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20화 (20/125)

제20화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음악을 다룬다면, 악기가 등장한다면 꼭 피아노라 생각했다.

그럴 게 잘 어울리지 않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어쩌면 이게 다 누나 따라 읽은 오만과 편견이 그럭저럭 재밌었던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 됐건 간에 내 취향은 그러했다.

나는 로맨스 판타지에서 악기 중에 인기 1등은 반드시 피아노일 거라 생각했다.

일단 딱 봐도 큼지막한 게 웅장하지 않은가?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누나의 영향으로 몇 개의 작품을 봐도 피아노는 취급이 박했다.

오히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쪽이 강세였고, 피아노는 금관 악기와 경쟁해야 할 수준에 달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누나에게 이를 따져 물어보니, 누나는 그게 다 피아노가 만만해서라 답했다.

만만해?

피아노가?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거, 크기부터가 무지막지하게 크잖아. 가격도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그게 만만하다니?

피아노가 만만하다는 건 접근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릴 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동네에 피아노 학원 안 다녀본 애들이 어디 있겠는가? 너는 손가락 길어서 피아노 잘 치겠다는 말 한마디씩은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바이올린이 우위를 점한 건 그런 까닭이었다. 익히고 배우는 사람의 숫자가 적으니까. 바이올린이 더 있어 보이니까.

당시 체르니를 40까지나 쳤던 나의 누나는 이에 분개하고자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써먹고 싶었으나 여러모로 부족했다. 건반을 두드리는 것까지야 잘해도 막상 글에 쓸만한 지식은 없었다.

해서 누나는 장면에 집중했다. 그냥 멋있는 애가 피아노 치면 그게 멋있는 장면이겠지, 하면서.

“크학.”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니 내 군바리 시절에 비슷했던 일이 있었던 듯했다.

다른 부대도 다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대대 병영 식당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때 정비과 병사 하나가 정비복에 하이바를 쓴 채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대대장이 감탄했었다.

흙 묻은 정비복과 피아노는 퍽 거리가 멀었는데, 거기서 뭐가 아이러니를 느꼈던 듯했다.

그 결과 일과 시간 이후 전 병력을 집합시키며 그 정비과 병사를 칭찬했고, 대대에 달마다 음악 연주회를 열었다. 이건 정훈장교에게 명령으로 떨어져 각중대마다 반드시 2명씩은 연주회를 참가 해야만 했다.

요컨대, 피아노와 연주자 사이에 괴리감이 클수록 그게 보는 이로 하여금 여운을 준다는 걸 뜻했다.

그래서 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피아노의 연주자를 선정했다. 그건 아가레스였고, 그게 아가레스였기 때문에 연주곡은 라흐마니노프의 것이었다.

왜 하필 라흐마니노프일까?

라흐마니노프는 너무 최근이 아닌가?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판타지 배경에 갑자기 현대 문화라니 너무 이상하잖아

로맨스판타지가 다소 시대적 배경을 무시한다고 해도 이건 분명 많은 독자들에게 태클이 들어올 거라 말렸음에도 누나는 라흐마니노프를 강행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사유는 이러했다.

1번.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출생이다.

2번. 라흐마니노프의 키는 약 2m다.

3번.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음악에는 전반적으로 우울한 기색이 있다.

이 3가지 이유가 지극히 북부대공인 아가레스와 어울린다는 주장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확실히 잘 어울렸다.

그래, 누나가 언제 내 말을 들은 적이 있기야 했던가?

“라흐마니노프네요.”

아카데미 신학부에 부속 건물인 자그마한 교회.

실제 예배에 쓰는 게 아니라 예비 신부들이 집회를 연습할 때나 쓰는 건물이었는데, 크기만 작을 뿐이지 보통의 교회와 똑같았다. 찬송가의 반주에 쓸 악기가 그대로 있다는 소리.

나는 아가레스의 연주가 끝날 즈음에 말을 걸었다.

원작에서는 비숏이 이걸 말하자 아가레스는 반색했다.

[신데렐라 랩소디]에서는 편의주의적 설정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어느 협주곡을 작곡하기 직전에 죽었다. 그 탓에 라흐마니노프는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는 설정인데, 비숏이 이를 알고 아는 채 해 아가레스의 호기심을 끌었다는 내용.

“이걸 알고 있나?”

“어, 예.”

“혹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있나?”

어. 음.

아가레스는 뭔가를 기대하는지 벌써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자리를 비켜줬다. 비숏은 피아노 잘 친다는 설정이라 피아노를 잘 쳤다. 라흐마니노프의 다른 곡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며 아가레스와 친목질을 했다.

음.

“피아노를 배운 적은 없습니다.”

“어려운 곡이 아니라도 괜찮아.”

뻗대는 분위기를 보건데, 뭐라도 치지 않으면 넘어가질 않을 분위기였다. 나는 자리에 앉았고, 건반을 눌렀다.

똑. 똑. 똑. 똑.

내가 치는 건 젓가락 행진곡.

아니 어쩌면 젓가락 행진곡이 아닐 수도 있었다.

우선 반주를 버리고 시작했다. 그다음으로는 박자를 무시했다. 왼손과 오른손의 검지만을 이용해 건반을 똥땅똥땅 눌렀다. 그러길 약 40초.

연주를 끝내고, 아가레스의 눈치를 살피니 얼굴이 썩어 있었다.

“왜요?”

괜히 시비를 걸 거 같아 선수를 치고 물으니 아가레스는 답했다.

“나를 놀리나?”

“제가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허. 어이가 없군.”

* * *

내가 원작 남주들과 푸닥거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아카데미는 나름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나서 한 달여가 지난 현재.

교양으로 들어야 할 과목을 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입학하고 나서 한 달이나 있다가 교양 수업을 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간 친해진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아카데미 측의 배려였다.

아무리 아카데미라 해도, 귀족들이 모이는 곳인 만큼, 인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무엇을 들을까 갈등했다. 듣고 싶은 수업이 없었다.

거기다 뭐든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해도, 이왕 시작했으면 중간은 가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꼭 나만은 아닐 거다.

다들 그렇지 않나? 그게 뭐가 됐건 간에 뒤에서부터 등수를 세야 하면 괜히 불편하곤 했다.

아카데미 내에서의 학업.

솔직히 내 알 바가 아니긴 했다. 여기서 학점을 잘 받는다고 해서 내가 졸업한 뒤의 인생에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만 있어도 먹고 살 만한데, 취업을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대충 D만 받아도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꿀을 빨 수 있는 과목을 골라 봤다.

이번 학기에 선택 수업으로 6학점을 더 채워야 하는데, 따로 시간을 내서 노력하지 않아도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은 뭐가 있을까?

어려웠다. 소설 속 세상이라도 이게 현실로 변하면서 나름 밸런스 패치가 있었는지 날로 먹을 만한 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나 빼고.

거대 괴수 수렵 개론.

수업에 사용한다는 교재를 훑어보니, 나오는 거대 괴수들이 다 아는 놈들이었다. 누나는 글을 쓰는 건 좋아해도 설정을 짜는 건 싫어했다.

그 여파인지 나오는 글마다 설정이 비슷하긴 했는데, 그게 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거네. 이거라면 진짜 쉽겠네.”

나는 엄지로 교재의 표지를 훑었다.

거대 괴수 수렵의 이론과 실재.

기다란 제목을 읽은 다음 표지를 넘기니 어마어마한 두께의 종이가 나를 압도했다.

화질이 나빠 흐릿해 보이는 사진, 혹은 몽타주를 듣고 그린 듯한 그림 옆에는 여백 없이 활자가 빼곡했다.

강의에서 시험으로 쓸 내용이 눈에 선했다. 여기서 적당히 괴수 몇 마리 뽑아서 시험 문제로 낼 듯했다.

나라고 해도 누나가 쓴 글에 설정을 모두 아는 건 아니지만, 이거라면 괜찮았다.

그럴 게 여기 나오는 몬스터들 어디서 봤던 놈들이었다.

나와 누나는 거대한 몬스터를 잡는 어느 게임을 했었다.

플레이 타임이 무척 긴 게임이었는데, 대단한 몰입감에 밤낮을 잊고 했었다. 게임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시간을 쓰레기통에 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교재를 펴보니 다 그 게임 속 몬스터들을 모티브로 한 놈들이었다.

혹시라도 모르는 놈은 없는지 한 페이지씩 종이를 넘기다 피식 웃었다.

아르기잔. 이놈을 죽이는 데는 무려 50시간씩이나 걸렸었다.

당시 때려 죽어도 근접 딜러를 한다던 누나도 40시간을 시도하다 실패한 뒤에는 활을 들고 멀리서 도망 다니다가 뿅뿅 화살을 쏴 죽였었다.

그땐 재밌었는데.

아무런 노력 없이 학점을 주울 수 있는 과목은 이게 끝이었다.

나는 이 강의를 신청했고, 며칠이 지나 강의실에 입장했다.

그래도 몬스터를 잡는 학부라 그런지 전투와 관련된 학부생들이 많이 참여했다.

이안은 신청하지 않았지만 3분지 1은 마법학부였고, 나와 같은 검술학부인 레오도 있었다.

딱 한 명 의외였던 건, 신성학부인 아가레스.

혼자 학부와 아무 상관 없는 수업을 들으러 출석했다.

그는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교재를 피고 필기구를 꺼내 수업을 준비했는데, 그게 퍽 어색했다.

쟤가 원래 그런 캐릭터였나? 왜 모범생인 척이야?

머리를 긁적거리며 강의실에 딱 한 명 아는 얼굴인 레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우연히 겹쳤네요.”

“그러게.”

레오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라파엘 님이 이 수업을 들으신다니, 조금 의외입니다. 저야 졸업하고 용병질이나 할 수도 있고, 뭐 변방에 입대할 수도 있어 강의를 신청했는데, 라파엘 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여기서 뭐라 말하던 자랑이나 하는 거 같아 입을 다물고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다.

그렇게 침묵하고 있자 레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럴 신분이 아니시기도 하고, 검술 실력도 변방에서 뛰어야 할 이유가 없으시니까.”

“실력 좋으면 중앙에 남나?”

“예, 보통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 보통 힘이 필요한 건 지방이잖아. 그것도 특히 북쪽.”

“그야 그런데, 위험하죠. 또 생활 환경도 취약하구요. 다 중앙으로 가고, 중앙에 남길 바라니까 실력이 부족하고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지방으로 갑니다.”

“그중에서도 걸러진 사람들이 북으로 가고?”

“예.”

아, 이게 목소리가 컸나?

혹여라도 누가 들을까 봐 나지막이 말했는데, 아가레스가 뒤돌더니 나를 째려봤다.

이야, 귀도 밝네.

난 그에게 실례인 걸 떠들어 미안하다는 의사 표현으로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에 아가레스는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어, 음. 이거 잘못된 거 아닙니까?”

“그게, 그런 거 같기는 한데.”

“제가 듣기로는 북부의 대공은 밥 대신에 사람 고기를 먹고 물 대신에 사람의 피를 마신다고 합니다.”

레오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자다가 귀를 지나가는 모기의 앵앵거림 수준이었는데, 아가레스는 획 돌아보더니 나를 노려봤다.

왜?

이번에는 내가 한 게 아니라, 레오잖아. 쟤를 노려봐야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마주 쏘아봐 주니 그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홀짝였다.

뭐 어쩌라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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