 무관하게 황태자비가 뽑힐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비숏과 만났다.
정확히는 먼발치에서 힐끗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나비에는 몸을 틀어 다시금 비숏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의심했다.
비숏은 이제껏 제가 본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황태자가 발견한다면 단번에 사랑을 고백할 만큼이나.
이 돌발적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나비에는 딱 한 번만 나서려 했다.
주도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건 제 평판에 해를 가할 게 뻔했다.
그러니 최초로 비숏에게 접근해 악의를 비추는 거로 족했다. 자신이 먼저 행동한다면 나머지 세력들이 그 뒤를 따를 터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예의란 게 있습니다. 왜 그를 외면하는 건가요? 아카데미도 엄연히 제국의 일부인데, 왜 계급을 무시하나요? 왜 저와 눈이 마주치고도 못 본 척하나요? 저로서는 저를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네, 아니었겠죠.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걸까요? 제가 당신이었다면 먼저 사과부터 했을 겁니다. 변명이 아니라요. 저는 당신과 같은 동급생인데, 제가 이런 것까지 가르쳐드려야 할까요?”
“죄송합니다.”
나비에는 웃었다.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 위해 연습했던 그 웃음이 아니라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기 위한 비웃음이었다.
“그게 끝인가요?”
나비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면서 더 짙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거울이 없어도 항상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자세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연구한 덕이었다.
그녀는 얄밉게 웃었다.
“그게 끝인가요?”
비숏은 입을 다물었다.
나비에는 자신에게 교훈을 주거나 교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비를 걸기 위해 떠들고 있었다.
자신이 무어라 대답을 하더라도 나비에는 말꼬리를 붙잡고 갈굼을 이어갈 터였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자.
자존심을 죽이고 상황이 끝나기를 기대하자. 스스로를 타이르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비숏의 대답을 들은 나비에는 눈꼬리를 접었다. 비숏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저는 죄송하다는 말을 듣자고 물은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건, 제 말에 대답하기 싫다는 뜻이겠죠? 무례하네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나비에는 비숏의 말을 끊었다
“변명부터 할 게 아니라, 사과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 않나요? 제 말을 벌써 잊으신 건 아닐 테고….”
쯧.
나비에는 혀를 차고는 말했다.
“또 저를 무시하시는군요. 마음이 아프네요.”
비숏은 갈등했다.
죄송하다고 말해야 할까.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을 피력해야 할까.
아니, 사실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두 대답 다 오답이었다.
뭐라 대답하던 나비에는 그게 아니라 외치며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라파엘이 둘 사이에 끼어든 건 그때였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좀 심하다. 미안해하는 거 같은데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
실로 적절했다.
그가 나비에 러브원을 말리며 그녀에게 그만두라 요청했다.
나비에는 얼굴을 구겼다.
이제야 라파엘이 한사코 자기의 제안을 거부한 이유를 깨달았다.
라파엘이 원하는 바는 비숏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구태여 나비에와 합심하며 계획을 짤 필요는 없었다.
이와 반대로 비숏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나비에의 공격은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자신이 몇몇 영애에게 미움받고 있음을 인지했으나, 거기에 나비에는 없었다. 저를 보는 나비에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런 나비에의 공격에 의아했는데, 그 원인을 찾아냈다.
이 또한 라파엘이 사주한 바일 게 분명했다. 또다시 그가 자신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비숏은 속에서부터 열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왜 나는 당해야만 하는 거지.
억울함에 또다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참았다. 눈물을 흘리는 건, 꼭 무언가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차오르는 울분을 억지로 밑바닥까지 꾹 누른 채 비숏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비숏은 라파엘에게 시선을 던진 채 말했다.
“저와 나비에 님 사이의 일입니다. 굳이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비숏의 눈에서 ‘너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한걸음 내디뎠다.
그녀는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키는 대로 행동하기를 바랐다.
“라파엘 님, 그만하십시오. 이젠, 됐습니다.”
비숏은 라파엘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을 증오합니다. 이 감정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맹세드리지요. 저 비숏 퓨어문은 당신을 평생 증오할 겁니다. 그리고 이 맹세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비에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눈만 깜빡였다.
‘애가 왜 저런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침만 삼켰다. 자기를 도와주고 있는데, 왜?
의문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따랐다. 이렇게 소란스러웠던 상황은 그대로 끝이 났고, 나비에는 제 숙소로 돌아갔다.
* * *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 주변 영애 중 생일이 가까운 이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그들의 기호를 정리해뒀던 수첩을 정독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여러 정보를 암기한 다음에 잠자리에 들었다.
나비에 러브원은 보통의 영애보다 이른 시간에 깨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남들보다 2시간은 족히 일찍 일어나 골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털을 감고, 말렸다.
그 후에는 머리치장을 받음과 동시에 손톱과 발톱을 다듬었고, 피부에 분칠을 더했다.
유아기 시절에 남녀노소 누구나 으레 가지고 노는 옷 갈아입히기 인형처럼 멀뚱히 앉아 갖가지 시중을 받고 있으면 종종 다 부숴버리고만 싶다는 감상이 들었다.
제 얼굴을 비추는 큼지막한 거울을 바닥에 던져 깨버리고 싶었고, 화장품은 분질러버리고만 싶었다.
가끔은 그런 분노가 제 머리카락과 피부에도 미쳤다. 머리카락을 대충 잡아 가위로 자르고, 칼로 피부를 그어버리고 싶었다.
물론, 나비에는 제 감정이 순간적인 충동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곧바로 후회할 거란 걸 알았다.
그냥 불만이란 의미였다.
지금 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막 씻어 아직은 물기가 남아 있는 채로 거울을 마주 보았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
누구라도 감탄할 만큼 충분히 예뻤다.
그런데, 뭘 위해서 더, 더, 더 가꿔야 하는가?
쓸데없이 길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은 거추장스럽기만 했고, 극단적인 식단으로 만들어낸 마른 몸뚱이는 이따금 관절이 삐거덕거리는 것만 같았다.
과일에 달린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단 장신구와 화려한 옷감이 피부에 스칠 데만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간지러웠다.
그럼에도 나비에는 스스로가 언제나 어디에서나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그게 제 전부였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재능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나,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거라곤 정략결혼을 따르거나, 혹은 그보다 대단한 신랑을 물어오는 것뿐이었다.
그게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가치였다.
나비에는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매일 같이 한탄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망상일 뿐이었다.
이미 자신은 무능 그 자체임이 확실한 데다, 그를 티 내지 않은 채 무사히 결혼을 완수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그녀의 목표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가문에서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 황태자로부터 혼약을 약속받으라 무언의 압박을 가했고, 멋대로 기대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하게 태어났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실수했다.
식기의 사용순서를 반대로 하기도 했고, 또래 영애들의 말에 공감해주지 못하기도 했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옷차림을 하거나 장신구를 달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하인들을 가깝게 대했고, 그들의 과실을 용서하기도 했다.
그런 과오를 범할 때마다 어머니가 말했던 자신은 아무짝이 쓸모없다는 조언이 정확히 들어맞았음을 상기했다.
나비에는 욕구를 버릴 것을 요구받았다.
부유한 후작가의 영애로서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아첨과 선물을 받았는데, 이따금 유달리 마음에 드는 물건들이 있었다. 나비에의 취향에 딱 맞았던 보석이나 인형이 그 대상이었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버렸다. 어머니는 그게 제 약점이 될 거라 말했다.
나비에는 자신이 무언가를 애착하면, 그게 꼭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언제나 위태롭고 불안하였다.
나비에는 여기에서 꼭 벗어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