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 라파엘 님께
아카데미 검술학부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를 감축드리며 가문 내의 몇 가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남깁니다.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무지막지하게 잘나고, 대단하고, 훌륭하다며 얼굴에 금칠을 한참 해주었다.
문장을 읽고 있으니 얼굴에 열이 올라 몇 번이고 편지지를 책상 위에 놓았다.
코로망의 성격을 감안하면 고작 나한테 칭찬이나 해주려 편지를 썼을 리가 없었다.
분명 편지 내용 중에 꼭 알아야만 하는 내용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편지를 다 읽어야만 했다.
하지만 괴로웠다.
내용은 반쯤 내가 아니라 라파엘을 향한 칭찬이었는데도 읽고 있자니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어우. 창피해.
오그라드는 손발을 억지로 필 때쯤에 돼서야 편지는 본론에 들어갔다.
- 라파엘 님께서 아이작 가문의 위신을 세우고, 이름을 떨쳐 가문의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으나 일부, 이를 믿지 않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다니? 뭐를?
내 수석 입학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공지한 정보를 내가 조작하는 건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머리가 달렸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 현실적으로 사고해보면 아마 그 과정 이야기일 거다.
내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수석을 따냈다는 거겠지.
이거는 그게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라파엘의 두 동생.
그 연놈들이었다.
그들은 가주 자리를 빼앗기 위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검술 실력으로 수석을 따낸 게 진실이라면 그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그 둘이 가주 자리를 빼앗으려는 근거 첫 번째는 무가의 장남 치고 라파엘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흔히 무가를 주장하는 가문에서는 강한 자가 가주 자리를 차지했다. 라파엘이 경쟁 없이 가주 자리를 승계한 건 두 동생이 지나치게 어렸던 탓. 2차성징이 시작하기도 전의 어린애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근 몇 년, 라파엘은 검을 손에서 놓았다. 거기에 육체 단련을 게을리했다.
꾸준히 검술을 수련한 남동생과는 다른 행보였다.
이 차이를 깨달은 두 동생은 정당하게 결투를 통해서 가주 자리를 가져오려 계획을 짰다.
그런데, 라파엘이 검술 학부에서 수석을 차지하다니?
동생들은 제프린의 존재를 인지했다.
제프린이 이번 아카데미에 들어오려 입학시험을 치렀단 걸 알았다.
그들이 다소 제프린의 재능을 과소평가하기는 했으나 제프린이 천재라는 것만큼은 인정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이겼다니 의심할 법도 했다.
그게 진실이라면 자신들이 궁리한 반역의 방법은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다. 그들로서는 이를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겠지.
- 그러한 까닭에 학기가 끝나는 방학 중 한 차례 가문 내로 돌아와 다시금 라파엘 님의 역량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라파엘 님께서 장대한 발전과 건강 모두 챙기시길 바라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코로망의 편지가 아니더라도 방학 때에 한 번쯤은 가문을 방문하려 했다.
이제 어느 정도 힘도 생겼겠다 반역을 꿈꾸는 동생 둘이 암만 만만하더라도 불순분자는 미리미리 제압해야 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이번 방학 때 해놓아야지 다짐하며 편지에 답장을 썼다.
-편지 고마워. 네 말대로 할게. 방학 때 한 번 내려가도록 하지. 그때 보자.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막혔다.
나도 코로망처럼 축하한다는 한 단어 가지고 몇 줄씩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내게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코로망이 보낸 편지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길이의 편지를 보내자니 너무 성의가 없는 듯했다.
글의 길이가 글에 담긴 무게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지만, 어쨌든 좀 그랬다.
물론 내가 고용주고, 신분이 깡패니 코로망이 불평을 쏟기는커녕 불쾌감조차 느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 가문의 주인쯤 되는 자리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냥, 그냥 좀 그렇다는 거지.
코로망과는 오래오래 잘 지내야 하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신경 써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해서 괜히 내 설정상으로 있을 뿐인 동생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편지지에 내용을 채우려 노력했다.
-이블린은 교육 잘 받고 있어? 제리코는 몸 튼튼하고?
그런 말들을 괜히 덧붙이면서 편지지를 채웠다.
“이런 건, 역시 전화가 편한데 말이야.”
글이란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면 좀 대충 말해도 다들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했다.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의사소통에 도움을 줬으니까.
* * *
코로망은 라파엘의 답장을 읽으며 입술이 말라감을 느꼈다.
엄지로 입술을 만져보니 봄인데도 한겨울인양 갈라졌다. 침을 삼키는데, 목구멍이 따가웠다.
이건 공포였다.
“대체 어떻게?”
라파엘은 제가 느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말로야 자신을 향한 칭찬 따위를 고맙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 어떤 수사적인 표현 없이 직설적으로 사실만을 고했다.
그는 날카로운 문장으로 제게 경고했다. 헛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거기에 이제는 제 두 동생이 반역을 꿈꿨다는 사실을 처벌한다는 의지까지 내비쳤다.
이블린이 수업을 잘 받고 있는지, 제리코가 몸이 튼튼한지 따위를 물은 게 그 증거였다.
그 둘이 가주 자리를 빼앗은 후 합의한 내용을 가리킬 땐 편지를 놓칠 뻔했다.
본래 이블린과 제리코는 라파엘로부터 영지를 빼앗자고 내통할 때 그리 말을 맞췄다.
가주의 자리는 제리코가, 실권은 이블린이 잡기로.
제리코에게는 수년 내로 라파엘을 압도할 검술 재능이 있었고, 이블린은 우월한 머리와 싹싹한 태도로 가신들의 신임을 받았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라파엘을 쫓아낼 수 있었다. 이건 코로망도 동의한 바였다.
그녀가 두 남매를 말리고, 거사를 뒤로 미룬 건 만에 하나 때문. 혹시라도 라파엘이 제정신을 차릴지도 모르니까.
제리코가 라파엘에게 패배해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연유였다.
“일이 틀어졌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코로망은 머리를 흔들었다.
우선 라파엘이 제 동생들이 반역을 꿈꾼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까지야 그럴 수도 있었다.
제 입지가 탄탄하지 못하다는 건 바보라도 알 법했다.
제리코와 이블린의 입장에선 순순히 가주 자리를 포기하는 게 이상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제법 정확하게 집어냈다.
우선은 남매 중 어느 한쪽이 아니라 둘 모두가 배반을 모의한다는 것과 코로망 또한 그에 반쯤 가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제리코와 이블린의 합의사항까지 알아냈다는 점이었다.
이걸 아는 사람은 가문에서도 한 손으로 셀 수 있었다.
이건 감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문 내에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가신들을 심어뒀음을 뜻했다. 그것도 코로망이 모르게.
‘누구지? 대체 누구인 거야?’
코로망은 순식간에 몇몇 가신들을 떠올렸으나 곧바로 명단을 지웠다. 그들 중 누구도 라파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지금 제가 가진 정보로 정답을 찾기란 불가능.
대신에 코로망은 그 방법이라도 알아내려 시도했다.
라파엘은 어떻게 자기 사람을 만들었을까? 어떻게 마음을 얻었을까?
‘이것도 모르겠어.’
라파엘이 어떻게 그 모든 걸 해냈는지 미지수였다.
코로망은 어쩌면 라파엘이 제 계산보다 훨씬 빨리 반역을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고 간주했다.
라파엘의 반응을 보면 그럴듯한 추리였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아카데미로 떠나는 걸 서두른 거지?’
이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알았다면 더더욱 가문에 남아서 제 입지를 다져야 할 거 아닌가?
왜?
라파엘은 멍청이가 아니다. 오히려 여우처럼 약았다.
“아!”
편지의 끝부분.
이블린과 제리코에 대한 안부. 이를 다시금 읽으니 알 것 같았다.
라파엘은 제 동생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일부러 아카데미로 떠나 빈틈을 보였다. 동생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했다. 확실한 물증을 잡아 그들을 죽이려고.
라파엘은 아카데미가 방학에 들어가면 잠시 영지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가문에서 반역을 꿈꾸고 있는데, 방학까지 기다린다?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렇다면 라파엘이 등신이라 그러는 걸까?
아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이었다면 그가 등신이라 멍청한 짓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그게 아니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코로망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제가 가문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알아서 처리하라고.
“코로망, 무슨 일이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우리를 다 부르고.”
이블린은 쩌억 하품을 하는 제리코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코로망 앞에서 체통을 지키라는 의미였는데, 제리코는 통증에 얼굴을 구겼다.
“졸린데, 별거 아니면 그냥 내일 하자.”
“멍청아, 별거 아닌 일로 이 시간에 호출했을 리가 없잖아.”
코로망은 둘에게 라파엘로부터 온 편지를 보여주었다.
“잠시 영지를 떠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왜?”
“라파엘 님이 두 분의 꿍꿍이를 알아차린 듯합니다.”
“흥, 그래서? 그놈이 뭘 할 수 있는데?”
이블린이 제리코의 팔꿈치로 등을 툭툭 쳤다.
“멍청아, 편지를 보면 몰라? 네가 싸워서 못 이긴다는 거잖아.”
“에이, 내가 형을? 형 칼을 놓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어. 어릴 때도 아니고. 형이 수석을 딴 건 안 봐도 뻔하지. 돈 주고 매수한 거잖아. 넌 네 입으로 자기가 똑똑하다고 하면서 이거를 몰라?’
“아니면?”
이블린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제리코에게 되물었다.
“만약에 라파엘이 자기의 숨겨진 재능이라도 알아차린 거면? 그게 아니면 뭐 적당히 대단한 영약이라도 주워 먹었으면? 그래서 정말로 강해진 거면 어떡할 건데?”
“그러면…. 어….”
이블린은 검지로 제리코를 쿡 찔렀다.
“그러면 너 죽어.”
“에이…. 설마….”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코로망이 말했다.
“두 분 다 잠시 영지를 떠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카데미가 방학에 들어간 이후, 라파엘 님이 돌아왔을 때는 제가 한 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블린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잠시 왕국으로 가 있을게. 거기서 공부할 게 있었으니 마침 시기가 괜찮네.”
“난 싫어.”
제리코는 타지살이의 불편함을 상상하더니 질색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석? 그거 나도 할 수 있어.”
“제프린, 그 녀석을 이길 수 있다고?”
“걔는 매수한 거겠지. 안면도 있는 사이잖아. 둘이 사이가 나빴다고 해도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 나도 걔만 매수하면 그 밑에 애들은 다 이겨.”
제리코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블린, 너는 검술을 안 배워서 몰라. 무슨 일이 있어도 갑작스레 일취월장하는 건 불가능이야. 그건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그래서? 라파엘이 오면 싸우기라도 하게?”
“어. 나는 싸울 거야.”
이블린은 후우 한숨을 쉬더니 대답했다.
“그래, 잘해봐. 이기면 편지하고. 다음에 보자.”
이블린은 제리코를 설득하길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