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한편, 나는 비숏하고의 접점이 떨어진 이안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의 내기는 객관적으로, 나의 승리임이 명백했는데도 이안은 떼를 써서 정보를 받아 갔다.
양아치가 따로 없네,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마탑주인 그를 옆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순순히 알려줬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이안은 따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내심 그게 미안했나 보다.
“넌 마나를 다룰 때 그걸 과하게 의식해. 설명하자면 컵을 들 때도 ‘난 이제부터 삼두와 이두를 펼치고 전완에 힘을 준 채 검지와 엄지로 컵을 들 거야’ 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거야.”
“뭔 소리야.”
그러니까 짧게 요약하자면 바보짓이었다.
이안은 손바닥에 마나 구체를 만들어내더니 손목이 뻐근할 때 마구 돌리듯 손을 회전시켰다. 마나 구체가 그 동작을 따라 움직였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그냥 몸을 쓰듯이 자연스럽게 하면 돼.”
그는 내게 마나의 사용법과 자잘한 마법 몇 가지를 설명해줬다. 그것도 꽤 지극 정성으로.
굳이 내가 나서서 가르쳐달라고 조르지 않았는데도 그가 자발적으로 나서며 떠들었다. 그는 이걸 내가 가르쳐준 디마겐의 정보에 대한 대가라 했다.
일단 작가 공인 재능만큼은 최고인 마법사가 교육해주는데, 듣는다고 나쁠 건 없어 귀를 열었다. 그의 지도대로 마나를 움직이며 마법사들의 습관 따위를 암기했다.
이 과정에서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다.
평소에는 마나를 전신에 퍼트려 육체의 모든 부분을 미세하게 강화할 때 사용했는데, 이를 팔에 집중하거나 응축시켰다거나 한 번에 터트려 더 큰 힘을 낼 수도 있었다.
제프린의 어마어마하게 빠른 검초들이 아마 이를 바탕으로 해낸 듯했다.
이안은 이걸 ‘증폭’이라 불렀는데, 나도 원작에서 지나가듯이 본 개념이었다. 마나를 순간적으로 터트려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내는 기술. 이거로 마법을 쓰면 ‘증폭’ 칼을 휘두르면 ‘발경’이라 칭했다.
“그래, 이제 좀 낫네.”
이안의 지도대로 마나를 움직이며 그 감각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며 오감을 가둔 채 마나만을 의식했다. 가위에 눌렀을 때 손가락만 까닥거릴 수 있을 때처럼 마나가 미세하게 박동했다.
나는 그것을 느꼈고, 움직였다. 마나가 내 의지대로 흘렀다.
와아, 이게 되네.
나는 어느새 광대뼈를 향해 뛰어오른 양 입가를 느꼈다.
재밌었다.
나는 막연하게 내가 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거라 여겼고, 마나에 미숙할 거라 간주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고작해야 라파엘의 몸뚱이를 차지한 게 전부였다.
비유를 해보자면 어느 날 갑자기 꼬리가 자랐는데, 그걸 제대로 쓸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이 꼬리를 가지고 날 때부터 꼬리가 있던 놈들이랑 싸우라고 시킨다. 미친 폭거였다.
나에게 있어서 검술과 마나가 딱 그 짝이었다.
현대에 살던 내가 이곳 원주민들만큼 해내는 건 불가하다고 결론지었다. 그게 당연했다.
‘꼭 그런 건 아니었네.’
카타리나와 이안으로부터 각자의 전문 분야를 배웠다. 나는 평범했어도 스승들이 비범했다.
엑스트라 캐릭터라고 해도 언젠가 한 번쯤은 위기의 상황에서 활약할 만한 기연을 독차지했는데,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 * *
나는 2시간 정도 더 가르침을 받은 후 학부 단련실에 방문했다. 이안으로부터 배운 걸 직접 검을 들고 휘두르며 써보려는 심산이었다.
단련실에는 얼추 10명 정도의 학부생들이 각자 웨이트를 하거나 검술은 연마했고, 대련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거리를 둔 채 검을 뽑았다.
수직베기.
대중적인 급소인 머리를 노리는 검초. 마나를 쓰기보다는 평상시처럼 근육에만 의지해서 펼쳤다. 이전까지의 나는 항상 같은 검초를 펼칠 때는 동일한 근육을 사용하려 했는데, 미련한 짓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한 검초라 해도 막상 싸울 때면 발의 위치와 검의 타점 등에 따라서 개입하는 근육의 부위와 비중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맞춰 가는 게 나을 성싶었다.
발경.
마나의 소모가 컸지만, 순간적으로 평소보다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눈대중으로 쟤도 전에 검격에 비해 훨씬 빨랐다. 검이 허공을 가르자 ‘부웅’ 소리가 울렸다.
음.
만족할 만한 성과에 흡족한 표정으로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대단하시네요.”
옆에서 훈련을 하다말고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곱실거리는 노란 머리카락에 작은 키와 그와 대비되는 두꺼운 체격. 보기 드문 근육이었다.
여기 애들은 삼각근이나 광배근은 커도 다들 승모근은 특히 상부 승모근은 작았다.
혼자 목과 어깨 사이가 두툼하니 눈에 띄었다.
누구지?
단련실에 들어오면 항상 훈련하고 있던 놈인지라 눈에는 익었어도 모르는 캐릭터였다. 이건 그가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는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저는 레오 그라스라 합니다. 검술학부 2학년이죠. 만나게 돼 반갑습니다. 아, 말씀은 편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반가워. 라파엘이야.”
“네, 하하… 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입학식 때 멀리서 보고는 놀랍다고 느꼈거든요. 그때 입학생 중에는 제프린이라고 어마어마한 친구가 있었지 않습니까?”
레오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친구가 싸우는 걸 보고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와, 어떻게 저렇게 강하지? 신입생인데?”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레오는 내 웃음에 자신감을 얻었는지보다 거센 어조로 말했다.
“헌데, 라파엘 님께서 손쉽게 이기시는 걸 보고는 참 부럽다 느꼈습니다.”
“검술이?”
“하하, 재능이요. 저도 노력했는데.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힘들게 노력했는데 나는 왜 이럴까 싶었습니다.”
“아쉽겠네.”
“뭐 어쩔 수 있나요. 그래도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죠. 괜히 푸념을 늘어놓아서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한 번만 겨뤄주실 수 있나요?”
주변을 둘러보니 가검을 가지고 대련을 하는 학부생들이 여럿 있었다. 하기야 기본기만을 다지는 것보다는 서로 경쟁하며 승부를 내는 게 의욕도 나고, 재밌을 터였다.
“그럴까?”
“감사합니다. 그러면 잘 부탁합니다.”
레오는 퍼뜩 몸을 일으키며 벽에 놓인 가검을 둘 들고 와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가검은 날이 뭉툭한 게 직접 맞더라도 살이 베이지 않을 뿐, 피멍이 들거나 골절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검을 보며 품평하던 때, 레오가 말했다.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당연하게 이길 거라 생각했다. 그야 레오는 원작에서 지나가는 식으로라도 이름 한 번 등장한 적 없는 엑스트라 중에서도 엑스트라였다.
제프린도 이겼는데, 엑스트라한테 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런 낙관적인 예상을 레오는 초장부터 싹 갈아엎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무릎을 탁쳤다.
170 초반의 자그마한 키와 좁은 골격.
하지만 두꺼운 근육이 그를 감쌌다. 승모근과 전완근처럼 키우기 어려운 지근마저도 잘 단련되어 있었다.
레오가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의 비복근이 수축했고, 지면을 박찼다. 그는 무게 중심이 낮은 걸 이용하며 순간 가속하며 튀어나왔다.
오.
내심 감탄했다.
제프린과 비교하자면 하품을 하면서도 막을 만큼 느릿했지만, 그의 동작은 검술 교본을 기계가 시범을 보이듯이 정확했다.
내가 검을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까지는 딱 레오처럼 검을 휘두르려 했다.
언제나 똑같은 자세로, 동일한 근육을 써서 완벽한 검초를 펼치려 했다.
나는 그의 공격을 가볍게 쳐내면서 탄복했다.
저 검로를 그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까?
난 레오의 달인 같은 검격에 공포를 느꼈다. 그의 검에 녹아든 피땀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검술의 위력은 그와 별개였다. 레오의 육체는 검술만을 위한 톱니바퀴처럼 서로 정밀하게 맞물리며 완벽한 검초를 만들었으나 느렸다. 가벼웠다.
뻔했다.
그는 과녁을 향해 활을 쏘듯 내 급소를 노렸다. 그러니 그의 다음 검초가 어디를 향할지는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었다.
그의 검에서 가까우면서도 단번에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곳.
이번에는 넓적다리 쪽 동맥.
손님을 마중하듯 검을 미리 뻗으며 크게 쳐냈다. 훤히 빈 그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승리를 확정 지었다.
레오는 검을 버렸다. 그의 검이 바닥과 부딪치며 금속음이 튀겼다.
“내가 이겼네.”
“제가 졌습니다.”
레오는 분해하면서도 담담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읽고자 시도했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나를 이기고 싶었다.
마치 나를 재능, 자신을 노력이라 정의 내리고 노력으로 재능을 꺾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길 바란 듯했다.
바보같이.
그러나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패배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나 사이의 격차를 실감했기 때문에 지고서도 금세 평정을 찾았다.
그게 아닌데.
나는 레오가 예정된 결과라고, 아무리 노력해봤자 신체의 스펙이 밀린다면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할 것만 같아서 말했다.
“왜 졌다고 생각해?”
“예?”
“네가 왜 진 거 같아?”
레오는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먼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우리의 대련을 지켜보던 다른 학생들에게 한 번씩 시선을 던지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 다음 그는 지그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아마도 내가 자기를 조롱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제가 라파엘 님보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이럴 거 같았다.
나는 레오를 향해 겨눈 검을 거두며 말했다.
“근데, 왜 그렇게 싸웠어? 이기고 싶었잖아.”
“예?”
“네가 나보다 약한데, 이기고 싶다면 그렇게 싸우면 안 될 일이었지.”
검술을 논한다면 나는 외지인이었다.
라파엘의 몸뚱이를 차지했기 때문에 기초적인 검초 몇 개를 펼칠 줄 아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오의 승부 방식이 잘못되었단 것쯤은 알았다.
“너보다 강한 놈을 이기고 싶으면 정공법이 아니라 뭐라도 했어야지. 내 칼을 무시하고 쑤셔박던 뭐를 하던.”
“예….”
“기분 나쁘면 그냥 걸러 들어. 내 말은 그냥 그렇다고. 센 놈이랑 약한 놈이랑 싸워도 10번에 1번쯤은 약한 놈이 이기는데, 너는 꼭 너보다 강한 사람이랑 싸우면 10번 싸우면 10번 다 질 거처럼 싸워서.”
레오는 떨어진 검을 다시 쥐더니 나를 향해 뻗었다.
“그러면 다시 한번 겨뤄주시겠습니까?”
나는 검을 일곱 번 휘둘러 승리했다. 그 후로 레오는 세 번을 더 대련을 신청했고, 나는 세 번 모두 이겼다.
이걸 져줄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