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디마겐을 잡기 위해선 필수적인 요소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북부대공의 협력을 구하는 것. 그의 도움 없이 디마겐을 잡기는 턱없이 어려웠다.
북부대공, 아가레스 잉그레드.
그는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이자 악마와의 계약으로 불사의 힘을 얻은 괴물이었다.
그는 제 영지와 영지민들을 끔찍하게 아꼈고, 영지 내에서의 범죄와 같은 행위라면 엄하게 다스렸다.
원래대로라면 아가레스는 이안과 협력하여 제 영지에서 비숏을 납치한 디마겐을 무찌르고, 그녀와 엮이게 될 운명이었지만,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나는 사회성이 부족한 이안을 대신해 아가레스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찾는 내내 심장이 떨렸다. 으레 남주라면 반드시 정신병 하나를 앓는데, 아가레스는 그게 가장 심했다.
전형적인 타입의 북부대공.
까칠하고, 자기 사람 외에는 냉대하고 걸핏하면 피를 보는 그런 캐릭터.
아가레스는 그런 놈이었다.
글의 분위기가 가볍다 보니 막상 그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적었지만, 어찌 됐건 피도 눈물도 없다는 설정의 캐릭터.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다.
“하아….”
속으로 불평불만으로 마음을 꽉 채운 채 신성학부 건물 앞에 서 아가레스를 기다렸다.
아가레스는 재미있게도 악마의 힘을 다루면서도 신성학부에 재학했다. 그의 몸에 반쯤 녹아든 악마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며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아가레스는 약 10분 정도가 지나서 제 얼굴을 비췄다.
북부의 대공답게 냉혹한 인상을 별개로 치더라도 독특했다. 이 날씨에 모피 망토라니?
아. 그래.
추운 북부에서는 외출할 때에 필수품이자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새하얀 모피는 그의 상징이기도 했다.
북부의 혹한에서 벗어나고도 모피 망토를 고집하는 건 그런 까닭.
내가 말을 걸러 가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냐.”
아가레스가 다스리는 잉그리드 영지는 아이작 가문과 비교해도 땅덩어리가 훨씬 넓을뿐더러 그는 나보다 신분이 높았고, 강했다. 나는 말을 높였다.
“잉그리드 영지와 관련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지금?”
“예, 그렇습니다.”
“자리를 옮기지.
아가레스는 근처의 빈 건물 쪽으로 앞장서 걸었다. 그는 커다란 키만큼이나 보폭이 넓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큼지막했다.
나는 아가레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에게 붙은 불사의 괴물이란 설정이 파워밸런스를 망가트렸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신경 써야 할 거리가 많아 누나가 의도적으로 분량을 줄였다. 그 탓에 그의 성격 묘사는 모호했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밉보일 수 있었다.
일단,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그가 자신의 인간을 끔찍이 아끼고, 또 그만큼이나 자기 울타리 밖의 모든 일에 차갑다는 것 정도였다.
“보아하니 귀족이로군. 영지도 있는 듯하고. 너도 그렇겠다만, 영지를 다스리다 보면 온갖 감언이설과 거짓부렁을 듣게 된단 말이야.”
아가레스의 동공이 움직여 나를 향했다. 긴장감이 솟았다.
어우, 싸늘해.
“자네가 해주는 말을 다 곧이곧대로 듣고, 믿지는 못하네. 이거는 이해하겠지?”
“예, 물론입니다.”
“알았으면 됐어. 이제 맘껏 떠들어봐. 입은 조심하면서.”
나는 품에서 준비해온 북부의 지도를 꺼냈다.
혹시나 너무 상세한 걸 가져오면 불쾌하게 여길 성싶어 흔히 구할 수 있는 물건 중에 북부의 영토가 마족의 숲을 절반으로 가른 것을 가져왔다.
이건 지난번 마족과의 교류에서 아가레스 측의 입김이 더 들어간 물건이었다.
이게 좋게 작용한 건지 아가레스는 티를 안 내도 기분이 썩 괜찮아 보였다.
제국의 북부. 봄과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땅.
척박한 환경 탓에 토지의 크기에 비해 인구가 적었고, 범죄자들이 도시로부터 도망쳐 그곳에 숨어드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북부에 대한 차별, 지역감정 같은 게 있었다.
“흑마법사 하나가 이곳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놈에게 은원이 있어 잡고자 합니다. 여기에 아가레스 님께서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흑마법사가 성장하는 방법은 한정적이었고, 그들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100이면 100 다 범죄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레스의 반응이 미적지근한 건 본인부터가 악마의 계약자인 탓이겠지.
“그는 북부로 도망치기 전에 여러 곳에서 인간을 제물로 바쳐 흑마법을 익혔고, 인체 실험 따위를 즐겼으며….”
아가레스가 내 말을 잘랐다.
“그거 유감이군. 내 마음이 다 안타까워. 자, 공감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그럼 이제 내가 왜 협조해줘야 하는지 말해봐.”
“그놈이라면 반드시 아가레스 님의 영지에서도 사람들을 헤칠 겁니다. 그걸 사전에 막으시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아가레스는 턱을 부여잡더니 무언가를 골몰하듯 답을 질질 끌었다. 그는 ‘흐음….’ 하고 탄식하더니 말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 건 내 땅으로 도망치기 이전의 일이지?”
“그렇습니다.”
“내 영지민의 비율 중 외부에서 유입된 범죄자가 적지 않아. 그들의 후손과 가족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이 더 커지고. 그들 모두를 잡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지.”
아?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누가 망치로 머리를 깨부순 듯 뇌가 멈췄다.
“그들의 범죄를 용서한다는 게 아니야. 그들이 내 영지에 들어온 이후에도, 밖에서 그러했듯 몹쓸 짓을 한다면 당연히 잡아 들어야지. 물론 그렇고말고.”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영지민들이 죽을 겁니다.”
아가레스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꼭 미래라도 보는 것처럼 떠드는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게 말입니다….”
원작에서 봤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에 설움을 삼켰다.
아가레스는 내가 가만히 있자 주머니에서 황금빛 펜을 꺼내 내가 가져온 지도에 단대호를 그리며 북부와 마족의 대치 상황을 설명했다.
북부는 마족과 영토를 접해 있었다.
마물이 영토를 비집고 들어와 사고를 치거나 이따금 마족들과의 교전이 발생하는 일은 사소했다.
따라서 많은 병사가 추위 속에서 삼엄하게 경계를 섰고, 그들은 종종 죽었다.
병사들은 추위에 얼어 죽었고, 예상치 못한 기상 악화에 휘말려 죽었고, 마족들의 장난질 혹은 은밀한 기습에 죽었다. 죽고, 죽고 죽었다.
아가레스는 그들의 생명이 아까웠다고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인명 피해를 줄이기를 바랐다,
그런 목표를 이루고자 그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는데, 사람을 쓰지 않고 경계를 스는 것과 소수 정예의 전투원으로 사상자 없이 마족과 마물을 제압하는 게 대표적이었다.
사람이 없어도 작동하는 무인 경계.
아가레스는 그 방법으로 흑마법사들이 부리는 사역마를 떠올렸다.
박쥐처럼 사람보다 감각이 몇 배로 발달한 생명체를 사역마를 부린다면 굳이 추위 속에서 병사들이 고생할 필요가 사라졌다.
그건 꼭 박쥐가 아니라도 좋았다. 다양한 종류의 사역마를 부리며 하나씩 실험하고, 효율을 평가한 다음에 대량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있었다.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여럿 있어야 한다. 그리고 네 말대로면 그 흑마법사의 실력이 제법인 듯해.”
아가레스는 본인이 시간이 날 때 디마겐을 찾아가 개인적으로 만나 볼 거라 말했다.
내가 그 위험성을 주장하자 그는 실실 웃으며 흑마법사는 제 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래, 그야 그렇겠지.
나는 쓴맛이 감도는 혓바닥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아가레스를 설득하는 건 어려울 듯했다.
“그놈한테 가까운 사람이 당했나? 정말 유감이군.”
그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 손짓이 꼭 가구가 튼튼한지 두드리는 듯 무심해 오히려 약이 올랐다.
“네게 디마겐을 용서하라 말하지는 않으마. 그거야 나라고 해도 주제넘은 짓이니까.”
아가레스는 지도 위에 놓아둔 제 황금색 펜을 다시 호주머니로 넣었다. 그는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말이야, 그놈을 잡는데 협조해줄 수 없어.”
“알겠습니다.”
도와주지는 않을 건데, 내가 알아서 디마겐을 잡는 건 막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만족하자.
무슨 논리를 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아가레스를 설득하기란 불가했다.
그래, 남주인데 이 정도 정신병은 있어야지. 정신병 보유자가 아니길 바란 내가 잘못이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설득할 방법을 여러 구비한 다음에.
* * *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자기 영지에 범죄자가 들었는데, 안 잡을 거래.”
“그래?”
“말도 안 되는 짓이잖아. 그놈이 완전 정신병자잖아.”
“그렇구나.”
“…….”
뒷담이라도 까면서 답답한 속을 풀려 했지만, 이안은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게 꼭 자판기 같았다. 내가 투덜거리면 그래, 그렇구나, 정해진 답을 뱉었다.
네 원수 잡는 거 안 도와준다는데, 그런 반응이 나와?
아니, 저 싸이코패스가 맞장구라도 쳐준 거니 대단하다 해야 하나.
아가레스의 사고방식은 독특했다.
“하필이면 걸려도 어케 이런 놈한테 걸리냐. 어우….”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디마겐을 죽일 수 있지?”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아가레스를 설득하거나, 아가레스의 도움 없이 디마겐을 잡아야지.”
아가레스만 있다면 디마겐을 잡는 건 아주 수월했다.
흑마법사는 악마로부터 힘을 빌려 썼는데, 그에 반해 아가레스는 직접 악마와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해 힘을 공유했다.
어찌 보면 아가레스는 흑마법사의 상위 격이라 할 수 있었고, 흑마법사를 대상으로 한다면 무한히 강해졌다.
특히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암흑 에너지에 면역에 가까웠다.
흑마법사들은 보통의 마법사들이 마나를 쓰는 것과 달리 암흑 에너지를 다루었다. 암흑 에너지는 생명의 원초적인 힘을 타락시켜 그 위력만을 키운 힘.
그것은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좀먹으며 특히나 생명체에게는 가까이 접근하기만 해도 기력을 빼앗고, 파괴적인 기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런 암흑 에너지도 직접 악마의 힘을 사용하는 아가레스에게는 보통의 마나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육체의 일부가 악마인 아가레스는 어느 흑마법사보다도 암흑 에너지를 잘 다루었으니까.
아가레스만 있다면 던전에 설치된 대부분의 함정과 디마겐의 저주, 흑마법을 모두 파훼할 수 있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디마겐을 잡는 데 방어적인 역할은 전부 아가레스가 수행했다.
그가 없이 일을 처리하려면?
많은 걸 준비해야 해야 하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던전에 득실거리는 함정을 처리할 방법을 강구하고, 던전의 에너지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흑마법을 정면에서 상대해야 한다.
공격과 방어 모두 이안 혼자 해야 하는데, 저주까지 신경 쓰면서 그게 가능할까?
아무래도 어려울 듯했다.
3권쯤 가서는 얘도 한 차례 크게 성장하는데, 그때의 이안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로서는 무리였다.
일단은 아가레스를 설득해보자. 그렇게 목표를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