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교양 중 다른 한 과목이 정해졌다.
남은 과목으로는 ‘루인제국 천년 역사의 이해’를 골랐다.
‘거대 괴수 수렵 개론’처럼 날로 먹을 수 있는 강의는 아니지만, 흥미가 갔다. 이곳에 떨어진 이상 적어도 최소한의 지식은 알아야겠다 싶어 도서관에 방문해 책 몇 권을 읽었다.
그중에는 제국에 역사서가 있었는데, 거기서 재밌는 이름을 발견했다
세드릭과 하인즈.
각기 최초의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라 적혀 있었는데, 각기 누나의 전작에 등장했던 인물이었다.
그 둘의 연대기를 읽다 보면 푸흡,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역사와 관련된 과목을 배우면 재밌을 것 같다고 발상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떠들어댈 강사를 상상하니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루인제국 천년 역사의 이해 과목을 택한 건 그래서였다.
“너는 왜?”
강의실 옆자리에는 나비에 러브원이 앉아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캐릭터는 똑똑해야 하고, 안경 쓰고 단정한 인상의 캐릭터는 학업에 소질이 부족해야 하는 반전미가 유행이긴 했다.
그러나 나비에는 아니었다.
“네가 이걸 왜 들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비에는 파악 한숨을 쉬더니 가방에서 교재를 꺼냈다.
“황태자님이 들으실 법한 강의를 몇 개 추려서 찔러봤는데, 하나같이 다 실패네요. 이거 말고도 군주론이랑 제왕학이 있었는데, 그 둘도 빗나가 걸 보면 대체 무슨 수업을 들으시는지.”
“그런 거야 다 집에서 배우고 오셨겠지.”
나비에는 눈물을 훔치는 척 검지로 눈가를 쓸었다.
“슬프네요. 결론은 저는 이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거죠.”
요컨대, 패거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디 악녀 되시는 분이 혼자 돌아다니는 일이 있겠는가? 꼭 주위에 둘 혹은 셋 자기보다 가문의 격이 떨어지는 영애를 반드시 데리고 다니는 법이었다.
나비에는 이번에 황태자와 같은 수업을 들어보고자 주사위를 던졌다.
독강을 하는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황태자를 저격해 같이 수업을 들으려 시도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주사위의 눈은 1에 멈췄다.
“그래도 하나는 남았네요. 아는 사람 있으니까요.”
“나랑 같이 있어도 괜찮아? 보는 눈이 많은데.”
지난번에 같이 밥 한 끼 같이 먹은 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그건 비정기적인 이벤트.
주변에 우리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이번 건 좀 오해를 살 수도 있지 않나?
그런 내 의문을 읽었는지 나비에는 킥킥거리더니 말했다.
“다들 알아요. 그런 소문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걸요?”
“뭘?”
“라파엘 님이 절대로 제게 마음 줄 일이 없다는 걸요. 입학하기 전에 라파엘 님께서 비숏 님에게 추근거렸다는 건 유명하니까요. 얼마 전에 식당에서도, 그러했고요.”
나는 헛기침하고 억지로 웃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렇네.”
“괜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수업 끝나면 식사나 함께해요”
* * *
나비에는 말했다.
“저는 라파엘 님을 응원해요.”
“뭘?”
“저는 비숏 님이 혹시라도 황태자님의 눈에 드는 게 아닐까 무서워서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라파엘 님께서 퍼뜩 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럴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도 싶고요.”
“네가 어떻게?”
나비에는 코를 벌렁거리며 웃었다.
거, 참 뒤끝이 기네.
“학기가 시작하고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비숏 님은 친구가 없죠.”
내 탓이었다. 제프린도 이안도 아카데미 밖으로 쫓아낸 까닭이었다.
“지금 외롭겠죠? 또 그간 열심히 연구했던 실적을 잃었더라고요? 힘들겠죠? 조금만 더 밀면 무너지지 않을까요?”
“그때 내가 도와주는 척하라고?”
“불쾌하신가요? 하지만 이거만큼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요?”
나비에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감정했다.
내 눈치를 살핀다거나 하는 기색은 전혀 없는 걸 보면, 아마 내가 자기 제안을 수락할 거라 자신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원작의 라파엘은 그러했다.
나비에와 손잡고 힘껏 비숏을 괴롭히다가 멋지게 나서려 했다. 등신이 아닌가?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그게 정말 통할 거라 생각했을까?
비숏이 정말 자신을 괴롭히는 뒷손질에 라파엘이 없을 거라 여길 거라 생각했던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나비에와 라파엘은 실패했다.
오히려 황태자의 손에 라파엘은 퇴학을 당했고, 나비에는 꿈이었던 황태자비의 자리를 영영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나비에의 제안을 거부하는 건 그게 꼭 바보 같은 짓이라서만이 아니었다.
“하기 싫어.”
“예?”
“그게 잘 되고 말고, 그냥 하기가 싫어서.”
나비에는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의도적인 게 아니라 자연스레 나온 바보 같은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나비에는 말했다.
“공작가의 자리에요. 그걸 포기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제 도움 없이도 차지할 수 있다는 건가요?”
“갑자기? 너 왜 그래?”
나비에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스퀘어 모양으로 다듬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을 텐데 아프지도 않은지 이를 악물었다.
화가 난듯했다. 왜? 어디서?
그러다 나비에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제가 과하게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언제 그랬냐는 양 살며시 주먹을 펴며 손톱자국이 남은 손바닥이 보이지 않게 두 손을 맞잡았다.
“죄송해요. 라파엘 님께서 저와 같은 걸 원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뭘?”
“그야 신분 상승이죠. 태어난 자리보다 더 위로.”
나비에는 억지로 히히 방실거리더니 말했다.
“현실적으로는 결혼밖에 없잖아요. 더 신분이 고귀한 배우자를 맞이하는 거죠. 저의 경우라면 황태자님이고, 라파엘 님의 경우에는 비숏 님이죠.”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나비에가 내게 과하게 친한 척을 했던 건 순전히 연기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게 비숏을 좋아하는 게 맞냐는 물음이 이것 때문이었네.
“하하, 그래서 저는 제가 조금 유리하다고도 생각했어요. 저는 황태자비가 될 수 있지만, 라파엘 님은 황제가 될 수는 없잖아요?”
“아아.”
“흥분해서 죄송해요. 그냥, 저랑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니야.”
“그래서, 진심이에요? 그냥 하기 싫어서 안 하다는 게. 혹시 그게 왜 싫으신지 물어보면 실례일까요?”
“실례일 거까지야. 말 그대로야. 그냥. 그냥 별로 안 하고 싶네.”
“비숏 님을 포기한 건가요?”
나는 턱을 까딱였다.
“너무 집착할 거까지야 없는 거 같아서.”
나비에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보여주기 위한 제스쳐였다.
“저는 포기 안 할거에요. 꼭 황태자비가 돼 제국의 안주인이 될 거니까요.”
“그래. 응원할게.”
“네. 감사해요.”
이러고 헤어지려다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이야 낮다만, 애가 진짜로 황태자랑 이어진다면 괜찮지 않을까?
여러모로 그럴 듯했다.
우선 내 입장은 남주 후보 중 하나,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후보를 보내버리는 일이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내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일.
그렇다면 나비에는? 그렇게 바라는 일을 도와준다는데 싫어하진 않을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비에를 책상을 툭툭 두들겨 불렀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턱 끝을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신가요?”
“네가 황태자비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예?”
황태자가 비숏에게 마음을 준 건 분명 비숏의 얼굴이 한몫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럴듯한 사건이 몇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너도 나중에,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힘 좀 써줘라.”
* * *
나비에 러브원은 내 열정적인 강의에 태어나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머리를 갸웃거렸고, 코는 찡그린 채 입을 헤 벌렸다.
제 어머니나 혹은 유모가 봤다면 경을 쳤을 일이었다. 누가 거울 하나만 가져다줘도 스스로가 이렇게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듯했다. 난 겨우겨우 웃음을 참으며 나비에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비에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아니 도와주신다는 게 그거에요?”
“왜? 이해가 잘 안 돼? 아니면 기억을 못 했어? 다시 말해줄까?”
“아니, 아니 아니. 그, 이야기를 요약하면 제가 일부러 황태자님을 냉대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응. 대충 비슷해. 정확히는 포커스를 냉대한다는 데에 두는 게 아니라, 사실은 네게 연애 사업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너무 중요해서 거기에 몰입했다는 설정이야.”
“왜요?”
나비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상대방의 말에 단문으로 대꾸하면, 그게 예의에서 벗어났다고 믿는지 늘 말이 길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과 함께 내게 따지듯 대꾸했다.
“푸흡.”
그게 또 우스워 내가 참지 못하고 피식대자 그녀는 실수였다는 듯 얼굴을 숙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잘 모르겠어요. 왜 그래야 하는 거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들어봐. 이게 포인트라니까? 황태자님께 다가간 영애가 여태 얼마나 많겠어? 양손으로 세도 부족할걸? 평범하게 해봤자 거기에 손가락 하나 더 추가하는 거라니까?”
“냉대하는 게 그거랑 무승 상관인데요?”
스읍.
그게 중점이 아니라는 데도 이상한 곳에 초점을 맞추는 게 답답해 도리질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다시금 설명했다.
“딱 한 번만 더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황태자님으로부터 이성이라는 인식을 남기기 위해서는 우선 첫 만남부터가 달라야 해.”
“전 이미 그분을 뵌 적이 있는데요?”
“아, 그래. 그렇겠지. 그러면 이번에 그걸 아예 새롭게 갈아야겠네. 황태자님한테 너를 기억에 파박 남기기 위해서.”
나는 유리창을 깨듯이 허공에 주먹질을 팡팡 해봤다.
나비에는 킥킥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알 거 같아요. 요컨대,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관심 없는 척을 한다는 거잖아요? 근데 왜 하필 그 방법이죠? 다른 방법을 쓸 수는 없는 건가요?”
“그야, 그게 몇 가지 있을 수는 있는데, 이게 제일 효과적이야. 너는 뭘 좋아해? 뭘 잘하고 싶어?”
“예?”
나비에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양 반문했다.
“뭘 좋아하냐니까? 아니면 잘하고 싶은 거는? 이게 중요해. 일부러 황태자님 앞에서 당신보다 제게는 중요한 게 있어요, 하고 어필해야 하니까.”
“어…. 음….”
나비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양손을 들어 풍성한 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손으로 꼬았고, 아랫입술을 치아로 잘근 씹었다. 두 손을 모으더니 손가락 끝으로 손등을 매만졌다.
뭐지? 몸이라도 아픈가?
“야, 괜찮아? 너 왜 그래?”
“그게요.”
나비에는 히죽거리더니 말했다.
“저는 없는 거 같아요. 음식이라면 다들 그러하듯 단 걸, 장신구라면 화려한 것을, 또 그게 뭐가 됐건 간에 이왕이면 아름다운 걸 좋아해요. 하지만 라파엘 님께서 말하신 건 그런 게 아니겠죠?”
“어? 어.”
“그렇다면 저는 좋아하는 거, 혹은 잘하고 싶은 게 없는 거 같아요.”
“아? 그래? 어, 그렇구나. 음. 잠깐만?”
이런 경우는 생각하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특히나 나비에의 침울해하는 표정이 신경 쓰였다.
이렇게 우울한 기색을 얼굴에 비추는 애가 아닌데, 이러니까 괜히 내가 잘못한 거 같고, 미안해할 짓을 한 것만 같았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사실 꼭 그런 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우리는 그냥 황태자님께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어떻게요?”
“너 이번에 수업 여러 개 들었잖아, 그것도 머리 쓰는 과목들로.”
“황태자님이 들으실 법한 과목들을 고르기야 했죠.”
“그래, 그거로 가자. 네가 수석 먹자.”
“예?”