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레오에게는 1살 많은 형이 있었다.
이름은 라이언.
평민인지라 성은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레오와 함께 검을 휘둘렀고, 함께 꿈을 꾸었다.
천하제일.
이 넓은 제국에서, 수많은 인간 사이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을 목표로 삼아 정진했다.
그런 까닭에 라이언은 레오와 같은 검술학부였는데, 오랜 고민 끝에 상업 계열로 학부를 이전했다. 라이언은 꿈을 포기했다.
꽤 오래전부터.
라이언은 스스로에게 천하제일인이 될 만한 재능과 배경, 노력할 의지가 없다는 걸 깨달은 직후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에서 유망한 기사단의 단장이 되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그건 몇 달이 지나서 유망한 기사단의 단원이 되는 것으로 바꿨다.
다시 몇 달이 지났을 때는 기사만 될 수만 있어도 좋을 거 같다고 감상했다.
그가 검술학부에서 상업 계열로 학부를 이전한 건 딱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의 일이었다.
라이언은 나름대로 머리가 명석한 편이기도 했고, 칼잡이 중에서는 다독한 편이기도 했다.
또 상인이면서도 칼질 좀 한다는 건 나름대로 괜찮은 스펙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학부를 옮기기 괜찮은 여건.
게다가 라이언은 그 무엇보다 검이 싫었다.
검을 써서 밥 벌어먹는 방식에는 크게 3가지가 있었다.
기사가 되거나, 누군가의 선생이 되거나, 용병질을 하거나.
라이언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재능으로는 기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나약했다. 타고나길 작은 체구와 느린 반사신경. 노력만으로 기사가 되는 길에 겹겹이 쌓인 벽을 뚫을 수 있을까 고민했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의지조차 사그라든 지 수년이 지났다.
검술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디 하나 대단한 인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대게 기사 생활을 하다 노화로 은퇴한 이들이 많이들 검술 선생을 선택했다.
인맥도 없고, 기사도 되지 못할 자신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용병이었다.
용병은 하고 싶지 않았다.
기사에 비해 인식이 천했고, 버는 수입이 적었고, 죽을 위험이 많았다. 그런 현실적인 조건들 속에서 검을 놓았다.
레오는 그걸 목격했다.
자기보다 먼저 검을 쥔 형이 검을 놓았다. 자신의 여건은 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대신에 한 가지.
레오의 꿈은 라이언과는 사뭇 달랐다.
인식이 좋은 직업을 갖고 싶거나, 많은 돈을 벌거나, 안전한 삶을 사는 게 아니었다.
천하제일인.
형은 명예와 돈을 위해 천하제일인을 바랐지만, 레오에게 그건 수단이 아니라 꿈이었다.
그 꿈을 오랫동안 지켜왔다.
이 넓은 제국에서 가장 강한 한 명의 전사가 되기를 바랐다. 라이언과 비슷한 조건에서 그런 꿈을 꿨다. 형과 비슷한 체구와 그래도 조금은 나은 반사신경. 그게 전부였다.
천하제일인?
말 같지도 않은 꿈.
유아기 시절이 지나서는 입 밖으로 내뱉기도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목표에 근접하기는커녕, 형이 그랬던 것처럼 기사가 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아니, 이대로 정체한다면 기사조차 되지 못할 게 뻔했다.
레오는 아카데미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목격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황태자.
그는 놀라웠다. 신화가 진실이라는 걸 믿게 했다.
레오는 황가에 용의 피가 흐른다는 걸 불신했었다.
제국뿐만이 아니라 어디 소수 민족과 부족을 가도 그럴듯한 신화 하나쯤은 있었다. 황가도 매한가지라 생각했다.
적당히 신화를 하나 지어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작년에 아카데미 내에서 열렸던 무투회. 당시 검술학부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고 여겼던 3학년은 그곳에서 황태자를 만났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황태자는 모든 경기에서 상대가 휘두르는 검을 붙잡고, 부러뜨려 승리했다.
거기에는 레오 또한 있었다.
레오는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황태자보다 강해지는 건 무리라 생각했다.
그랬다. 선택받은 사람들이 있다.
악마와 계약했다는 북부의 대공이 그러했고, 라파엘에게 패배했지만, 차원이 다른 검술을 보여준 제프린이 그러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들과 경쟁하는 건 불가했다.
레오는 라파엘과의 대련에서 패배한 직후, 형을 따라 학부를 옮겨야 하나 갈등했다.
형과는 다르게 머리가 똑똑한 편은 아닌데, 뭘 하지? 그냥 이대로 시간을 보내 아카데미 졸업장이라도 딸까?
그거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네가 왜 진 거 같아?
라파엘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직후에는 어이가 없었다.
왜 졌냐니, 그야 너보다 약하니까 졌지.
욕이 올라왔지만, 상대의 신분에 참았다.
그러길 잘했다. 라파엘의 질문에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근데, 왜 그렇게 싸웠어? 이기고 싶었잖아.
그러게.
왜 그렇게 싸웠을까. 그렇게 싸우면 진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술로는 안 되니까, 다른 길을 찾아보자. 라파엘에게 패배한 다음에 깨끗하게 마음을 접자.
라파엘은 또 한 번 말했다.
-기분 나쁘면 그냥 걸러 들어. 내 말은 그냥 그렇다고. 센 놈이랑 약한 놈이랑 싸워도 10번에 1번쯤은 약한 놈이 이기는데, 너는 꼭 너보다 강한 사람이랑 싸우면 10번 싸우면 10번 다 질 거처럼 싸워서.
맞는 말이었다.
레오는 본인의 재능이 선택받은 소수와 비교한다면 처참하다는 걸 인정했다. 그럼에도 천재들처럼 싸우려 했다.
정공법을 고집하는 건 천재들만이 해도 될 일이었다. 그들과 똑같이 싸우면 몇 번을 싸우더라도 패배한다.
레오는 꿈을 버렸다. 대신에 새로운 꿈을 꿨다.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에서, 천하제일인과 싸워 이기는 것으로.
* * *
“저 보고 싶었죠?”
오늘은 수업을 들어가기 전에 카타리나로부터 정강이를 한 대 맞고 시작했다.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발끝으로 내 정강이를 깠다.
“악!”
정강이를 문지르며 카타리나를 흘겼다.
아니, 스승이 제자를 보기 싫을 수가 있나? 그러면 제자 삼지 말았어야지.
애초에 카타리나가 아카데미에 교관으로 지원한 건 재능 있는 제자를 하나 거두기 위함이었다.
이곳 아카데미에서 누구보다 내가 보고 싶을 사람한테 물은 건데, 이리 반응하니 내심 섭섭했다.
카타리나는 꽉 쥔 주먹을 내 얼굴을 향해 내밀며 말했다.
“깝죽거리지 마라.”
“네, 그러죠.”
혹시라도 주먹에 얻어맞을까 두려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카타리나로부터 검술을 한 차례 교정받으며 이안으로부터 배운 ‘발경’을 선보였다.
똑같은 검초를 평소와 같이 펼친 다음, 발경을 이용해 다시 한번 펼쳐 보았다.
그냥 자랑하려고 보여준 건 아니었고, 카티리나는 이를 어찌 평가할까 궁금했다. 그녀는 피식 코웃음을 치더니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야, 이런 거는 어디서 배운 거냐? 나 말고 딴 검술 선생이라도 구한 거야? 걔가 나보다 낫디?”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마법학부에 있는 친구한테 배웠습니다. 걔가 이런 거 잘하거든요. 어떤 거 같습니까?”
“일단 배우기야 잘 배웠네.”
카타리나는 발경에 대해 설명했다.
흔히들 발경을 처음 배울 때 나쁜 버릇이 들기 쉽다고 했다. 예를 들어 기술을 쓰기 전에 몸이 움츠러들거나 전조 증상을 노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건 제법 실력 있는 기사들도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배우기는 잘 배웠어. 근데 너무 의존하지는 마. 비효율적인 기술이니까.”
카타리나는 발경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순간적으로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낼 수야 있지만, 체력과 마나의 소모가 지나치게 컸다. 내내 발경을 사용해가며 싸우다가는 1분도 지나기 전에 몸이 지칠 터였다.
“그러니까 잘 써야지.”
절대로 넘기지 못할 위기 상황.
확실하게 승기를 가져올 수 있는 분기점.
반드시 명중시킬 자신이 있을 때 쓸 마무리.
“나는 그렇게만 쓰고 있어. 이런 상황들 제외하면 다 낭비거든.”
카타리나의 조언을 암기했다. 나에게 적용해서 써먹기 위해, 언젠가 카티라나랑 싸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위해.
“괜찮은 거 같네요.”
“괜찮은 거 같은 게 아니라, 정답이야.”
“알겠습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색하고, 꺼림칙한 감각에 그녀에게 인상을 쓰니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쳤다.
그녀가 말했다.
“잘했어. 사실 내가 칼 휘두르는 건 잘 가르쳐도, 마나의 움직임 같은 건 본능적으로 하는 거라 뭐라 설명할지 몰라서 미루고 있었는데, 잘 배워왔네.”
“아, 네.”
“네 머리를 고려하면, 정말 똑똑한 애한테 배운 거 같은데, 누구한테 배운 건지 캐묻지는 않을게. 걔한테 잘해.”
“아, 네.”
“대답은 길게 하고.”
“알겠습니다.”
나는 카타리나로부터 검초 몇 가지를 더 배우고, 단련장에 가 웨이트를 했다.
몸에 마나가 쌓인 후 근육에 대한 피로가 적어져 분할 수를 낮춘 채로 많은 세트를 가져갔다.
그렇게 온몸을 달달 볶은 후에 기숙사로 복귀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씻고, 옷만 갈아입은 채 바로 침대에 누웠다.
피로감에 눈을 감기만 하면 바로 쓰러지듯이 잠이 들 것만 같았다. 피로를 억지로 참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이안에게 배운 마법과 마나의 운용을 2시간가량 복습했다.
이안은 내게 여러 가지 마법을 가르치려 했다.
표현은 안 하지만 녀석도 내 마법 재능을 눈치 챈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의 길로 걸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 어중간한 마법 여러 가지를 익힐 바에야 아주 유용한 몇 가지의 마법을 익히면서 검술에 집중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쉴드였다.
나는 겁쟁이기 때문에 이안으로부터 쉴드를 제일 먼저 배웠다.
속성 변환도 필요 없이 마나만을 조작하는 마법인 탓에 상대적으로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특히 여타 마법들이 마법 자체의 숙련도가 중요한 데 비해 쉴드는 마나량과 마력만 충분하다면 간한 쉴드를 펼칠 수 있었다.
“하아….”
쉴드를 펼치는 데 17번 시도했고, 17번 실패한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
마법을 익히는 건 검술보다도 상대적으로 피로도가 높았다.
몸이 버틴다고 해도 곧바로 집중력이 흩어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과 정신 모두 한계치까지 체력을 뽑아 써먹었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피로는 회복된다.
매일매일 최대한으로 쥐어짜는 건 필수였다. 오늘도 하기로 했던 일을 모두 끝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나는 눕자마자 잠들었다.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 * *
아침에 눈을 뜬 후, 수업을 받으러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
늘 비어있던 편지함에 갈색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를 꺼내며 편지를 확인했다.
편지의 발신인은 코로망이었다. 그걸 보고나니 괜히 열기 전부터 겁이 들었다.
뭔데? 무슨 일이 생긴 건데?
나는 편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