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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5화 (15/125)

제15화

“거기서 그렇게 저를 몰아가시면 어떡해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문 채 나비에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비숏을 과할 만치 갈구고 있길래 그만하라고 제지한 걸 가지고 몰아세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비에는 눈을 치켜뜨며 나를 매섭게 노려봤는데, 화가 났다기보다는 삐진 티를 내는 듯했다.

최근 나비에를 자주 만나며 느끼는 건데, 애는 무표정한 날이 없었다. 항상 얼굴로 어느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조울증이야 뭐야?

내가 무표정하게 자기를 보고 있자, 또 언제 그랬냐는 양 빙그레 웃었다.

“라파엘 님께서 자기 신분을 망각하셨나 보네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내가 비숏을 편든 건, 공식적으로 내가 나비에를 적대하겠다는 선언이란다.

내 본래에 뜻과는 무관하게 다른 학생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거라 했다.

“그냥 그만 좀 하라는 게, 몰아간 거야?”

나비에는 “당연하죠!” 외치며 머리를 흔들었다.

“양자택일의 상황이었잖아요. 거기서 비숏을 편드셨으니 적어도 다른 학생들은 우리 사이가 나쁘다고 여길 거 아니에요?”

그런 까닭에 우리는 교정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나비에가 우리의 친근한 모습을 보여 사이가 괜찮음을 과시해야 한다고 박박 우긴 탓이었다.

그녀는 입에 넣은 음식물을 꿀꺽 삼킨 다음 말했다.

“라파엘 님이야 남들 시선 신경 안 쓴다고 해도 저는 다르거든요. 저는 이런 거라도 관리해야 해서요. 배려 좀 해주세요.”

“그래, 그래서 밥 같이 먹고 있잖아.”

내 짜증 섞인 목소리에도 나비에는 싱긋거렸다.

“하하, 그거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이건 딴 이야기인데, 생각보다 덤덤하시네요? 비숏, 그 애 엄청 화난 거 같은데. 큰일 아닌가요?”

“큰일 난 거야 맞지.”

내가 한숨을 내쉬자 나비에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한 듯하네요. 당신에게 폐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반쯤 진심이었다.

이제는 깔끔하게 노선을 정하기로 했다. 비숏과 화해하는 건 포기한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목표였다.

내가 빙의하기 전에 라파엘이 해놓은 짓들을 감안하면, 비숏과 화해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룰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이었다.

나는 목숨에 달린 일이랍시고 가시밭길을 선택지에 품었다.

이제는 그걸 버리려 한다.

대신에 남주들을 비숏으로부터 확실하게 떨쳐 낸다.

비숏과 원수지간으로 남겠다고 결심한 이상 생존을 위해서 이것만큼은 반드시 해내야 했다.

제프린과 이안의 경우 어느 정도 처리했다.

남은 건 황태자와 북부대공, 총 둘이었다.

그 둘 중 우선은 황태자부터였다. 황태자라면 비숏을 보는 순간 바로 흑심을 품을 테니까.

카르테아 사비 이니에스피.

카르테아는 아카데미 내에서 유일한 자율학부 소속이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아카데미라 해도 황족쯤 되면 약간의 편의를 봐주기야 했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수업에 불참한 탓에 비숏과의 첫 만남은 뒤로 미뤄졌었다.

둘이 만나는 건 중간고사 이후의 무도회 이벤트.

카르테아는 그곳에서 비숏을 접하고, 그녀와 사이를 가깝게 하려 시도한다.

이걸 어떻게 해야겠네.

딱 그때였다. 나비에는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비숏을 그렇게 좋아하신 건 아닌가 보네요?”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응?”

“당신이 제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내가 너한테? 왜?”

“비숏이 당신에게 악담을 퍼부은 계기를 제가 제공했으니까요.”

“그걸 네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

나비에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번 건 웃는 얼굴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웃겨서 웃는 듯했다.

“사람 일이란 게 꼭 논리대로 흐르는 건 아니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래.”

나비에는 머리를 앞쪽으로 쭉 빼더니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쉬워하는 거 같지는 않네요? 왜일까요? 비숏이랑 잘 되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내가? 그래 보여?”

“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비숏이랑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도,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했다.

어쩔 수 없으니 노선을 변경한 거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란 뜻.

“잘못 본 거야. 지금 제대로 절망하고 있으니까.”

나비에는 두 눈을 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의도적으로 웃음소리를 키웠다.

꼭 나와 관계가 원만하다는 걸 주변에 보여주는 듯했다.

어우.

애를 눈앞에 두고 있자니 나까지도 타인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게 됐다.

여러모로 불편한 캐릭터. 밥을 같이 먹을 상대로는 여러모로 부적합했다.

나는 대충 식사를 끝마치려 음식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비숏 님한테 뭐 숨겨진 재산이라도 있나 봐요? 그게 아니면 알고 보니 황실과 핏줄이 연관되었던가.”

느닷없는 헛소리에 피식거리니 나비에가 말을 이었다.

“저는 사람들 눈에 욕망이 보여요. 막 거창한 건 아니니까 이상하게 듣지는 마시고요. 사실, 다들 그렇잖아요? 누가 뭘 원하는지. 이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눈치껏 다 알잖아요?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요.”

나비에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팍을 톡톡 두들겼다.

“저는 그냥, 그 부분에서만큼은 남들보다 조금은 더 자신이 있어요.”

“근데? 그게 비숏이 황실이랑 핏줄이 이어진 게 뭔 상관인데?”

“당신이 비숏한테 집착하는 게 그거 때문인가 싶어서요.”

아니, 얘 보통 애가 아닌데?

라파엘의 그런 설정은 누나의 소설에서도 한참 뒤에나 풀린다.

나는 동요를 감추고 시치미를 떼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걔 예쁘잖아. 당연히 그거 때문이지.”

내 말에 나비에는 다시금 웃었다.

성인이 어린아이를 돌볼 때나 지을듯한 미소였다.

“네, 비숏의 미모야 경국지색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지요.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는 무관심해요.”

자기가 뭐길래, 남의 감정을 단정 짓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당신이 그녀를 볼 때, 눈에 소유욕이 조금도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얼추 식기 위에 음식물을 다 먹은 채였다.

나비에는 입가를 손수건으로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요. 다음에도 부탁드릴게요. 편히 쉬세요.”

* * *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했는데, 그건 아카데미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자는 거까지야 입학할 때 냈던 돈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지만 그 외에 나머지.

교재와 수업에 사용할 여러 준비물.

귀족들의 사교에 장이기도 하니 여러 모임에 낄 때마다 돈이 나갔다. 학생마다 그 편차가 크다고 하지만, 한 푼도 안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밥은 먹고 살고 있을까?”

원작에서 비숏이 일했던 레스토랑을 슬쩍 훑어보니 생판 모르는 학부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 흙뿌리망초를 일찍 알아차린 덕에 일을 안 한 듯했는데, 자연스레 의문이 들었다.

뭔 돈으로 생활하는 거야?

나는 비숏이 퓨어문 가문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거 괜찮나? 굶어 죽는 거 아니야?

뭔 돈으로 생활하고 있을지 궁금해 찾아본 결과, 나름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원작에서 여러 일에 휘말렸던 것과는 달리 오로지 연금술에만 몰두한 덕에 오히려 연금술 실력은 그때보다 더 뛰어났다.

그녀는 연금술에 필요한 촉매나 재료 따위를 가공하고나 변형해 판매했다.

굶어 죽지는 않겠네. 그거면 된 거지.

꼭 귀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풍족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내심 조금 미안하기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었다. 가능하다면 어떻게 보상을 해주고 싶었으나 움직이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내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니 섣불리 움직였다가 괜히 일을 꼬을 수도 있었다. 그런 건 사양이다.

게다가 비숏도 내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의 접점, 만남 따위를 불쾌한 경험으로 일축하며 모든 걸 아니꼽게 볼 터였다. 여러모로 나서기에는 어려운 상황.

해서 나는 길버트를 만나 내게 유리한 쪽으로 일을 왜곡해서 설명했다.

“비숏, 그 친구 아시죠?”

“물론이지. 연금술 엄청 좋아하는 애야. 잘하기도 하고. 수업 때 맨날 앞자리 앉는 애.”

“그 친구도 사실 포션 부작용을 연구하다가 실마리를 붙잡았는데, 제게 선수를 뺏겼더군요. 이게 미안해서 그러는데, 그 친구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응? 어떻게?”

마법학부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연금술학부 또한 배워가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

연금술 재료만 하더라도 지금의 비숏으로는 충당하기 버거웠다. 어느 정도야 아카데미에서 지원을 해주었지만, 연금술에 매진하는 비숏에게는 새 발의 피.

“책이랑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비만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비용은 내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몇 푼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걸 길버트 돈으로 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러자 길버트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알겠다. 너 걔 좋아하지?”

“아, 네. 그런 거로 합시다.”

내 대답에 길버트는 큭큭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럴게.”

내 개인 계좌를 길버트에게 알려주고, 며칠이 지났다.

통장에는 제법 큰 돈이 들어왔다. 아니, 제법이라 하기엔 막대한 돈이었다. 내가 소유한 영지에서 걷는 세금과 비교할 법했다.

“와, 이렇게 많아? 평생 놀고 먹을 수 있겠는데.”

그야 원작에서도 흙뿌리망초 하나로 비숏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며 연금술에만 에너지를 쏟아부을 원동력이 됐으니까 어느 정도 돈이 될 건 알았다.

그러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거지.

비숏의 경우 자기 혼자 일을 진행했는데, 나는 전문가인 길버트의 손에 맡긴 차이도 있을 것이다.

길버트에게 공유한 탈모약의 정보까지 퍼진다면 영지의 수입조차 뛰어넘을 듯했다.

나는 부자였다.

게다가 이건 내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꽁돈에 가까웠으니 영지의 수입보다 귀중한 돈. 나는 다시금 길버트를 찾아가 그와 상담했다.

“돈으로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마나를 늘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나요?”

“그야 있지. 마탑에서 다 사들여서 매물이 잘 안 나와서 그렇지만. 일시적인 건 좀 싸고, 영구적인 건 무지막지하게 비싸고. 그건 왜?”

“제가 좀 쓰게요.”

“연금술 재료로?”

“아뇨, 제 몸에.”

의문으로 가득 차서 눈동자를 굴리는 길버트를 보니 아차 싶었다.

검술학부 등에서 돈으로 마나를 사는 행위는 이질적이었다.

그게 워낙 가성비가 나쁘기도 했고, 천재들의 경우야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길버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 부탁이면 무조건 들어줘야지. 일단 알아보고 연락 줄게. 며칠만 기다려.”

길버트는 내게 왜 그런 게 필요한지 따위의 물음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뭔 짓을 해도, 다 이유가 있겠지 생각할 듯해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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